120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들과 공국들이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겔프)로 갈라져 권력 다툼을 벌였다.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기벨린’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영지 비벨링겐Wibellingen에서 유래했다. 비벨링겐의 이탈리아식 발음이 기벨리노Ghibellino였기에, 오늘날 영어식 발음인 기벨린을 황제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겔프와 기벨린이라는 이름이 이탈리아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가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때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기벨린’으로, 이에 맞선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겔프’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눈독을 들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들이 자연스럽게 황제에 맞서 교황을 지지했고, 교황에게 위협을 많이 받았던 농업 지역들이 전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했다.

샹파뉴 정기시의 쇠퇴는 11~13세기 십자군 시대를 규정지었던 국제 교역의 큰 틀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구조와 특성을 지닌 국제무역이 등장하고 있었다. 십자군 시절의 이탈리아 상인이 지중해와 유럽 여러 시장을 돌면서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상인(순회상인)travelling merchant’이었다면, 이후의 이탈리아 상인은 직접 여행을 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서신을 통해 현지 대리인의 상업 활동을 지시하는 ‘정주상인sedentary merchant’으로 변모했다. 그런 점에서 정기시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이 새로운 사업 방식의 도입, 즉 서신을 통한 사업 관리 방식의 도입이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제2기는 무엇보다도 ‘해상혁명nautical revolution’의 시대였다.
4 이 해상혁명의 핵심은 수송비를 낮추기 위해 좀 더 튼튼하고 큰 선박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나침반의 사용과 추측항법의 도입, 해도海圖의 제작과 같은 항해술의 발전 또한 해상혁명의 중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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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지중해와 그 너머 아시아 세계의 교역 구조뿐만 아니라 서유럽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직물 산업의 지리적 구조조정, 금화 주조와 같은 화폐시장의 변화, 봉건 왕조의 수도 파리와 같은 대규모 소비 시장의 부상, 상업이 안정되고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율 하락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 영역이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아시아 시장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한 15세기 말보다 한 세기 이상이나 앞서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시장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몽골제국 덕분이다.

아시아로 가는 선교사나 외교사절들은 상인들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이용한 길은 대체로 상업 노선과 일치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도미니쿠스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 상인들이 상관을 세우거나 꽤 활발하게 장사를 했던 곳은 킵차크한국의 카파, 타나, 사라이, 일한국의 수도 타브리즈, 흑해의 타나에서 대도로 가는 교통로에 위치한 우르겐치, 사마르칸트, 알말리크, 대원제국의 수도였던 대도, 중국 남부의 광주, 천주, 항주, 양주(양저우)와
††같은 항구도시들, 인도 북부의 델리,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카가, 타나, 퀼론 등의 항구도시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주교 관구管區가 설치되어 있거나 수도회가 활동하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Alfonso V의 주문으로 베네치아 출신 수도사 마우로Mauro가 제작한 지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이 꽤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콜럼버스와 다가마 이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 낸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몽골 평화시대에 베네치아 상인과 선교사들이 아시아를 직접 보고 얻은 지리적 정보 덕분이었을 것이다.

15세기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은 원료 공급지와 판매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 결과, 중간 규모의 도시들은 주요 도시들의 위성도시로 전락했다. 베네치아는 15세기 초 북서부 이탈리아로 팽창해 베로나·파도바·라벤나를 정복했고, 피렌체는 300년 동안의 긴 싸움을 끝내고 1406년 피사를 병합하면서 막강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전까지 제노바 상선을 주로 이용해야 했던 피렌체는 이제 자국 선박을 이용해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피렌체 정부는 베네치아 모델을 본떠 피렌체 정기 선단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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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은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세 이탈리아 상인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원활한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변화해 갔다. 15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상인은 12세기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질적으로 달랐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큰 수익을 노렸던 모험적 성격의 ‘여행상인’이었다면, 15세기 이탈리아 상인은 해외 각지에 주재원을 두고 현지에서 일어난 상업 거래를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와 서신으로 보고받으며 꽤 큰 자본을 투자해서 안정적인 규모의 이윤을 도모했던 정주상인이었다.

중세 말 이탈리아 상인들이 취급한 품목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수송비가 비교적 비싸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했을 거라 여겨지는 여러 가지 농산물과 제조업 생산 원료, 완제품까지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탈리아 상인이 주도했던 중세 지중해 무역에서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상호의존하게 만들었던 것은 직물 산업이었고, 그 원료가 된 면화와 인디고, 명반은 동서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였다는 아불라피아의 지적은 직물 산업의 원료와 완제품이 향신료 못지않게 이탈리아 상인들의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음을 말해 준다.

