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셀린이 야기하는 효과는 그것들과 너무나 다르다. 그는 우리 속에서 방어 기제나 습득 언어 같은 것을 피하게 만들거나 아니면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는 무엇인가를 불러낸다. 나체·유기 · 지긋지긋한 불쾌함 · 실추 · 출혈 등 아무도 고백하지 않지만모두가 알고 있는 것, 즉 비천하고도 대중적이며 인류학적인 모든 허위 속에 자리잡은 비밀의 장소, 셀린은 바로 그같은 것들이 진실이며,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믿게끔 한다. - P204

그곳, 그가 우리와 관계를 맺는 자리는 그의 글쓰기에서이다. 희극 배우인가, 순교자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고, 동시에 둘 다일 수도 있다. 마치 자신의 술책을 믿는 진정한 작가처럼 말이다.

길들여진 당신의 아브젝시옹조차 《인형 악단》의 문체가 되어 《미래의 몽환극》은 계속될 것이다. 문학적으로 순수한 문체 속에서, 내부로부터 포착된 초월성과 감각들, 동사의 희열을 위해 문학을 또 한 번 뚫고 나가야 한다……… - P205

의미의 흡인과흡수·삼킴·소화 그리곤 파기, 그곳에는 말의 위력과 죄악만이 존 - P206

재한다. 셀린 교향악의 다중 의미 속에 내재한 음악·흔적·정치함…… 이외에는 신도 유일자도 없다. 아브젝시옹의 현기증은 가장중요하고도 확실한 희열을 보장하는 가장 오래 되고도 가장 한정적인, 물론 증오의 대상을 지니는 권력의 조건 아래서 지탱되고씌어진다. - P207

셀린의 유대인 배격주의는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와 마찬가지로 사실 모든 정치적 참여와도 마찬가지로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환상 속에 주체를 위치시키는 한 그것은 하나의 난간이다. 착각, 그 속에서 우리는 원한다면 사회 현상의 전개와 다양한 합리화를 알게 된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건대, 착각은미쳐 가는 것을 막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이라는 것, 즉 동일화 과정의 횡단을 위협하는 미쳐 버린 심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 P207

지고한 것과 비루한 것, 숭고한 것과 아브젝트를 접합할 줄 아는카니발의 의미론적인 양가성에 셀린은 묵시록의 가차없는 파괴력을 덧붙인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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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11 - 왕망 3 -

王莽은 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孫建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이에 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匈奴가 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세 나라인 周나라·秦나라 ·漢나라가 정벌하였으나 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周나라는 中策을얻었고 漢나라는 下策을 얻었으며 秦나라는 無策이었습니다.
周나라 宣王 때에 匈奴가 국내로 침입하여 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쫓고 돌아왔으니, 匈奴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中策이 됩니다.
漢나라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軍裝과 양식을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戰亂과가 끊이지 않고이어진 지 30여 년에 中國이 피폐해지고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무제라고 일컬으니 이는 下策이 됩니다.
秦나라 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無策이 됩니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기근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功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삼가 이를 걱정합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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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권력>을 읽기 시작한 지 이제 열흘 쯤 지났고 5장까지 어찌저찌 읽었다. 어떤 때는 글자만 읽을 때도 있으나 이해와는 별개로 조금씩 들어오는 문장들이 보일 때 그래도 좀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브젝시옹의 개념을 더 이해하고자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을 병행하며 읽었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저자의 약력을 보면 종교철학과 출신으로 종교 철학, 프로이트와 관련된 정신분석학 관련하여 연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핵심을 담은 1장과 4, 5장(성서에 대한 내용)에서 적게나마 도움을 받았다. 한국 소설이나 시의 사례를 넣기도 하고 예시(예를 들면...) 등이 중간에 삽입되어서 이해가 상대적으로 더 편했다.



