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내수면개발과 한국자연보존협회의 자연보존운동

1977년 10월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자연보호운동이 추진되었을 때, 박정희는 운동 추진의 이유를 "자연보호를 위해선 하천의 어족보호, 환경보존 등 그 범위가 매우 넓으므로, 이 운동은 범국민적으로 벌여야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하천의 어족 보호가 가장 먼저 언급된 표현이었다는 점에서도 자연보존 운동과 자연보호 운동의 연관성을 찾을수 있다.05 1974년부터 식물학자 이덕봉을 중심으로 자연보존협회의 회원들은1978년 공개된 자연보호헌장의 제정 과정에도 참여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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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陽의 鄧禹가 지팡이를 짚고 劉秀를 따라 縣에 이르자, 劉秀가 말하기를
"내가 마음대로 侯에 封하고 장수로 임명할 수 있으니, 그대가 멀리서 찾아온 것은 벼슬을 원해서가 아니겠는가?" 하니, 가 대답하기를 "벼슬하기를원치 않고 다만의威嚴과 德이四海에 가해지면 제가 얼마 안 되는 작은을 바쳐서功을 竹帛(역사책)에 남기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劉秀가 웃고는 인하여 유숙하였는데, 가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지금 지방이 편안하지 못해서 赤眉와 靑의 무리들이 모두 만으로헤아려지고,更始는 이미 보통의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여 스스로 다스리고결단하지 못하며,諸將들은 모두 용렬한 사람들이 흥기하였으므로 그 뜻이재물과 폐백에 있어서 다투어 위엄과 무력을 사용하여 당장 스스로 만족하게할 뿐이요, 충성스럽고 어질고 밝고 지혜로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도모해서 - P204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은 본래 성대한 德과 큰 功이 있어서 천하 사람들이 향하고 복종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軍政이 整齊되고 엄숙하며 이 분명하고 信實하니 ≪後漢書≫〈鄧禹傳〉에는 ‘明公素有이하의 네 미가 없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영웅을 맞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힘써서 漢高祖가 當年에 이룩한 功業을 세우고 만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公을 가지고 생각해 보건대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이 못 됩니다. (천하를 평정하기가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劉秀가 크게 기뻐하고, 인하여 鄧禹를 항상 군막 안에 머물게 하여 그와함께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고, 매번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부릴 때에 鄧禹에게 많이 물었는데, 모두 그 재주에 합당하게 하였다. - ≪後漢書鄧禹傳≫에 나옴.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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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25] The End of the World

중세 흑사병은 오늘날 선페스트라고 불리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역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감염된다. 당시 중국에서 실크 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흑해로 돌아갔고 Caffa(카파)로 전파, 배를 타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쥐가 병을 옮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신의 심판, 지진, 악마, 나쁜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고 생각했다고. 흑사병이 수년간 지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여 인구가 급감한다. 귀족들의 농토를 경작할 농노들은 상당수가 죽고 그마저도 남은 이들은 같은 돈으로는 일을 못하겠다며 들고 일어선다. 이중 많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성직자도, 수공업자도 도시로 떠난다. 귀족들은 소유한 농토를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땅은 줄어들고 대신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위세가 커지게 된다. 흑사병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하면서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CH26] France and England at War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흑사병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흑사병이 지나가고 나서 전쟁을 재개했다(백년전쟁). 영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로 시집간 선조 이사벨라가 받은 땅을 자신이 상속받고 프랑스왕 찰스 6세의 딸인 캐서린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으나 찰스6세가 거부하자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이 프랑스에 닿을 무렵 군대 내 병이 돌고 겨울이어서 공격을 포기하려고 도망가려했으나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백년 전쟁의 전환점)하면서 원하던 것을 모두 얻는다(영국왕=프랑스왕). 헨리 5세가 사망했을 때 헨리 6세는 갓난아이 1살이었다. 이 때 프랑스 황태자가 왕권을 되찾으려 했다. 프랑스인들 중에는 황태자가 왕이 되길 원하는 부류가 있던 반면 헨리6세가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 맞다(Burgundian)는 부류 사이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때 신의 부름을 받아서 명성을 쌓던 John of Arc가 등장하여 황태자 편에 서서 Burgundian과 영국인들을 오를레앙에서 쫓아내고 승리를 얻어낸다. 황태자는 찰스 7세로 프랑스 왕이 되었으나 남은 Burgundian과 영국인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는 것 대신 협상을 하고 Joan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는 요술을 부리는 여자로 몰려 유죄를 받고 1431년 화형을 당했고 25년이 지나서야 사건을 재조사받은 끝에 무죄임이 증명되었다. 


