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마가복음> 제7장 6절), 예수는 이같이 주장하였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제15장 11절)그리고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니라."(〈마가복음> 제7장 15-16절) - P176

두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신을 지나치게 경외한 나머지 자신을 낳은 부모, 즉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경외는 사실 충분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질책 이후에 등장한다. 부정의 내면화로 통하는 길은, 율법에 따르기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체면에 관한 사회적 • 자연적 권위의 승인을 호소하는 것에 있다. 만약 네가 너희 부모를 인정한다면, 외부로부터 너를 위협하던 것이 이제 내부의 위험에 속하게 될것이다. - P177

정신분석 과정의 환자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서》의 독자 또한 그부모와, 특히 그 어머니와 구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오래 된 대상에 관계하는 충동성을 내부로 투사한다. 이같은 내부로의 투사가없으면 전(前)대상들이나 아브젝트가 부정·더러움, 가증한 것같이 외부로부터 위협하고 나중에는 박해자적인 기재를 작동시킨다.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내부 투사는 악이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주체 속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됨으로써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은 오염되고 더럽혀진 실체로서가 아니라, 분리되고 모순된 존재로부터 뿌리뽑을 수 없는 혐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P178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 P179

부정한 음식을 향한 두려움이 마치 타자를 삼켜 버리려는 살해의 충동처럼 드러날 때, 그것을 대신하여 음식물이라는 구강적인만족을 통해 살해의 충동을 극복하고 타자를 삼켜 버리는 기호가나타난다. ‘원초적인‘ 환상이 그것 하나일 때 타자를 삼키는 기호라는 이 주제는 곧장 아브젝트의 정신화와 내재화를 동반한다. 그것에는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다. - P181

상징적으로 배불리 먹는 것(그 딸 속의 악마를 쫓아내 달라고 말하는 어머니로부터 나온)이란 결국 이교도와 친한 어떤 실체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식을 통해 말이 유형화되고, 구체화된 몸짓 그 자체로부터 모든 육체성은 고양되고 정신화되어 숭고해진다. - P183

빚이나 불법과 같은 죄에서 연상되는 ‘부족‘의 개념은 풍부와과잉의 개념, 즉 그칠 줄 모르는 욕망과 한 쌍이 된다. 그것은 ‘탐욕(convoitise)‘이나 ‘게걸스러움 (cupidité)‘ 이라는 용어로 경멸적으 - P187

로 사용된다. ‘pleonexia,‘ 즉 게걸스러움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항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다. - P188

그리스의 아폴론적인(디오니소스가 아니라) 육체관이 표방하는ing평화스러운 형태와는 반대로, 육신은 여기서 두 종류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히브리어의 육신 (basar)과 가까운 것으로 법칙의엄격함에 대항하는 탐욕스러운 충동의 ‘육체‘ 이다. 다른 하나는 가라앉은 ‘육체’로서 영적이므로 공기 같은 육체인데, (성스러운) 말씀 속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이 되기 위해 완전히 역전된 육체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육체’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후자의( ‘승화된‘)육체는 전자(법칙에 도전하는 까닭에 도착적인) 없이는존재할 수 없다. - P189

악의 원천인 죄와 혼동되는 아브젝시옹은 정신 속에서 육신과교리 사이의 화해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것은 질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건강의 원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 속에서 죽음과 부패를 마시는 중독된 단면이지만, 동시에 화해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실상 스스로 나쁜 것을 밝혀내고 그 속에서 악을 추방한다." - P193

사실 죄란 주관화된 아브젝시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자유 의지로 그로부터 분리될 운명을 가진, 언제나그리고 이미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ad unum) 존재인 인간은 율법에 대해 자발적 불복종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죄를 정신화시키고 주관화시키면서 논리의 과잉으로 몰고 가, 죄의 논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진미를 앗아가 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의 전락 이야기(아담의 최초 전향에 대해 우리가 명명한 것)부터, 즉 힘은 죄와 공존한 인식의 자유와 논리의 필연성을 제기하고 발전시킨 성 토마스아퀴나스를 재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의지와 판단에 의한 행위로서의 죄 여기에 결정적으로 논리와 언어 속에 아브젝시옹이 흡수된 결과가 있는 것이다. - P194

가학적 시련인가, 환희인가? 어쨌든 과오가 행복해질 기회를 잡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죄 (felix culpa)는 언술화 현상의 다른 말인 것이다. 교회사의 모든 암흑은 단죄, 잔인한검열, 징벌이 언술화 현상의 실행에 대한 일반적인 현실이었음을증언한다. 왜냐하면 비교의 가장자리나 드문 경우에는 종교 재판의 운명에 대한 균형추로서 이같은 언술화 현상이 교회당에 울려퍼졌던 것이다. 유일신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해 고백하는 행위는 유럽에 대한 사소한 위반은 될지언정 밀고는 아니다. 모든 교회의 천장마다 빛나는 예술 작품이 귀착하는 곳은 바로 행복한 죄로서의,즉 고백된 죄라는 가장자리의 가능성 내에서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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