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들은 인지 분배관의 사직서를 받아내기 위해 필요한 폭력을 모두 동원했고, 테러로 위협하면서 인지의 하선이나 분배를 사전에 봉쇄해버렸다. 어떤 경우에는 폭도가 무력시위를 벌이자마자 분배관이겁을 집어먹고 사표를 던졌다. - P194

반란 기질은 경우에 따라 좀 더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분열이 이미 존재하고 인지세법을 지지하는 쪽도 분명히 있는 지역에서 폭거와 폭동은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했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다른 파당에게 인지세법의책임을 뒤집어씌우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적들이 영국 내각과 음모를꾸며 아메리카의 자유를 파괴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 P195

인지세법에 관한 소식이 알려지자 뉴포트에서 자유에 민감한 사람들은 심하게 동요했지만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감정은 곧 폭발할 예정이었는데, 인지세법 때문이 아니라 영국 해군때문이었다. 해군은 연초에 아주 무자비하게 선박 나포를 실시하여뉴포트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해군은 그 작업을 할 선원들이 필요했는데, 그들을 고용하기 위한 일처리도 세심하지는 않았다. 5월에 들어와 일련의 강제 나포가 발생하자 배들이 뉴포트 항구를 기피했고, 그리하여 무역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군함 메이드스톤호는 어리석게도 군함에 실린 보트를 부두로 보냈다. 그러자 약500명에 달하는 폭도들이 그 배를 붙잡아서 불태워버렸다. - P204

10월이 되자 의회는 아메리카에서 도착한 오싹한 폭동소식들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폭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지고 그것이 인지 분배관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나자, 의회의 분노도 커지기 시작했다. 의회가 재개되기도 전에, 아메리카의 행동을 묘사하는 데 ‘대역죄‘, ‘무정부’, ‘반란‘ 등의 어휘가 동원됐다. 그리고 12월 의회의 회기가 시작되자, 많은 의원이 인지세법 철폐에 반대했다. 철폐는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고 통치권을 훼손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P218

의회는 대영제국의 주권 기관이므로 식민지에 영향을 미치는 법령을제정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다만 법률 제정이 의회 주권의 핵심적 사안 중 하나이지만 과세권은 포함하지 않으며, 과세권은 대표 기관들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입법권과 과세권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규정하든, 그들은 영국 의회가 오랫동안 소중하게여겨온 권리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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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식민지에 대해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그다음 절차는 내각 또는 공식적으로는 추밀원-의 지시를 받아 남부장관이 그 소식을 식민지 총독들에게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었지만 식민지 관련 정보는 보통 이런 식으로 전달됐다. 그렌빌은 이런 통상적인 절차를 무시했고, 단지 재무관료인 토머스 웨이틀리가 여러 식민지 관리들에게 13개 식민지에서 사용하는 법률 문서의 성격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문서들에 붙이는 인지가 과세의 대상이 될 예정이었다. - P153

의회 내 인지세법 반대파는 연설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투표에서는 패배했는데, 결국 의회에서 중요한 것은 투표였다. 인지세법에 찬성하는 사람들 절반은이미 너무 오래 끌어온 과세 문제에 분노했고, 나머지 절반은 식민지가 방위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확신했기에 찬성표를 던졌다. 의회의 토론 기록을 믿는다면, 그들은 오히려 쉽게 찬성표를 던졌다. 대부분의 반대 의견은 토론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하원의원들은 빠르게 마음을 정했고, 필요한 지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한그렌빌은 반대파의 통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이치욕으로 느낄 정도로 쉽게 법안을 밀어붙였다.


인지세법은 아메리카에서 전례 없는 위기를촉발했다. 어떤 의미에서 1765년 여름과 가을에 벌어진 폭동과 시위는 인지세법 도입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시위와 폭동도 흥미로웠지만, 위기 사태에 시위대가 조직되고 현지 정치가 재조직된점은 그보다 더 주목할 만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식민지의 정치체제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게 수립되는 과정에서 식민지인의 자의식이 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 P161

버지니아 하원은 5월 31일 일련의 결의안을 승인했다. 본국의 정치체제는 과세권을 주민 또는 그 주민들의 대표들에게 한정시키고, 이 권리는 영국 정치체제 아래 사는 영국 신민인 버지니아인에게도 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숨겨진 뜻은 너무나 분명했다. 아메리카인이 대표를보내지 않은 기관인 영국 의회는 그들에게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 P162

1766년 초가 되자 대부분의 식민지 정치 상황은 인지세법이 통과된 1765년 3월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매사추세츠는 폭력 행위가 처음 시작됐고 정치도 변모해 갔다. - P172

오티스는 봄에 두 편의 소논문을 발간했는데, 그의 이전 논문 영국 식민지들의 권리〉(1764년)에서 취한 정치체제에 대한 입장을 뒤집는 내용처럼 보였다. 이 두 소논문은 영국 의회의 주권과 영국 의회의 식민지 과세권을 인정했다. 그다음에는 기이하게도 식민지는 사실상 영국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지만 법률에 의해표를 파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 P178