베네치아는 시리아·이집트와의 교역에, 제노바는 비잔티움제국과 소아시아 반도와의 교역에 집중했다. 당연히 취급하는 상품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있었다면, 제노바 상인들에게는 명반이 있었다.

명반은 주로 지금의 터키 일대인 소아시아 반도에서 생산되었는데, 명반의 주요 고객은 모직물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와 잉글랜드 등 북서유럽 지역이었다. 결국 제노바는 소아시아에서 생산된 명반을 대량으로 대서양까지 수송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박을 건조해야 했다. 또한, 가급적이면 직항로를 선택하여 수송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지중해에서 명반을 선적하고 대서양으로 향하는 제노바 선박은 가능한 한 본국을 거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 결과, 15세기 제노바 본토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던 반면 동지중해에 위치한 제노바 식민지들은 크게 번성했다. 이로 인해 재정수입이 줄어든 본토 정부는 이제 제노바 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거나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명반은 중세 말 제노바의 경제적 명운을 결정한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행운은, 오스만튀르크가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최종적으로 비잔티움제국을 몰락시킨 후 제노바의 명반 수급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상황에 처하면서 찾아왔다. 물론 이때도 일부 제노바 상인들이 오스만제국 내에 위치한 명반 광산 대부분을 임차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명반 교역에서 제노바 상인이 누렸던 독점적인 지위는 이제 무너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술탄은 포카이아를 점령한 후 제노바 상인들을 내쫓고 명반 광산 채굴권을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양도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동지중해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우선적으로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엄격히 시행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이 잘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본섬과 가까운 곳에 소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방에서 베네치아로 들어온 향신료, 면화 등은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독일로 팔려 나갔다.

소란초 형제상회는 15세기 초엽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규모의 중개무역상으로서, 베네치아 도시국가의 귀족이었던 소란초Soranzo 가문의 네 형제들이 함께 만들었다.(형제들의 이름은 도나도Donado, 자코모Giacomo, 피에트로Pietro, 로렌초Lorenzo이다.)
1 이탈리아어로 ‘프라테르나Fraterna’라고 하는 ‘형제상회’는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업 형태였다.(‘프라테르Frater’는 라틴어로 ‘형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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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부자 또는 삼촌이나 조카 등 혈연관계로 얽힌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자금을 출자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안정적인 결속력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시대의 일반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달리 소란초 상회가 집중 투자한 상품은 바로 면화였다. 그렇다고 소란초 형제상회가 다른 상품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12 다만, 그들의 핵심 사업이 시리아 현지에서 원면(가공하지 않은 솜)을 구입해 베네치아에서 유럽 상인들에게 되파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소란초 상회의 사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다양한 종류의 면화에 분산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마스, 트리폴리, 아크레, 알레포, 라타키아(시리아 북부의 항구도시) 등 시리아의 여러 면화 생산지에 대리인이나 동업자를 두고 그들에게서 원면을 확보했다. 가장 중요한 거래처였던 하마스에서는 형제 중 한 명이 직접 면화 구입을 담당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면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업과 수송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후원 덕분이었다. 제노바 상인의 경우, 상품을 구입하고 이를 수송할 선박을 찾는 일을 모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을 감시하는 관리자를 선박에 동승시키는 사소한 일까지 모두 자비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반면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정기적인 수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고, 상품에 꼬리표와 선적 송장만을 동봉해서 보내면 끝이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은 정부와 정부 주도의 정기 선단 운영자들이 보장해 주었다.

베네치아는 기존 갤리선의 속도를 그대로 살리면서 화물 선적 능력을 증대시킨 새로운 형태의 갤리, 즉 ‘갤리 상선’을 건조했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 갤리선을 ‘대형 갤리’라 불렀다.
갤리선은 국가 소유였지만 ‘인칸토incanto’라 불리는 경매를 통해 투자자와 선장을 모집했다.

정부의 체계적인 후원과 지원 덕분에 베네치아 순례 선단은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성지순례 여행 상품이 베네치아 정부가 제공한 순례 선단이었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년 수백 명의 독일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이베리아인, 이탈리아인들이 이 순례 선단을 이용해 성지를 다녀왔고, 그중에는 이를 여행담으로 펴내는 이들도 있었다.