[CH27] War for the English Throne

영국도 장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있었다. 요크셔 가문(흰 장미)과 랭커셔 가문(붉은 장미) 사이의 전쟁이었다. 헨리 6세에게 정신 이상이 생기자 요크셔 가문은 헨리의 사촌 뻘인 자신들의 가문에서 대체자로 요크 공작을 왕으로 민다. 그러나 헨리 6세의 증세가 호전되고 요크 공작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헨리 6세 측은 그들을 처리하고 왕권을 수호한다. 요크 공작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힘을 키워 헨리 6세를 공격해 그를 감옥으로 보내고 자신은 에드워드 4세로 왕위에 오른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가문에서 좋아하지 않는 엘리자베스와 몰래 결혼하고 엘리자베스가 지나친 권력을 가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이 헨리 6세를 다시 왕으로 추대했으나 누군가 그를 살해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4세는 치세를 잇게 되었다.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5세가 되었으나 너무 어려서 사촌인 리차드가 그의 치세를 돕기로 한다. 그런데 에드워드 5세가 어딘가로 사라져서 리차드에 대해서 안좋은 말이 떠돌았다. 2년 정도 왕위를 이었다 사촌인 헨리 튜더가 리차드의 왕권에 도전하여 보스워스 전투에서 그를 몰아내고(리차드는 전투에서 사망) 영국의 새 왕이 되면서 장미 전쟁은 끝났다.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인 두 형제는 삼촌이자 호국경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 의해 런던탑에 갇혔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실종 당시 에드워드 5세는 12 세, 요크공 리처드는 9세에 불과하였다. 에드워드 5세는 대관식을 앞두고 있었으나 실종되어 왕위는 리처드 3세에게 넘어갔다. 런던탑에서 두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앞뒤의 정황을 보면 살해당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리처드 3세가 왕위를 탐해 조카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는 둘이 암살을 피해 탈출하여 신분을 숨긴채 살았다는 설도 있다. 


[CH28] The Kingdoms of Spain and Portugal

스페인에는 아라곤과 카스티야라는 두 개의 강력한 왕국이 성장해가고 있었고 서쪽에는 포르투갈이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인 엔리케는 스페인을 통합하기를 원했고 귀족 중 Pedro Giron을 이사벨라와 결혼시키는 대신 군을 강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이사벨라(13세)는 그가 나이도 너무 많고(40세 넘음) 술도 마시고 싸움꾼에 난봉꾼이라는 소문에 엔리케에게 결혼 안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Pedro Giron은 여행을 갔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는 바람에 이사벨라는 결혼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엔리케는 4년 후에 포르투갈 왕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는 뚱뚱하고 아버지로 보일 만큼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이번에도 이사벨라는 결혼을 거부했지만 엔리케는 추진했다. 결국 이사벨라는 소문으로 듣던 카스티야의 왕자인 페르디난드에게 접근하여 만난지 4일 만에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왕비가 된다. 1491년 스페인의 유일한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를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기독교 아래 통합한다. 다만 이 때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겪었다.