글을 발표하고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기로 결심한 소수의 사람들은매사추세츠 인지 분배관으로 임명된 앤드루 올리버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열 나인 Loyal Nine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자유의 아들들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들은 장인과 가게 주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존 길John Gill과 함께 《보스턴 가제트》를 발간했던 인쇄공 벤저민 이데스Benjamin Edes도 일원이었다.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가 이들과 비밀리에 몇 차례 만나기는 했으나,
이 그룹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의회 지도자는 없었다. 로열 나인 중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유일한 인물은 존 에이버리 John Avery 였다. 그는1759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상인이었고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로열 나인은 하노버 광장에 있는 체이스와 스피크먼 증류소에서자주 만났고, 거기에서 8월 14일의 폭동을 계획한 듯했다.43 폭동이라는 거친 일을 도모하기 위해 그들은 유경험자를 동원했는데, 바로 최근에 통합된 노스 엔드와 사우스 엔드의 폭도였다. - P181

따를 사례가 필요했든 아니든, 보스턴 폭동은 아메리카 전역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인지세법에 대한 혐오감은사회 모든 집단에 퍼져 있었고, 인지 분배 업무를 맡은 세금 징수관과그 일당에게 자연스럽게 분노가 집중됐다. 10월 말에 이르면 아메리카로 임명된 인지 분배관들 중에서 두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사임했다.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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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3세 즉위
총리인 윌리엄 피트의 리더십으로 전쟁 승리
군사, 재무 중심의 국정 운영을 통한 관료제 ->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 체제 공고화

18세기 아메리카 식민지: 자치 행정 + 식민지 의회
종교부흥 운동인 대각성 운동으로 지역적 연대

피트는 18세기의 경이적인 인물이었고, 음울한 정치가들과 몽매한 대중을동시에 환호하게 만든 지도자였다. 특별한 호소력을 가진 그의 기질과 심성으로 강력하게 일을 완수했으며, 사회적 통념과 반대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피트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성품대로 일을 완수했으며, 평범하고 뻔한 것을경멸하면서 화려한 웅변으로 자신의 입장을 멋지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면서 영감까지 불어넣는 그의 웅변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 P24

유럽인에게 위대한 국가는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유럽의 귀족,
은 프랑스 문화를 존경했고, 프랑스의 도서를 수집했으며, 잘 꾸민 방에 프랑스 가구를 들였다.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프랑스 옷을 입었고 프랑스어를 했다. 영어는 영국 사람이나 쓰는 말이었다. ‘필로조프philosophes‘라 불린 18세기 프랑스의 자유주의 계몽철학자들은 과감함과 상상력을 존중하는 유럽 사람들에게 높은 지적 수준을 제시했다. - P29

유럽이 영국을 한 수 아래로 보는 태도는 사실 편견에 따른 것이다.
영국 문화는 야만적이지 않았다. 물론 생생한 활기를 자랑하는 프랑스 문화와 같은 과감함과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제의 세련된 매너가 프랑스의 미술과 문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귀족이 예술을 애호한 것은 사실이나 그건 영국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이든 프랑스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자는 귀족이 아니었고, 그들이 세련된 수준과 기준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 P32

영국인이 볼 때 공기 중에는 더 이상 유령이나 요정, 복수의 여신인 퓨리스Furies와 정령, 마법사나 귀신 등이 넘쳐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더 이상 예언자들과 종파주의자들이 활약할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들은 한 세기 전만 해도 충만한 성령의 흐름 속에서 세상을집어놓으려고 했다. 공기 중에 아직도 환상이 가득 차 있고 영국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한다는 과도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여전히있었지만 그 공기를 정화하는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 P40

영국에서 모든 정부는 왕의 정부였다. 교구의 가장 낮은 관리에서총리에 이르기까지, 행정 업무는 모두 왕의 이름으로 수행되었고, 행정은 정교하지만 효율적이지는 못한 정부 구조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제도적이라기보다는 왕 자신의 개인적인 행정이라 할 수있었다. 왕은 정부 조직의 맨 꼭대기에서 능동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행정부의 지도자, 왕실의 권한을 행사하는 장관들의 지도자였다.
왕은 일정한 제약 내에서 자신에게 봉사하는 장관들을 선택했다. 그제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의회의 지도자들이 다른 의원들과함께 정부의 일을 할 용의가 있어야 하고, 상하 양원의 지지를 이끌어낼 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왕에게 내각 구성이나 각료 개인에 관한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의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입맛대로내각을 구성하려는 왕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 자신들이 왕의지명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했다. - P42

충분히 검토한 바가 없으면서도, 영국 내의 일반적인 의견은 식민지 관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식민지는 식민지일 뿐이므로, 13개 식민지는 속령‘이며, 윗사람이 심어놓은화초이고, ‘모국‘의 ‘자녀들‘ 이며, ‘우리의 신하‘라는 것이었다. 식민지와 그 예속 상태를 묘사하는 이러한 언어 선택은 어떤 특정한 현실을묘사한 것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식민지 경제는 영국의 요구 사항에 부응해야 한다. 경제생활에서의 예속 상태는 절대적이지는 않아도실질적이어야 한다. - P62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는 사실상 각자 독립해 있었으므로, 그들사이의 정치적 협력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고 누구도 식민지를 단합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인디언 문제나 전쟁 등의 공동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단합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 P69

아메리카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국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종교는 그런 여러 방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심지어 혁명에 미온적이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종교는 중요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무엇보다도 아메리카에서 종교가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종교는가치, 이상,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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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태동

땅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이동한 아메리카인.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설정된 인디언 보호구역.
설탕법을 둘러싼 논란.