대리인들은 매일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일기장journal의 ‘차변debit’과 ‘대변credit’란에 나누어 이중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일기장의 내역을 다시 좀 더 큰 장부인 원장ledger에 옮겨 적었다. 일기장이 시간순으로 거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면, 원장은 동일한 사업이나 인물에 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함께 묶어서 정리한 장부였다. 한 마디로, 거래의 분석을 용이하게 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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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 덕분에 본국에 있는 상사의 대표는 해외시장에 파견한 대리인의 모든 상업 거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활동하던 15세기 초가 되면 이탈리아 상인들 대부분이 정주상인으로 거래를 주관한다. 본국에 거주하면서 해외에 파견한 대리인들의 활동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정주상인 입장에서는 모든 거래 내역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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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복식부기로 된 회계장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티니의 최종 유언장은 그가 돈과 구원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구원을 얻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증했다.
†다티니가 참회를 한 것은 임종 직전이 아니라 죽기 10년 전쯤이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 줄 좋은 방법을 찾던 그는 산 파비아노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은 두 가지 제안을 했는데, 첫 번째는 프라토 근처의 ‘라 사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는 약간의 땅과 수도원을 사서 그것을 마음에 드는 교단에 기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산 관리를 프라토 성직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라포는 이 제안을 듣고 분개했지만 유언장은 그대로 작성되었다. 이후 2년 동안 라포는 다티니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라포는 성직자들은 탐욕스러운 늑대라 여겼고, 그들에게 돈을 맡기면 헛되이 탕진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다티니는 1400년 유언장을 수정했다. 바뀐 유언장의 핵심 내용은, 유산 관리를 성직자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성직자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제노바의 쇠퇴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제노바는 완전히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이 중세 후반 제노바 상인들의 핵심 사업 무대였던 비잔티움제국을 무너뜨리자, 다수의 제노바 상인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로 상업 거점을 옮기며 살아남았다. 이렇게 이동한 제노바의 인력과 자본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대륙을 찾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16세기 들어 은행과 금융업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냈다. 제노바 상인들은 이전까지 지중해 무역에서 엄청나게 벌어들인 자금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제적인 은행가로 변신해 갔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은 거래를 담당했다. 18세기 초 제노바의 해외투자 규모는 유럽에서 네덜란드 다음으로 컸다.

브로델은 18세기에도 제노바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활기찬 모터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 통일운동 시기에는 산업을 창조하고 근대적인 해군을 만들었으며 이탈리아 은행도 제노바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1530년대 이후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의 향신료 무역이 다시 한 번 활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에는 15세기 최고 전성기 수준 또는 그 이상의 향신료가 베네치아로 수입되었다. 인도 항로를 경유한 향신료 무역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결국 베네치아는 인도 항로 개척 이후 한 세기 이상을 잘 버텨 냈던 것이다.
게다가 16세기 말에는 향신료가 베네치아 무역과 경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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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서남동양학술총서 51
유인선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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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베트남의 역사를 중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근현대 시기 역사부터는 익숙해도 그 이전까지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들어 아시아의 역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지식이 조금 있을 뿐이다. 


베트남은 현재도 그렇지만 고대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물론 베트남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서로 교류하며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 내부가 혼란하면 주변국은 힘을 발휘하여 뻗어나갈 기회가 생기고, 반대로 중국 내부가 평화로우면 주변국은 그 힘을 비축해야 하는 시기를 보냈다. 이는 한반도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힘이 강해져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더 나아가 독립을 하는 과정, 반면 중국 세력에 밀려 압박을 받아 부침을 겪을 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자주 독립을 열망하고 평화를 꿈꾸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비슷했을테니 말이다.


지금의 베트남 영토가 되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화와 농경의 시기를 거친 뒤에도 베트남은 지역별로 각각 쪼개져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베트남의 지역 토호에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이 중 조타라는 관리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중국인 관리였음에도 현지에 적응한데에서 나아가 새롭게 파견된 중국인 관리를 향해 마치 현지 사람인 것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한(漢)은 결국 남비엣을 지배하려 들었고 이에 맞서 쯩자매가 봉기하였다. 한은 대응을 위해 마원을 내보낸다. 쯩자매가 나선 것을 보면 당시 사회가 모권 사회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베트남인들은 쯩자매를 영웅시한다고 한다.