포르투갈에 헨리 왕자는 배를 타고 짧게 나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더 멀리 가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4번째 아들이었기에 왕위를 상속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추진하기에 장애는 없었다. 중세는 음식 저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향신료인 후추, 정향 등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황금과 상아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어 아프리카 부족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 배를 건조하고 astrolabe(태양이나 북극성이 지평선과의 거리를 이용해서 배의 위치를 계산하는 기구)를 개발하여 북아프리카로 향한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남아프리카에도 가기를 시도하여 결국 성공한다. 그는 인도를 찾아나서고자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한다. 


[CH29] African Kingdoms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불렀다.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불안과 공포로 느끼고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중세 서아프리카에는 가나, 말리, 송가이라는 3개의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 가나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접해 있으며 철 제련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가나를 금이 나는 땅이라고 불렀다. 가나는 사금을 채취하여 북아프리카의 아랍 상인들이 왔을 때 금을 주는 대신 소금으로 교환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에는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라 소금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소금 광산은 무척 가혹한 환경이었다. 당시 가나는 금으로 온갖 것을 도배할 정도로 부유한 국가였다. 하지만 아랍 상인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필요했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이슬람 제국인 말리로부터 공격을 받아 쇠퇴하게 된다. 말리도 가나와 마찬가지로 황금과 소금이 지나는 길목에 있었다. Mansa Musa가 말리왕이 되자 군을 키워서 이웃 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갖는다. 또 그는 충실한 이슬람교인으로 순례 여행을 결심했는데 혼자가 아니라 아내, 아이들을 비롯한 식구들, 요리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까지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메카로 나서게 된다. 그가 가다가 멈춘 길에는 모스크가 지어지기도 했다고(-_-). 하지만 그의 이동 때문에 금이 한꺼번에 많이 유출되는 바람에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그가 죽고 나서 국력이 약해진 말리 대신에 송가이 제국이 떠오른다. 그곳은 땅이 넓은 것이 장점이었다. Timbuktu(팀북투)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200개가 넘는 학교가 있었고 의사, 성직자, 법률가, 학자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1526년 Leo Africanus가 서아프리카에 관한 책(History and Description of Africa and the Notable Things Contained Therein)을 쓰고 난 뒤 유럽인에게 이곳이 역설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가이 제국은 모로코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CH30] India Under the Moghuls

인도를 하나로 통합한 찬드라굽타 이후 굽타 왕조 아래에서 평화로운 치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훈족이 침입하여 여러 왕국으로 쪼개져버렸다. 계속되는 전투와 홍수로 인한 전염병으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의 소왕국을 다스리던 Babur(바부르)는 칭기스칸의 후손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다. Babur는 델리를 정복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선 뒤 기존의 힌두교 공간들을 파괴한다. 그렇지만 통합을 위해서 힌두교는 용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도의 메마른 땅을 고향과 같이 만들기위해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각종 화초를 심고 벤치를 설치하며 정원을 세운다. 이곳은 the Garden of Scattered Flowers로 Ram Bagh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Agra에 남아 있다. 

Babur 아들 때 국력이 약해졌다가 손자인 Akbar에 이르러 왕국은 강력해진다. 그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를 용인했고 힌두교 공주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 무렵 사람들에게서 유행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불운한 사나이 Gulshan에 관한 소문이었다. Akbar는 Gulshan을 황궁 하인으로 고용해 그를 직접 시험해보고자 한다. 아침으로 가져온 빵에 머리카락이 들어 있고 다리가 갑자기 가렵기도 했으며 농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집사가 오더니 겨울에 보관해놓은 고기에 구더기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가 가장 아끼던 말의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는 불운한 사나이가 맞다며 처형당할 뻔 했으나 풀려난다. 다만 다시 하인으로 쓰진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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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2-08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진도 많이 나가셨군요!
완독까지 응원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4-02-08 14:21   좋아요 1 | URL
미미님^^ 아무래도 읽다 말다 하면 동력이 떨어져서 가능한 긴 텀을 두지는 않고 읽고 있습니다. 근데 연휴 때 읽을 수 있을 것인지는ㅋㅋ 중세는 역시 더 과거인 고대보다 이름들이 더 익숙하네요. 흑사병이라던지 장미전쟁이라던지 무굴 제국이라던지. 감사합니다^^
 