<공포의 권력>은 시작부터 어려운 개념이 계속 나열되어서 처음 읽었을 때 놀란 나머지 책을 내려놓았었다. <아브젝시옹...>의 1장 시작은 이렇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한강의 단편 소설 『작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낮에 꾸는 백일몽 같은 것이려니 하고 읽어내려가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였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경계선에 대한 진실을 특유의 감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은 폭력처럼 그어져 있는 경계선을 위태롭게 살아나다가 미리 준비된 듯 사라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단순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작가는 사라짐을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키고 마침내 자신도 그렇게 불꽃처럼 연소되기를 소망하는 듯하다. 


한강의 이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설명을 통해서 '경계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은 종교든 철학이든 그곳에서 관심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면 어디로/어떻게/왜 사라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변해버린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과 같이 우리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근본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 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 P22 <공포의 권력>


<공포의 권력>을 통해서도 아브젝시옹이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만 나는 경계선에 있다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더러움, 오염 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경계이기 때문에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그래서 나쁜 쪽으로도 좋은 쪽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형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이후에 어머니와 모성에 대한 개념이 많이 나오겠구나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아브젝시옹'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위해 프로이트, 라캉,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등장한다. 참고로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를 잇는 정신분석학자라고 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부정'(거부) 관점을 가져와 '아브젝시옹'을 발전시켰다. 라캉은 유아가 거울에 맺힌 자신의 상을 보고 어머니와 분리되었음을 인지한다고 말한 반면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초기 이미 유아와 어머니는 분리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정'은 표상이 판단으로 만들어질 때 개입하는 심적 현상이다. 주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속성판단은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존재판단과 비대칭을 이룬다. 이것은 본능 충동과 판단 작용이 충돌한 결과이다.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ab-jet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impulse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depressive position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사실 1장의 내용만 이해해도 이 책의 핵심을 건졌다는 생각인데 기력이 떨어져 이 정도로 갈음하려고 한다. 아무튼 <공포의 권력> 본문을 2번 읽고 <아브젝시옹...>도 재차 읽었다.



4장은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을 다룬다.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 의식 고유의 것)이다. - P143 <공포의 권력>


이 중 '터부'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브젝시옹...>에서 관련 개념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개념을 '부정한'으로만 인식했는데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숭고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정함' 등으로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5장은 성서 속 '죄', 원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중 나는 도입 부분에 기형도의 시(『잎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20)에 주목했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 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 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함께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어쩐지 낯선 목사님이다. 권위로운 목사님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런 분이 있나 싶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목사님이 마을을 떠나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둘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지막 구절에 그의 쓸쓸함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예수의 얼굴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유대민족의 자기 중심성은 메시아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는 메시아만을 원햇다. 이것이 그들을 극렬한 분노와 폭력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한마디로 말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가장 신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신을 죽이는 모순이 당시 유대민족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어릴 때 구약성경을 좀 본 뒤로 읽은지 한참 되었는데 내용이 꽤나 익숙해서 놀랐다. 그만큼 많이 일상이나 책 등을 통해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이 많은 것이리라.



<아브젝시옹...> 뒷 부분은 폴 리쾨르라는 학자에 대한 내용이라 앞 부분만 참고했다. 

이 책은 <공포의 권력>을 조금 보충한 정도의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공포의 권력> 핵심을 요약하고 저자의 언어로 풀어 쓴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가 이 책에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읽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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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브젝시옹의 1장에 한강 소설이라니. 책을 다시 보니 작가가 한국인이었군요! 저는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제목만으로 외국작가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이 책 샀는데 작가가 누군지도 안보고 그냥 막 샀네요. 하핫.

5장까지면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1장에서 문학 얘기 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지 미치겠더라고요. 힘냅시다!!

거리의화가 2024-01-19 17:41   좋아요 1 | URL
1장에 문학 부분은 진짜 어렵던데요. 저는 프루스트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죽겠더라고요ㅋㅋ 다락방 님 남은 분량도 화이팅입니다!
 