한 정부는 반란 수습을 위해서 남비엣에 관리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착취와 부패가 심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사섭은 중국에 동탁, 조조, 손권, 유비, 관우 등이 활동하는 삼국 시기에 손권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활동을 한 인물인데다 베트남 토착 사회에 지지를 얻었다고 하여 눈길이 갔다. 반면 도씨 3형제는 중국 왕조에 협력을 한 인물이다.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되자 베트남을 확보한다. 당이 들어섰을 때는 안남도호부가 현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십이사군 시대에 딘보린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다. 중국 황제에게도 충격을 주었겠지만 이후 베트남 왕조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 같다. 


967년에 딘 보린은 장자인 리엔을 남 비엣 브엉(Nam Viet Vuong, 南越王)에 봉하고, 다시 1년 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까지 제정하여 타이 빈(Thai Binh, 太平)이라 하였다. 남비엣 브엉이란 칭호는 전한(前漢) 초기 한에 대항했던 조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6세기 리본이 남 비엣 황제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는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중국 사료들은 리엔이 남 비엣 브엉에 봉해진 것을 딘 보린이양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딘 보린의 칭제를 몰랐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베트남에서 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리본이 티엔 득이라고 한 경우가 처음이며 이때가 두번째인데, 이 역시 황제의 칭호처럼 중국 군주와 대등하다는 표시이다. - P130


중국의 원나라 시기에는 쩐 왕조의 쩐 홍 다오가 활약을 했다. 그는 고려의 대몽항쟁을 떠올리게 하듯 원과의 몇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나라도 대몽항쟁 하면 삼별초의 영웅들을 떠올리듯 쩐 홍 다오는 베트남에서 영웅을 넘어 신으로 모셔진다고 한다. 

쩐 왕조가 원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쩐 홍 다오였다. 그는 천부적 전략가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의 힘이 강할 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는 등 소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했다. - P169~170


중국의 명나라 시기가 되면 영락제가 베트남을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에 맞서 베트남도 잔딘데나 쩐 꾸이 코앙 등이 저항했다. 이후 명은 베트남 남부 지역까지 정복한 뒤 통치자에게 안남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준으로 베트남 최초의 왕조는 언제이고 누가 열었을까?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1802년 5월 푸 쑤언에서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자롱(Gia Long, 嘉隆)이라 정했다. 자롱이란 자 딘에서 탕롱까지란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뜻한다. 연호의 제정은 통일에의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응우옌 푹 아인, 즉 자롱 황제는 5월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 떠이 썬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 얻고자 찐 화이 득(Trinh Hoai Duc, 鄭懷德)을 여청정사(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고 한 것은 청과 대등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257

그러니 사실상 현재의 베트남의 모습은 19세기 초가 되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호찌민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종전 후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제하에 둘 것인가를 묻자, 장제스는 그곳 사람들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장제스에게는 국내의 공산당과 군벌 같은 문제가 인도차이나보다 더 중요했다. 그때문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대신 제안하기를, 인도차이나가 전후에 독립할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제안은 1943년 중국 내의 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은 박탈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P308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베트남 혁명 동맹회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과정을 거쳐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 군대가 베트남에 진주할 때 호찌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벌인다. 그러나 퐁텐블로 회담이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위주로 이루어지자 호찌민 정부와 프랑스군은 충돌하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호찌민 정부는 디엔비엔푸 전투로 대응했다. 결국 제네바 협상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북위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은 쪼개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하노이 정부가 남부 공산당을 지원하면서 베트콩이 시작되었다. 

1963년 응오딘지엠 형제가 살해되고 케네디가 암살된 후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발화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8년 북베트남과 중국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료되기까지 베트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물론 미국도). 


하노이정부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캄보디아 왕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베트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인물들이 론 놀에 대한 왕정의 저항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지만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원치 않던 친중국 계열인 폴 포트(PolPot)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1971년 7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베트남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캄보디아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 P417


북베트남 정부가 친소 정책을 펴자 중국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에 베트남과 중국 간 영토 분쟁까지 더해지며 1979년 양국 간 전쟁이 벌어졌다. 악화된 관계는 1980년대 말이 되기까지 이어진다.