칸의 후예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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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집사 시리즈 3권을 읽었다. 한반도와 관련한 몽골의 역사는 사실상 집사 2, 3권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읽는데 목적이 있어서 이번 3권으로 시리즈 읽기는 일단락짓고 이후 중국사 읽기로 넘어가려고 생각했다. 집사 남은 시리즈는 나중에 필요할 때 읽어봐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3권의 핵심 주제는 칭기스칸 이후의 역사다. 구체적으로는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 티무르의 다섯 명의 대칸과 주치, 차가타이, 톨루이로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 3명의 제왕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칭기스칸은 능력으로는 톨루이가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그를 차기 칸으로 생각했으나 형제 간 분란이 일지 않도록 우구데이에게 보좌와 제위에 관한 사무를 맡기고 톨루이에게는 가옥과 목지, 재산, 군대 등 실권을 맡겼다.

중심 인물을 기반으로 아들딸, 손자들 이하 계보와 정비(카툰)와 후비에 관한 이야기, 연대기별 전투를 비롯한 사건의 역사,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재미있었다. 비사에서는 이런 일화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지만 정사에서 보여지는 일화란 또 다른 맛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집사를 쓴 라시드 앗 딘의 제왕(주군)이었던 가잔 칸이 톨루이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톨루이 칸은 더 미화시키고 다른 형제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낮춰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구데이 칸의 경우 ‘애주가‘와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칭기스칸도 술을 좋아하는 우구데이를 많이 혼냈다고). 또한 우구데이 칸의 정비들 중 가장 많은 아들을 낳은 투레게네에 대한 묘사도 부정적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구데이 칸의 역사가 3권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그의 일화들이 수십개가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정이 무던하고 포용력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반우구데이 정서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관련 일화가 많이 실린 것을 보면 정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화들을 내치지 않고 싣지 않을 수 없었음을 느끼게 한다.

우구데이 칸은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로 13년간 집권하면서 키타이 왕국에 출정하여 1234년 금나라(집권자: 알탄 칸)를 멸망시켰다.

아주 늙고 병든 어떤 사람이 카안의 어전에 찾아와서, 자기에게 금 200발리시를 오르탁의 형식으로(bi-sabili ortâqi) 달라고 청원했다. [카안이] 주라고 명령하자 신하들은 ˝이 사람의 일생은 하루의 저녁에 다다른 셈입니다. 그는 거처도 자식도 친척도 없고, 아무도 그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카안은 ˝그는 일생 동안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았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 했는데, 그를 나의 궁전에서 낙담케 한 뒤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고귀한 뜻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지고한 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이 같은 제왕의 지위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가 청원한 것을 신속하게 그에게 주도록 하라.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희망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 P121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구데이는 포용력의 아이콘이었다고! 위의 일화에서도 보듯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었다는 기록이 많았다. 다만 기록으로 볼 수 있을 뿐이고 보여주기 식일 수도 있으며 과장이나 허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록이 남았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주치 칸은 칭기스칸의 첫째 아들로 칭기스칸이 죽기 전 사망했다. 정비인 백투트미시 푸진과 사이가 좋았던지 대략 40명의 자손이 있었다고 한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가 둘 사이에서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가 있을 때 형제들과 함께 호라즘을 정복하였으며 칭기스칸이 북방 지역 정복을 명령했으나 이를 결국 이행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하지만 둘째 아들인 바투가 울루스에서 칸으로 즉위하면서 북방 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왕국을 정복하였다(바투는 손자인 시레문을 후계자로 정했다).

차가타이 칸은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로 우구데이 대칸 시기 본인이 형인데도 동생을 깍듯이 대했다.

