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25] The End of the World

중세 흑사병은 오늘날 선페스트라고 불리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역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감염된다. 당시 중국에서 실크 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흑해로 돌아갔고 Caffa(카파)로 전파, 배를 타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쥐가 병을 옮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신의 심판, 지진, 악마, 나쁜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고 생각했다고. 흑사병이 수년간 지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여 인구가 급감한다. 귀족들의 농토를 경작할 농노들은 상당수가 죽고 그마저도 남은 이들은 같은 돈으로는 일을 못하겠다며 들고 일어선다. 이중 많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성직자도, 수공업자도 도시로 떠난다. 귀족들은 소유한 농토를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땅은 줄어들고 대신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위세가 커지게 된다. 흑사병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하면서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CH26] France and England at War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흑사병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흑사병이 지나가고 나서 전쟁을 재개했다(백년전쟁). 영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로 시집간 선조 이사벨라가 받은 땅을 자신이 상속받고 프랑스왕 찰스 6세의 딸인 캐서린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으나 찰스6세가 거부하자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이 프랑스에 닿을 무렵 군대 내 병이 돌고 겨울이어서 공격을 포기하려고 도망가려했으나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백년 전쟁의 전환점)하면서 원하던 것을 모두 얻는다(영국왕=프랑스왕). 헨리 5세가 사망했을 때 헨리 6세는 갓난아이 1살이었다. 이 때 프랑스 황태자가 왕권을 되찾으려 했다. 프랑스인들 중에는 황태자가 왕이 되길 원하는 부류가 있던 반면 헨리6세가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 맞다(Burgundian)는 부류 사이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때 신의 부름을 받아서 명성을 쌓던 John of Arc가 등장하여 황태자 편에 서서 Burgundian과 영국인들을 오를레앙에서 쫓아내고 승리를 얻어낸다. 황태자는 찰스 7세로 프랑스 왕이 되었으나 남은 Burgundian과 영국인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는 것 대신 협상을 하고 Joan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는 요술을 부리는 여자로 몰려 유죄를 받고 1431년 화형을 당했고 25년이 지나서야 사건을 재조사받은 끝에 무죄임이 증명되었다. 


[CH27] War for the English Throne

영국도 장미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있었다. 요크셔 가문(흰 장미)과 랭커셔 가문(붉은 장미) 사이의 전쟁이었다. 헨리 6세에게 정신 이상이 생기자 요크셔 가문은 헨리의 사촌 뻘인 자신들의 가문에서 대체자로 요크 공작을 왕으로 민다. 그러나 헨리 6세의 증세가 호전되고 요크 공작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헨리 6세 측은 그들을 처리하고 왕권을 수호한다. 요크 공작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힘을 키워 헨리 6세를 공격해 그를 감옥으로 보내고 자신은 에드워드 4세로 왕위에 오른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가문에서 좋아하지 않는 엘리자베스와 몰래 결혼하고 엘리자베스가 지나친 권력을 가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이 헨리 6세를 다시 왕으로 추대했으나 누군가 그를 살해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4세는 치세를 잇게 되었다.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5세가 되었으나 너무 어려서 사촌인 리차드가 그의 치세를 돕기로 한다. 그런데 에드워드 5세가 어딘가로 사라져서 리차드에 대해서 안좋은 말이 떠돌았다. 2년 정도 왕위를 이었다 사촌인 헨리 튜더가 리차드의 왕권에 도전하여 보스워스 전투에서 그를 몰아내고(리차드는 전투에서 사망) 영국의 새 왕이 되면서 장미 전쟁은 끝났다.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인 두 형제는 삼촌이자 호국경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 의해 런던탑에 갇혔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실종 당시 에드워드 5세는 12 세, 요크공 리처드는 9세에 불과하였다. 에드워드 5세는 대관식을 앞두고 있었으나 실종되어 왕위는 리처드 3세에게 넘어갔다. 런던탑에서 두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앞뒤의 정황을 보면 살해당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리처드 3세가 왕위를 탐해 조카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는 둘이 암살을 피해 탈출하여 신분을 숨긴채 살았다는 설도 있다. 


[CH28] The Kingdoms of Spain and Portugal

스페인에는 아라곤과 카스티야라는 두 개의 강력한 왕국이 성장해가고 있었고 서쪽에는 포르투갈이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인 엔리케는 스페인을 통합하기를 원했고 귀족 중 Pedro Giron을 이사벨라와 결혼시키는 대신 군을 강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이사벨라(13세)는 그가 나이도 너무 많고(40세 넘음) 술도 마시고 싸움꾼에 난봉꾼이라는 소문에 엔리케에게 결혼 안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Pedro Giron은 여행을 갔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는 바람에 이사벨라는 결혼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엔리케는 4년 후에 포르투갈 왕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는 뚱뚱하고 아버지로 보일 만큼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이번에도 이사벨라는 결혼을 거부했지만 엔리케는 추진했다. 결국 이사벨라는 소문으로 듣던 카스티야의 왕자인 페르디난드에게 접근하여 만난지 4일 만에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왕비가 된다. 1491년 스페인의 유일한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를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기독교 아래 통합한다. 다만 이 때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겪었다.