1975년 통일 후 하노이 정부는 남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주의화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남부 화인의 통합을 위한 급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앞서 호찌민 시가 점령된 1975년 4월 30일 밤 중국인들의 거주지인 쩌런(Cholon) 지구에서는 중국 국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중국인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물자를 매점매석하여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 1976년 1월 베트남정부는 남부의 모든 화인들에게 국적을 등록하게 하고, 이어 2월에는 강제로 베트남 국적을 취득케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배급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다시 이듬해 2월 하노이정부는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화인들에게 직업을 제한하고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유의사 형식으로 귀국시킬 방침을 세웠다. - P441

중국의 1979년 2월 베트남 침공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아니었는가 한다. 양국의 분쟁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언제까지 대립할 수만 없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재삼 인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위협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생각하며 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이후 중소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 P459


베트남과 중국 간 외교 정상화는 1991년 수교가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후 양국 간 활발한 경제 교류가 이어졌으나 중국이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베트남을 포함한 주변국도 위협을 느끼는 중이다. 게다가 1992년 중국이 영해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국제 사회에 남중국해라 선언한 뒤 군사까지 배치시키며 주변국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으로 베트남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겠으나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계속해서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혹의 많은 부분은 남중국해에서 일어난 충돌과 석유채굴권 문제이다. 베트남은 또한 중국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대화 및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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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책읽는 속도가 정말.... 굉장합니다.
얼마전에 위안부 책 읽으셨는데 벌써 이런 분량의 책을.... 존경합니다. ^^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페미니스트 크리틱 3
권은선 외 지음, 김은실 엮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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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는 그것이 발생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피해자들의 증언이 정확한가, 당시의 법이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거나 위반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현실을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혹은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담론에 대한 쟁점을 들여다보고 위안부 문제를 탈식민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위안부 연구'와 관하여 이브 세즈윅의 '편집증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를 가져와 제시한다. 편집증적 읽기는 글을 읽기 전에 이미 텍스트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며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의심의 방법론이다. 반면 회복적 읽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단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선언적 지식에서 벗어나는 앎의 형태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편집증적 읽기보다 열려있는 관점이다. 당연히 저자는 후자의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간단하게는 책을 읽는 방식이지만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복잡한 문제에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주목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민족주의, 보편주의 관점에서.

두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은 없었는가? 램지어가 주장하는 대로 계약에 따른 경제적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세 번째, 소녀상에 설정된 고정 이미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위안부 관련 판매 굿즈에 돈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네 번째, 영화 귀향에서처럼 피해자를 두둔하는 방식이 결국 가해자들의 방식대로 재현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폭력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닌가.


1. 정대협은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책 마련과 후원을 위해서 탄생한 민간 단체다. 몇 년전 정대협 기금 논란이 터진 이후에는 그 성격이 . 고노 담화 이후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정대협이 발표한 내용은 조선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성 노예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나 일본인 위안부는 공창 출신이 많았기에 동일한 성격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시타 영애는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대협의 관점은 민족주의적 인식이 농후한 인식이었다 생각된다. 

야마시타 영에는 또 위안부 피해 보상에 대한 국민기금 정책에서도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 하여 거절한 것에 대해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은 반영된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대응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2. 박유하가 한참 논란이 될 때가 있었는데 램지어의 논문 발표 이후에는 그 파장도 그렇고 논란이 저물 줄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램지어는 <태평양전쟁기 섹스 계약> 논문에서 '모든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위안부 여성들이 합리적 계약에 의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생각에 계층 간 권력 관계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면 다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의 논문은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 매매 산업조차도 옹호하고 있는 것이 문제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일'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3. 소녀상은 늘 정형화된 모습이다. 단발 머리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댄 모습. 이런 소녀상의 모습이 위안부가 할머니에서 소녀로 이미지화되는 데 한몫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면 마치 피해자의 신체가 훼손된 것처럼 대응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해외 각국에 전시 성폭력 문제의 해결 촉구를 위해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다. 이를 철거하려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현지에서도 그렇고 국내 정치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소녀상은 어느새 소비되는 물체처럼 되어 버렸다. 

과거 나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나비,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이 담긴 에코백이나 노트 등 여러 굿즈 물품을 산 이력이 있다. 내 생각은 그랬다.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대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산 물품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은 없이 말이다. 