어제 나는 그와 속보로 말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내가 카안과 시합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법도인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야사에 처해질 수 있도록 온 것이다. 나를 처형할지 아니면 곤장을 칠지 명령을내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에게 더 많은 애정을 느끼며 공손하게 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보내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는 나의 형이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어찌해서 신경을 쓰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고, 마침내 카안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그는 말 아홉 필을 바치고 고두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또한 카안이 차가타이의 목숨을 용서해 주고차가타이는 면죄의 대가로 고두한다는 사실을 듣고 또 알도록 하기 위해 비틱치들은 이러한 내용을 선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 오르두에 들어와 유창한 언변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더욱 합심 · 단합하게 되었고, 다른 친족들은 [카안의] 명령서(khatti farman)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의 길을 다졌다. - P237

톨루이 칸은 칭기스칸의 넷째 아들로 이후 몽골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손들을 내놓는다. 뭉케, 쿠빌라이, 아릭 부케 등. 고려의 역사와도 깊숙이 연관 있는 이름들이라 아마 친숙할 것이다. 톨루이 칸 때는 키타이 일부를 정벌하고 부하라, 사마르칸트 지역, 후라산 정벌이 이어졌다. 그는 어떤 의식을 치른 뒤 우구데이 칸 대신 병을 얻어 1233년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우구데이에게는 각별했음을 방증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사실 톨루이 칸의 업적도 훌륭하나 그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의 현명함과 강단이 돋보였음을 지나칠 수 없다. 이후 몽골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아들들이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구육 칸은 우구데이의 첫째 아들이다. 1245년 후계자 선정을 위한 쿠릴타이가 소집되었으나 바투가 후계자로 지명한 시레문은 나이가 어려서 성년에 이르지 못했기에 구육 칸이 대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 종교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그가 다스리던 때 기독교가 가장 융성했다고 한다.

뭉케 칸은 톨루이 칸의 큰 아들로 바투가 그를 적극 추대하면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우구데이 칸 일족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음모와 반역을 기도하여 관련자들을 잡아서 소탕했다. 그래도 혐의가 있는 자들만 처벌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용서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귀족이나 행정관들이 뇌물을 받지 못하게 하고 아랫 사람들을 관용적으로 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안정적인 치세를 이끌었다.

쿠빌라이 칸은 톨루이 칸의 넷째 아들로 아릭 부케가 알타이에서 기습적으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1260년 다른 이들의 추대 하에 정식으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즉위하고 나서도 아릭 부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쿨루카나 일‘ 즉 쥐해 - 662[/1264)년에 해당 - 에 그가 카안의 어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수의 군대를 배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그로 하여금 고두(tikishmishi)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그같은 경우 고두를 할 때에는 [모포로 된] 천막문을 죄인의 어깨에] 씌워 놓는데, [아릭 부케는] 그런 식으로 뒤집어쓰고 고두를 했다. 그리고 한참 뒤 허락이 내려지자 천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비틱치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감정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그를 흔들었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오,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가 옳았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훌레구 칸이 보낸 칭쿠르(Chingqúr)라는 사신이 그곳에 참석해 있었다. 그가 돌아가 그 상황의 모습을 그의 어전에 설명했다. 훌레구 칸은 카안의 어전으로 전갈을 보내어 ˝야사를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 일족을 이런 식으로 고두시키게 허락을 내려서 형 · 아우들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했다. 카안은 그 말에 동의하고 ˝훌레구가 옳다. 내가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 뒤 아릭 부케를 일년 동안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 P390

티무르 칸은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짐김의 아들이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난 뒤 어머니가 일족의 어른인 바얀에게 보냄으로써 즉위에 대한 안정성을 미리 확보했고 쿠릴타이 개최 후 자연스레 그에게 대칸 자리가 추대될 수 있었다.
그는 군대와 왕국 정비를 위해 왕자와 아미르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고 재상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게 했다.