5장

<마가복음> 제7장 6절), 예수는 이같이 주장하였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제15장 11절)그리고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니라."(〈마가복음> 제7장 15-16절) - P176

두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신을 지나치게 경외한 나머지 자신을 낳은 부모, 즉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경외는 사실 충분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질책 이후에 등장한다. 부정의 내면화로 통하는 길은, 율법에 따르기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체면에 관한 사회적 • 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호소하는 것에 있다. 만약 네가 너희 부모를 인정한다면, 외부로부터 너를 위협하던 것이 이제 내부의 위험에 속하게 될것이다. - P177

정신분석 과정의 환자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서》의 독자 또한 그부모와, 특히 그 어머니와 구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오래 된 대상에 관계하는 충동성을 내부로 투사한다. 이같은 내부로의 투사가없으면 전(前)대상들이나 아브젝트가 부정·더러움, 가증한 것같이 외부로부터 위협하고 나중에는 박해자적인 기재를 작동시킨다.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내부 투사는 악이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주체 속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됨으로써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은 오염되고 더럽혀진 실체로서가 아니라, 분리되고 모순된 존재로부터 뿌리뽑을 수 없는 혐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P178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 P179

부정한 음식을 향한 두려움이 마치 타자를 삼켜 버리려는 살해의 충동처럼 드러날 때, 그것을 대신하여 음식물이라는 구강적인만족을 통해 살해의 충동을 극복하고 타자를 삼켜 버리는 기호가나타난다. ‘원초적인‘ 환상이 그것 하나일 때 타자를 삼키는 기호라는 이 주제는 곧장 아브젝트의 정신화와 내재화를 동반한다. 그것에는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다. - P181

상징적으로 배불리 먹는 것(그 딸 속의 악마를 쫓아내 달라고 말하는 어머니로부터 나온)이란 결국 이교도와 친한 어떤 실체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식을 통해 말이 유형화되고, 구체화된 몸짓 그 자체로부터 모든 육체성은 고양되고 정신화되어 숭고해진다. - P183

빚이나 불법과 같은 죄에서 연상되는 ‘부족‘의 개념은 풍부와과잉의 개념, 즉 그칠 줄 모르는 욕망과 한 쌍이 된다. 그것은 ‘탐욕(convoitise)‘이나 ‘게걸스러움 (cupidité)‘ 이라는 용어로 경멸적으 - P187

로 사용된다. ‘pleonexia,‘ 즉 게걸스러움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항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다. - P188

그리스의 아폴론적인(디오니소스가 아니라) 육체관이 표방하는ing평화스러운 형태와는 반대로, 육신은 여기서 두 종류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히브리어의 육신 (basar)과 가까운 것으로 법칙의엄격함에 대항하는 탐욕스러운 충동의 ‘육체‘ 이다. 다른 하나는 가라앉은 ‘육체’로서 영적이므로 공기 같은 육체인데, (성스러운) 말씀 속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이 되기 위해 완전히 역전된 육체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육체’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후자의( ‘승화된‘)육체는 전자(법칙에 도전하는 까닭에 도착적인) 없이는존재할 수 없다. - P189

악의 원천인 죄와 혼동되는 아브젝시옹은 정신 속에서 육신과교리 사이의 화해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것은 질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건강의 원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 속에서 죽음과 부패를 마시는 중독된 단면이지만, 동시에 화해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실상 스스로 나쁜 것을 밝혀내고 그 속에서 악을 추방한다." - P193

사실 죄란 주관화된 아브젝시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자유 의지로 그로부터 분리될 운명을 가진, 언제나그리고 이미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ad unum) 존재인 인간은 율법에 대해 자발적 불복종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죄를 정신화시키고 주관화시키면서 논리의 과잉으로 몰고 가, 죄의 논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진미를 앗아가 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의 전락 이야기(아담의 최초 전향에 대해 우리가 명명한 것)부터, 즉 힘은 죄와 공존한 인식의 자유와 논리의 필연성을 제기하고 발전시킨 성 토마스아퀴나스를 재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의지와 판단에 의한 행위로서의 죄 여기에 결정적으로 논리와 언어 속에 아브젝시옹이 흡수된 결과가 있는 것이다. - P194