4. 영화 <귀향>은 역사적 사건,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나 책에서 언급하는 장면의 내용, 카메라 워크 등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힘겨웠다. 재현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비단 현재에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는 주관적인 입장이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하고 뺄 것인가에 따라 영화의 내용은 달라진다. 하물며 같은 내용을 조감도로 보느냐 투시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기도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독 및 스탭진이 여러 개의 장치를 두었으리라 짐작할 만하지만 거기에 과연 피해자들의 입장은 고려되었는가 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주체성이 부정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는 일은 현재도 역시나 불편하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표현한 설정은 문제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5. 일본 제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응으로 인해 이슈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로써 위안부는 글로벌화된 피해자 또는 희생자가 되어 보편 인권의 문제에서 다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인권과 보편성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에 부족함은 없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제국주의든 전시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있었다. 다만 상황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를 보편적으로 정리가 가능하냐 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역과 맥락을 고려하면 보편 인권과 폭력에 대한 피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모으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글로벌 보편적 관점은 좋으나 차별되고 배제되는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필진의 말에 공감했다. 


향후 위안부 담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제 정말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 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 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 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8~389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8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 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 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 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6

리지웨이에 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 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 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8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 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P462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이제 관련 당사자나 ‘귀속국‘을 떠나 국제적인 지평에서 논의되고 있다. 캐럴 글럭은 ‘이동하는 비유‘로서 글로벌 기억 경관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에 주목했다. 그는 ‘위안부‘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처럼 ‘상징 권력‘을 가진 ‘글로벌 희생자‘로 보편화되는 순간, 그것은 일본이나 아시아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된다고 했다. 또한 미국에서 ‘위안부‘ 연구를 이끈 마거릿 스테츠는 미국 대학에서 초국적 텍스트로셔 ‘위안부‘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제기하며 ‘위안부‘학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이것은 ‘위안부‘ 역사가 국제사회의 인정 체계 안으로 편입돼 글로벌 기억 장소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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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5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기 시작햇는데 화가님처럼 저 첫문장에 확 꽂혔어요. ^^

거리의화가 2024-09-29 18:26   좋아요 1 | URL
저 문장 좋죠? 역사를 역사로만 평가해야 하는가. 그러기에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역사라 현실로 소환되면서 정치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람돌이 님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해집니다.
 
화교 이야기 - 중국과 동남아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2
김종호 지음 / 너머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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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화교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 두 사항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겠다. '화교'는 낯설지 않은 단어였지만 정작 화교의 기원과 역사를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화교인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타이완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많이 진출해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화교'라는 용어가 무얼 말하는 것이고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역사를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등장한 용어가 바로 ‘화‘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 시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한다. 즉 ‘화교‘는 중화인으로 다양한 목적에서) 해외에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귀향 혹은 귀국을 담보로, 잠시 머무르기 위해 동남아시아 및 홍콩으로 진출하여 무역과 노동에 종사하는 중국계 이주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청 제국 출신의 해외 거주 중국인은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潮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그 출신 지역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는데,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후 화교 가운데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의 경우 ‘화인으로,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을 ‘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 P43~44

'교'라는 의미가 '잠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이미 화교는 그 역사적 시기가 꽤나 지나 3세대는 기본이고 4~5세대 정도까지는 진행되었으리라 본다. 


화교는 근대 시기 민난 이민을 시작으로 고향을 떠나 근로 계약 또는 불법 이민을 통해 타국으로 넘어갔다. 힘든 노동으로 식민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한 아편을 달고 살았고 어려움을 함께 할 동향 조직의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화교는 지역, 방언에 기반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막연히 나는 푸젠성에서 넘어간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민난과 푸젠 말고도 다양한 지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림 삽입]

천복궁은 푸젠 지역 사람들이 주로 모여 푸젠 회관을 만들었고, 민난 지역 사람들이 모인 곳은 진지앙 회관이었다. 이 둘이 나중에 합쳐져 중화총상회 또는 중화회관으로 통합되었다.


화교 네트워크는 이민, 무역, 송금이라는 핵심 구조로 돌아갔다. 화교인들은 일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일부는 국내 투자를 하는 형식으로 교비를 사용했다. 교비를 위해서 화교인들은 교비국을 만들었는데 은행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송금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비국의 형태는 초기에 사람 역할을 하는 귀요핀 같은 수객이나 객두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객잔이나 상업기구 내에 맡기는 형태가 되었다. 


화교의 송금은 기본적으로 외국의 화폐를 국내로 보내는 것이어서 그 중간에서 태환, 즉 환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만 20세기 이전 수객과 교비국의 주요 태환 방식이 화폐-상품-화폐였다면, 20세기들어 그 방식이 ‘환어음‘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환어음 방식은 주로 송금 방법 중 표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비 의뢰를 받은 교비국은 환어음을 구입하여 수신자 개인에게, 혹은 분국이나 연호에 보내는데, 그 환어음의 출처가 바로 은행이었다.

