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개인의 삶에서 나아가 철학과 사회, 역사까지 아우르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절감하고 있다. 몰랐던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그녀의 삶에서 배우는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덤으로 얻어간다. 이 고급 정보가 에세이로 담겨 쓱쓱 읽혀서 더욱 좋다.
마리아 미즈는 어릴 적부터 농민의 딸로 태어나 자급자족하는 삶을 느끼고 배웠다. 내 땅을 소유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보장되었던 공유 재산의 가치, 공동 작업과 상호 부조에 대한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이후 독일에 나치당이 사회에 뿌리 내렸고, 생활하던 마을에도 불어닥쳤지만 미즈의 부모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미즈는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기에 나치즘을 설파하는 학교 교사에 대해서도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후반을 지나며 아이들은 전쟁놀이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을 짐작하며 성장했다(적군은 늘 프랑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미즈의 다섯 오빠들은 징집되어 독일 상비군으로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쟁으로 마을에 난민들이 들어닥치자 미즈의 가족들은 피난처를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미즈는 그들에게서 대도시의 폭격과 기아, 파괴 등 처참한 전쟁의 피해에 대해 듣는다.
상대적으로 서부에 치우쳐 있던 마을은 전쟁 초중반까지는 버텼으나, 미국이 프랑스를 침공한 뒤 독일까지 밀고 들어와 마을이 공격받자 지하실로 대피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쟁은 끝이 났고 전쟁터로 떠났던 미즈의 오빠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험난한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즈의 어머니의 자급자족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 말이다.
미즈가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었다.
기독교 도제 하의 교육 시스템은 소년 기숙사만 제공되었고 소녀기숙사는 없었는데 나치는 체제에 협력하고 부응하는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과거의 이런 관행을 깼다. 나치즘은 문제지만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준 것은 일정 정도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여서 섬뜩하다.
15살 이후가 된 소녀는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하녀로 있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즈는 이를 거부했고 16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학교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인도’라는 세계를 만나 외국어 학습을 할 기회가 생겼고,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타자를 통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이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철학 하에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 세계가 좁다고 느꼈다. 세계로 나가 변화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인도에서 독일문화원 강사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미즈는 인도의 종교, 카스트 규범 제도와 인도 여성의 실제 삶 간의 괴리 등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지인이 한 말이 후에 그의 삶을 바꾸었다.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년을 채우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그녀를 받아줄 만한 그릇의 사회가 아니었다. 1968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서 미즈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마르크스주의에 감화를 받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가 그녀를 행동하는 삶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가톨릭교로 자란 그녀는 야간시국기도회의 참여를 통해서 종교(교회)와 정치가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는 여성 차별과 억압 문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1년 1월 야간시국기도회 체제공개비판 선언을 통해 그녀는 종교가 더는 억압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버린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적 폭력이 공적인 사회 문제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도왔다. 페미니스트 연구 방법론을 통해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의 가사 노동이 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는 비단 여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농민과 농촌은 낙후되고, 노동자와 도시는 진보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나는 ‘노동’, ‘생산 노동’ 같은 용어를 명확히 하고 싶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파란색 책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의 정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972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Luxemburg, 1913)을 읽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룩셈부르크가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비자본주의 환경’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비자본주의 환경’이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일용직 및 식민지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엔에서 정한 ‘비공식 부문’의 착취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파괴한다(Bennholdt-Thomsenm, 1981). - P1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