포르투갈에 헨리 왕자는 배를 타고 짧게 나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더 멀리 가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4번째 아들이었기에 왕위를 상속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추진하기에 장애는 없었다. 중세는 음식 저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향신료인 후추, 정향 등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황금과 상아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어 아프리카 부족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 배를 건조하고 astrolabe(태양이나 북극성이 지평선과의 거리를 이용해서 배의 위치를 계산하는 기구)를 개발하여 북아프리카로 향한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남아프리카에도 가기를 시도하여 결국 성공한다. 그는 인도를 찾아나서고자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한다. 


[CH29] African Kingdoms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불렀다.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불안과 공포로 느끼고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중세 서아프리카에는 가나, 말리, 송가이라는 3개의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 가나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접해 있으며 철 제련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가나를 금이 나는 땅이라고 불렀다. 가나는 사금을 채취하여 북아프리카의 아랍 상인들이 왔을 때 금을 주는 대신 소금으로 교환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에는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라 소금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소금 광산은 무척 가혹한 환경이었다. 당시 가나는 금으로 온갖 것을 도배할 정도로 부유한 국가였다. 하지만 아랍 상인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필요했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이슬람 제국인 말리로부터 공격을 받아 쇠퇴하게 된다. 말리도 가나와 마찬가지로 황금과 소금이 지나는 길목에 있었다. Mansa Musa가 말리왕이 되자 군을 키워서 이웃 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갖는다. 또 그는 충실한 이슬람교인으로 순례 여행을 결심했는데 혼자가 아니라 아내, 아이들을 비롯한 식구들, 요리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까지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메카로 나서게 된다. 그가 가다가 멈춘 길에는 모스크가 지어지기도 했다고(-_-). 하지만 그의 이동 때문에 금이 한꺼번에 많이 유출되는 바람에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그가 죽고 나서 국력이 약해진 말리 대신에 송가이 제국이 떠오른다. 그곳은 땅이 넓은 것이 장점이었다. Timbuktu(팀북투)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200개가 넘는 학교가 있었고 의사, 성직자, 법률가, 학자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1526년 Leo Africanus가 서아프리카에 관한 책(History and Description of Africa and the Notable Things Contained Therein)을 쓰고 난 뒤 유럽인에게 이곳이 역설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가이 제국은 모로코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CH30] India Under the Moghuls

인도를 하나로 통합한 찬드라굽타 이후 굽타 왕조 아래에서 평화로운 치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훈족이 침입하여 여러 왕국으로 쪼개져버렸다. 계속되는 전투와 홍수로 인한 전염병으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의 소왕국을 다스리던 Babur(바부르)는 칭기스칸의 후손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나섰다. Babur는 델리를 정복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선 뒤 기존의 힌두교 공간들을 파괴한다. 그렇지만 통합을 위해서 힌두교는 용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도의 메마른 땅을 고향과 같이 만들기위해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각종 화초를 심고 벤치를 설치하며 정원을 세운다. 이곳은 the Garden of Scattered Flowers로 Ram Bagh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Agra에 남아 있다. 

Babur 아들 때 국력이 약해졌다가 손자인 Akbar에 이르러 왕국은 강력해진다. 그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를 용인했고 힌두교 공주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 무렵 사람들에게서 유행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불운한 사나이 Gulshan에 관한 소문이었다. Akbar는 Gulshan을 황궁 하인으로 고용해 그를 직접 시험해보고자 한다. 아침으로 가져온 빵에 머리카락이 들어 있고 다리가 갑자기 가렵기도 했으며 농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집사가 오더니 겨울에 보관해놓은 고기에 구더기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가 가장 아끼던 말의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는 불운한 사나이가 맞다며 처형당할 뻔 했으나 풀려난다. 다만 다시 하인으로 쓰진 않았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4-02-08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진도 많이 나가셨군요!
완독까지 응원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4-02-08 14:21   좋아요 1 | URL
미미님^^ 아무래도 읽다 말다 하면 동력이 떨어져서 가능한 긴 텀을 두지는 않고 읽고 있습니다. 근데 연휴 때 읽을 수 있을 것인지는ㅋㅋ 중세는 역시 더 과거인 고대보다 이름들이 더 익숙하네요. 흑사병이라던지 장미전쟁이라던지 무굴 제국이라던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