화교 송금 네트워크에서 은행의 역할은 외국 화폐인 화교의 송금을 국내 화폐로 태환해 주는 것이었다. - P88~89


인도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교 상인은 화상으로 불렸다. 

피식민인으로서 인도 상인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그 상업적 영역을 확장했고, 일본 상인의 경우 본국의 제국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두 상인 집단 모두 근대 시기 ‘제국‘이라는 초국적, 초지역적 정치체제의 보호 아래 비교적 쉽게 아시아 시장에서 나름의 영역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두 그룹은 때로는 화상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 P114

이들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화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 또는 협력했다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들 중 일부는 같은 친일을 했지만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분컹은 평가에서 살아남았으나 오분호는 살아남지 못했다.  

인종, 문화, 종교, 공동체에의 소속감 등은 흔히 인류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상에게 이러한 가치들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동체를 형성한 화상의 경우에는 본국의 지원 없이, 심지어 돌아갈 수도 없는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또 여러 지역에 초국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근대 화상의 경우 여러 정치체에 동시에 ‘협력‘해야 한다는 생존 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화상만의 특징이다. - P120


탄카키는 애국주의자였지만 친공 활동으로 다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탄카키가 1946년에 보낸 전보의 수신인은 각각 대통령 트루먼, 마셜 장군, 주중대사 레이턴이었다. 그는 스스로 화교지원기금조직Overseas Chinese Relief Fund Organization의 회장이라고 칭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체 화교overseas Chinese in Southeast Asia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였다. 그 핵심 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의 침입이니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화교공동체에서 지도자 격의 존경을 받고 있던 탄카키의 전보는 그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의 화교를 순식간에 ‘친공산당파‘와 ‘친국민당파‘로 갈라서게 만듦으로써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동남아 화교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었다. - P154


화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스페인까지 나아가면서 인종 간 결합으로 많은 혼혈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화교만의 일은 아니고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흐름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정되지 않고 차별이나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거나 충돌까지 나아가는 양상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배 세력이 있으면 피지배 세력이 생기고 이것은 반복될 수 없는 문제인가 여러 가지로 고민을 낳게 한다.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의 중국계 메스티조 그룹과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 중국계 페라나칸 그룹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국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 사회를 링크시켜 주는 역할과 서구 식민 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는 역할 모두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가 ‘중국인-동남아 현지 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만 이러한 중국계 혼혈의 적극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196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숍하우스' 부분이다. 타이완에 놀러갈 때마다 익숙하게 보았던 건물의 양식(1층은 여러 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고 베란다 복도를 가지며 건물 1층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햇빛을 막아주는 형태...)이었는데 그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숍하우스의 기원이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찌 됐든 중국 상인이나 노동자가 동남아시아 등지로 진출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해당 양식은 기후적으로는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어 서늘함을 유지시켜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적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관 양식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숍하우스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뚜렷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근거가 확실한 부분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해 볼 수는 있다. 송대 이후 명·청 시기까지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 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푸젠과 광둥 출신 중국 상인 및 노동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반도에 진출하면서 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가져온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 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 P212~213


싱가포르는 전 인구의 75%가 화교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진출해 있는 국가다. 그래서 이 책에도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 싱가포르의 화교 정착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1965년 독립하여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탄생했는데 현재는 다인종 다민족 국가로 작지만 알맹이가 튼실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독립할 때 말레이 정부의 경계로 우여 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리콴유의 힘도 경계한 것이겠지만 말레이 정부가 무엇보다 다인종 다민족에 대한 공존을 경계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실제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말레이 연방 중앙정계에까지 영향을 행사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말레이 중앙정부가 경계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말레이 주요 정당들은 1964년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 연방의 보통선거에 뛰어들 것을 결정한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의 구조가 다인종들 사이의 공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말레이 무슬림 위주의 중앙집권적 국가의 수립을 계획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중앙정계의 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 P288


동남아시아를 전체적으로 다룬 역사책도 몇 권 없으니, 화교만을 주제로 다룬 책은 더욱 드물다 해야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출간 자체에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연구를 목적으로 접하든 나처럼 교양으로 접근하든 어느 정도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잘 읽혔고 관심을 가질 만한 역사적 요소가 많아 흥미롭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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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2>
영국의 찰스1세의 폭정에 의회는 권리청원을 내세웠으나 이를 강제로 무마하려다 결국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는 결말을 맞는다.
찰스1세 사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지만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또 다른 폭정이 시작되어 국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그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다.

