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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권력>을 읽기 시작한 지 이제 열흘 쯤 지났고 5장까지 어찌저찌 읽었다. 어떤 때는 글자만 읽을 때도 있으나 이해와는 별개로 조금씩 들어오는 문장들이 보일 때 그래도 좀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브젝시옹의 개념을 더 이해하고자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을 병행하며 읽었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의 저자의 약력을 보면 종교철학과 출신으로 종교 철학, 프로이트와 관련된 정신분석학 관련하여 연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핵심을 담은 1장과 4, 5장(성서에 대한 내용)에서 적게나마 도움을 받았다. 한국 소설이나 시의 사례를 넣기도 하고 예시(예를 들면...) 등이 중간에 삽입되어서 이해가 상대적으로 더 편했다.
<공포의 권력>은 시작부터 어려운 개념이 계속 나열되어서 처음 읽었을 때 놀란 나머지 책을 내려놓았었다. <아브젝시옹...>의 1장 시작은 이렇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한강의 단편 소설 『작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낮에 꾸는 백일몽 같은 것이려니 하고 읽어내려가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였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경계선에 대한 진실을 특유의 감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은 폭력처럼 그어져 있는 경계선을 위태롭게 살아나다가 미리 준비된 듯 사라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단순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작가는 사라짐을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키고 마침내 자신도 그렇게 불꽃처럼 연소되기를 소망하는 듯하다.
한강의 이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설명을 통해서 '경계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것은 종교든 철학이든 그곳에서 관심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면 어디로/어떻게/왜 사라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변해버린 카프카 <변신>의 주인공과 같이 우리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근본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 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곳에 존재한다.
- P22 <공포의 권력>
<공포의 권력>을 통해서도 아브젝시옹이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만 나는 경계선에 있다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더러움, 오염 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경계이기 때문에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그래서 나쁜 쪽으로도 좋은 쪽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형이다.
이 문장을 통해서 이후에 어머니와 모성에 대한 개념이 많이 나오겠구나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아브젝시옹'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위해 프로이트, 라캉,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등장한다. 참고로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를 잇는 정신분석학자라고 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부정'(거부) 관점을 가져와 '아브젝시옹'을 발전시켰다. 라캉은 유아가 거울에 맺힌 자신의 상을 보고 어머니와 분리되었음을 인지한다고 말한 반면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초기 이미 유아와 어머니는 분리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정'은 표상이 판단으로 만들어질 때 개입하는 심적 현상이다. 주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속성판단은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존재판단과 비대칭을 이룬다. 이것은 본능 충동과 판단 작용이 충돌한 결과이다.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ab-jet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impulse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depressive position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사실 1장의 내용만 이해해도 이 책의 핵심을 건졌다는 생각인데 기력이 떨어져 이 정도로 갈음하려고 한다. 아무튼 <공포의 권력> 본문을 2번 읽고 <아브젝시옹...>도 재차 읽었다.
4장은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을 다룬다.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 의식 고유의 것)이다. - P143 <공포의 권력>
이 중 '터부'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브젝시옹...>에서 관련 개념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개념을 '부정한'으로만 인식했는데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숭고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정함' 등으로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5장은 성서 속 '죄', 원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중 나는 도입 부분에 기형도의 시(『잎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20)에 주목했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 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 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함께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어쩐지 낯선 목사님이다. 권위로운 목사님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런 분이 있나 싶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목사님이 마을을 떠나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둘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지막 구절에 그의 쓸쓸함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예수의 얼굴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유대민족의 자기 중심성은 메시아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는 메시아만을 원햇다. 이것이 그들을 극렬한 분노와 폭력으로 만들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한마디로 말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가장 신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신을 죽이는 모순이 당시 유대민족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어릴 때 구약성경을 좀 본 뒤로 읽은지 한참 되었는데 내용이 꽤나 익숙해서 놀랐다. 그만큼 많이 일상이나 책 등을 통해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이 많은 것이리라.
<아브젝시옹...> 뒷 부분은 폴 리쾨르라는 학자에 대한 내용이라 앞 부분만 참고했다.
이 책은 <공포의 권력>을 조금 보충한 정도의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공포의 권력> 핵심을 요약하고 저자의 언어로 풀어 쓴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가 이 책에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읽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