2권은 칭기스칸이 집권하는 과정을 비롯해 그의 일대기를 다루었다면 3권은 몽골이 가장 넓은 치세를 이루었을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집사 시리즈 3권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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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들을 가로지르는 운동, 즉 횡단-신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에 다양한 몸된 자연bodily natures 사이의 상호교환과 상호연결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횡단trans은 서로다른 장소들을 가로지르는 운동임을 부각하기 때문에 횡단-신체성은인간 몸, 비인간 생명체, 생태계, 화학 작용물, 그리고 여타 다른 행위자들의 종종 예측 불가능하고 반갑지 않은 작용들을 인정하는 유동적인공간을 열어 준다. 우리가 인간을 넘어서는more-than-human 세계와 인간 신체성이 맺는 물질적 상호연결을 중시하고, 동시에 물질 작용능력material agency 이더 광범위한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인간‘과 ‘환경‘이 결코 분리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20세기 후반과 - P19

21세기 초반의 복잡다단한 현실들과 씨름할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정립할 수 있다. - P20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종종 문화적 형성물과 물질세계의 교차점에서 작업하는 과학자의 도전에 직면한다. 과학은 사회·정치 이론에 근거하면서도 물질의 구성요소, 작용, 작용능력을다루기 때문에, 도발적이고, 심지어 충격적인 방법론과 재개념화를 내놓는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브뤼노 라투르는과학적·사회학적·텍스트적 지식이 서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적 삶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는 - P34

과학을 찬양하거나, 권력 게임에 임하기도 하고, 실재가 있다는 믿음을비웃기도 하지만, 이 세 가지 영역을 뒤섞으면 큰일이 난다"고 꼬집는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자연/문화 ‘하이브리드‘hybrid들은 개별 학문에 국한된 용어로는 이해될 수 없다. - P35

낸시 투아나는 주목할 만한 에세이 끈적끈적한 다공성 허리케인카트리나를 증언하기에서 유사한 혼합을 포착한다. 그녀는 바람, 비,
홍수, 살, 인종주의, 정치, 심리학, 수문학, 가난, 그리고 폴리염화비닐PVCs이 뒤섞이며 혼합되듯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사회적 실천과 자연 현상" 양자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상호작용주의 존재론interactionist ontology은 ‘끈적끈적한 다공성‘이라는 개념화로 요약된다. "살-내 살과 세계 살―의 끈적끈적한다공성이 존재한다.] 이 다공성은 우리가 세계에 속해 있고, 세계를 발생시키고, 세계 안에 존재하게 하는 경첩이다. 그것이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얇은 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끈적거린다고 부른다.
이 박막membrane들은 피부와 살, 예단과 상징적인 상상물, 습관과 신체화와 같은 다양한 유형을 지닌다." - P49

횡단-신체적 공간의 생생한 예인 독성물질로 중독된 몸은 환경주의운동과 환경보건운동, 사회정의운동이 서로 단절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이 중독된 몸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과 지속적으로 상호교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예측 불가능한 생성과 인간 지식의 한계를 동시에 고려에 넣는 인식론적 공간을상상하라고 자극하기도 한다. 독성물질에 중독된 몸은 우리가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개인이라는 탈신체적 가치와 이상에서 벗어나는 물질적·횡단-신체적 윤리를 지향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수많은 사람·종·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과 맞물려 전개되는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요구한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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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05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작하셨군요, 거리의화가 님! 이 책은 읽기에 어떠신가요? 일단 올리신 인용문들로만 보자면 결코 쉬운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포의 권력보다는 읽기에 나은것 같네요. 휴..

거리의화가 2024-02-05 09:42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짧은 인용문에도 벌써 파악하신 것 같은데요? 어쨌든 공포의 권력보다는 읽기 좋아요. 적어도 이해는 됩니다!
이 책 읽다보니 정희진 선생님 생각나더라구요. ‘횡단‘이란 개념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건수하 2024-02-05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쉽진 않겠구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해가 된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
저는 설 지나서 시작하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