<CH13>
루이14세는 신을 대표한다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다. 베르사유 궁전을 지으며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높게 매겨 후반부로 갈수록 백성들의 화가 치솟는다.

<CH14>
독일의 제후국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왕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1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군대를 파병해 신성 로마 제국을 도운 대가로 1701년에 황제로부터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허락받는다. 그는 여러 차례 종교 전쟁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며 군사력을 강화해 18세기에 독일 제후국들을 이끄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CH15>
메사추세츠에 정착한 영국인들과 현지 부족민인 왐피노그족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이어졌다. 그 결과 왐피노그족 추장은 살해되고 부족민들은 쫓겨나야 했다.
뉴프랑스 지역의 휴런족이 약해진 사이 현지 부족민인 이로쿼이 족이 공격하여 뉴프랑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영국 해군 제독의 아들인 윌리엄 펜은 퀘이커 교도로 아버지에게 쫓겨나고 결국 퀘이커 교도를 이끌고 미국의 펜실베니아에 가게 된다.

<CH16>
윌리엄 펜은 모든 이가 평등한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곳이 자신의 국가가 아니라 결국 다른 땅을 점령하여 만들어지는 식민지라는 것이 함정!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넘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넘어 아이작 뉴턴이 중력을 발견하는 과정은 언제 읽어도 참 흥미롭다. 존 로크가 이야기한 평등과 민주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친다. Western Ideas? 계몽이란 단어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 발전을 이룬다.

<CH17>
표트르(영어로는 Peter) 1세는 누나인 소피아와 권력을 경쟁하다 군대가 자신 편에 서면서 오롯이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차르에 오른 그는 영국의 배와 해군을 부러워해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부동항 밖에 없어 아조브 항구를 얻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를 넘어설 수 없어 결국 유럽을 여행하며 서쪽의 문화를 배운다. 수염을 깎고 옷을 그쪽 방식으로 입으라고 가위를 가지고 따라 다녔다는 것이 포인트!!!

<CH18>
아흐메트 3세 하의 오스만투르크는 서양의 영향을 받았고, 그는 튤립왕으로 불렸다.

<CH19>
벵골 태수인 시라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불만이 있었다. 영국인이 윌리엄 요새 보강을 명령하자 대군을 동원해 체포하라 명령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지역 군이 맞서며 플라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영국군이 승리하며 벵골은 영국 식민지가 된다. 영국은 인도 전역에 지배권을 강화한다.

<CH20>
청의 건륭제는 천하의 모든 책을 수집해 정리한다는 명령 하에 사고전서를 짓게 하고 보관을 위해 문연각을 세운다.
1750년대부터 시작된 정복 활동으로 주변 지역인 중가르, 위구르 등 서역, 베트남, 미얀마, 타이완에 손을 뻗친다.

<CH21>
북미를 두고 벌어진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이 세 차례 일어났다.
슐레지엔 지역 영유권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프로이센과 영국이 승리하여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이 벌어졌다(영국이 승리).

<CH22>
비록 미국으로 건너가기는 했지만 영국인들은 본토와 같은 권리를 받기를 원했던 영국인. 차별적인 차 관세으로 말미암아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에서 식민지인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보냈다. 영국 정부의 의도를 간파한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대비해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이는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고 아메리카 식민지는 독립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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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23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정말 엄청 성실하시네요. 하기로 한 건 또 반드시 해내시고요. 꾸준히 읽고 싶은 책도 읽으시면서 또 꾸준히 함께 읽는 책들도 읽어내시고 정말 멋져요!!

거리의화가 2024-09-23 07: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저는 다락방 님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지 않잖아요. 조카랑 놀아주고 요리도 하시고 가족, 친구와 시간도 보내시고 달리기랑 요가도 꾸준히 하시니^^ 그게 얼마나 에너지가 필요한지 알기에 저는 그저 감탄만 합니다.
저 이번주부터 피티 운동 시작하거든요. 몸이 저질이라 걱정입니다ㅠㅠ 건강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이어가봐야겠어요.
다락방 님 한주 화이팅입니다!

건수하 2024-09-3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로 복습-예습중입니다 ^^ 피티 시작하시는 군요. 화이팅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4-09-29 18:21   좋아요 1 | URL
수하 님 제 글로 복습, 예습을 하시다니 민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필라테스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해보려고 합니다. 응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