가학적 시련인가, 환희인가? 어쨌든 과오가 행복해질 기회를 잡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죄 (felix culpa)는 언술화 현상의 다른 말인 것이다. 교회사의 모든 암흑은 단죄, 잔인한검열, 징벌이 언술화 현상의 실행에 대한 일반적인 현실이었음을증언한다. 왜냐하면 비교의 가장자리나 드문 경우에는 종교 재판의 운명에 대한 균형추로서 이같은 언술화 현상이 교회당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유일신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해 고백하는 행위는 유럽에 대한 사소한 위반은 될지언정 밀고는 아니다. 모든 교회의 천장마다 빛나는 예술 작품이 귀착하는 곳은 바로 행복한 죄로서의,즉 고백된 죄라는 가장자리의 가능성 내에서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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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성으로 가는 길에서 죄의 양의성 그 한쪽에는 육체와 연결된 탐욕의 이질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내면의 탐욕이 밖으로 투사되어 판단하는 의식이 될 때 종교가 지닌 성스러움의 특징은 도덕과 응보의 논리로 전환된다.

아브젝시옹의 신비적 특성은 무한한 희열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희열은 신비가 말해짐으로써 가능하다. 꿈과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주체는 절대 타자인 신과 타자들과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담론 속에서 이 희열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긋지긋한 종교 재판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예술은 죄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내면으로부터 삶의 기회를 부여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환희의 표적으로서 예술의 넘쳐남이 그림·음악·말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유대 사회가 금한 부정한 것과 연관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음식물에 대한 터부를 범한다든가, 이교도와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문둥병 환자에게 말을 붙이거나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공격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적은 한편으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의미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아브젝시옹이 더 이상 외부가 아님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아브젝시옹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 속에서 재배치된다.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거부된 아브젝시옹을 내부로 내면화한다.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율법주의와 외식하는 행동을 질책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율법을 따른다면, 위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부정한 것은 이제 마음속에 있는 까닭이다.

유대 사회에서 이교도적인 다산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 관계를 여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도정시키는 체계의 시작이 어머니와 음식물에 대한 개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암시적인 근거는 마가복음의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친 사건이다. 음식물을 매개로, 딸과 그 어머니를 화해시킨 후에 그리스도가 행한 행적은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마가복음 7:33~35)

마음속의 더러움 곧, 내면화된 아브젝시옹은 정신분석 과정 중에 있는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데가 있다. 그 핵심은 분열과 투사이다.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 생의 초기부터 유아는 대상들을 지각하고 그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좋은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그렇게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나쁜 것’은 자신의 세계에서 제거하고 자신 바깥에 위치시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방출 행위는 내면화된 대상들을 내쫓는 동시에 그것들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 따라서 외부 곧, 바깥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아브젝트로서 추방된 주체가 아브젝시옹을 내재화시켜 말하는 주체로 서게 되는 메커니즘을 성서에서 찾아 풀어 말하면, 부정한 음식에 대한 두려움의 기원에는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최초 대상(나쁜 젖가슴)에 의한 공포가 있다. 그 최초 대상의 결핍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은 그 대상을 삼키고 없애버리려는 구강기 충동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좋은 젖가슴에 의한 만족은 자아의 파괴적 본능을 잠재울 수 있다. 원초적 환상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젖가슴이라는 구강적인 만족이 죽음 충동을 극복하게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음식물 대신 기호가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브젝트의 정신화, 내재화와 연결된다. 종국에는 자아 속의 욕구 불만과 타자를 향한 살해 본능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먹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위(성찬식) 기호 속에 녹아든다. 찢기고 삼켜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나의 육신도 소멸하면서 아브젝시옹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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