영국 각료들은 상당한 기량을 갖춘 정치적 전략가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 놀라운 실수를 저질렀다. 아메리카인의 생각을 잘 모르는 채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최악의 실수였고, 그들이 생각을 분명하게 표명했을 때 타협하기를 거부한 것 역시 심각한 실수였다. 영국 각료들은 아메리카인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타협과유연성의 필요를 망각해버리는 등 정치적 감각을 잃은 듯 보였다. 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아주 먼 거리도 이들의 정치적 감각을 둔화시켰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통치하는 일은 현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평소 예리한 후각을 가진 많은 정치가도 결국은 아메리카의 관심사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 P112

사실관계는 명확했다. 땅에 굶주린 아메리카인은 인디언을 무시하면서, 또 인디언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단속하는 토지 감독관들의 지시를 무시하면서 계속 서부로 흘러들었다. 토지 회사들은 토지의 배타적소유권과 판매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허가를 따내기 위해 런던과 식민지의 중심지에서 경쟁을 벌였다. 인디언은 저항했고 토지 획득에 혈안이 된 백인을 당연히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P120

그렌빌 내각은 애팔래치아산맥과 미시시피강 사이의 서부 지역에 백인 점령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공식 선언했다. 또한 이 선언에서 퀘벡, 이스트플로리다, 웨스트플로리다라는 3개 식민지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공표했다. 이 지역들은세인트로렌스밸리의 프랑스 정착촌과, 예전에 스페인 땅이었다가 7년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할양된 땅이었다. - P125

1763년 영국의 국가 부채 규모를 살펴본 각료라면 누구라도 너무놀라서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1763년 1월 5일 당시 재무부 회계에 따르면 국가 채무는 1억 2260만 3336파운드라는 엄청난금액이었다. 더욱이 이 원금에 대한 1년 이자만 440만 9797파운드나되었다. 1년 후 700만 파운드 정도의 부채가 더 늘어났고, 그렌빌이내각을 떠난 지 6개월 뒤인 1766년 1월에도 700만 파운드가 추가됐다. - P126

그들은 세수 증대를 위해과세를 해야겠다는 영국 의회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권리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권리를 누렸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권리는 언제나 사치품 같은 것이었다. 아메리카인들은 곧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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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계년사 9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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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10년까지의 3년 간의 역사를 다뤘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스토리였다.
아는 내용인데도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1. 전명운과 장인환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정부 고문관 스티븐스가 휴가로 제 나라에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지역 신문기자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뒤 샌프란시스코의 우리나라 인민들은 분노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3월 22일 샌프란시스코 공립관에서 공동회가 열렸고 대표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네 명을 보내 스티븐스를 방문토록 했다. 네 사람은 스티븐스에게 우리나라 정세를 묻고 신문 기사에 대해 따져 물었으나 스티븐스는 잘못을 바로잡을 게 없다 말했다. 네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하고 스티븐스를 폭행했으나 주변 이들이 말려 겨우 진정하고 사태 수습 후 돌아갔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과 장인환이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스티븐스는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사망하고 장인환은 전명운이 쏜 총에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12월 23일 두 사람의 판결은 장인환 25년 징역, 전명운 95개월 징역에 처해졌다. 애국심에서 한 행동이 인정되어 정상 참작된 것이다.

스티븐스는 말했다.

"한국에는 충신 이완용이 있으며 또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있으니 한국과 동양의 행복입니다. 내가 한국의 형편을 보건대, 태황제의 허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고집 센 무리들은 백성의 재산을 도둑질했으며, 인민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빼앗아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찍이 러시아가 강제로 합쳤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 P24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대장 대신은 극동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와 만나 만주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걸어서 각국의 외교관들, 인민들 앞으로 와서, 악수를 하고 일본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러시아 군대가 있는 쪽에서 총탄이 발사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었다.
11월 3일 안중근 및 이 사건에 관련된 8명이 여순에 도착했다. 한 대의 마차에 나누어 싣고 시가지를 거치지 않은 채 산길을 돌아 곧바로 여순의 감옥서로 향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사형장에서 동양의 평화에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그 시신을 귀국시켜 그의 고향에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일본인이 허락하지 않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냈다. 

여러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일에 이르게 되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독 안중근만은,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내나 자식은 생각하지 않으며, 암살 사건은 달리 관계된 사람은 없고 오직 자기 한 사람의 뜻이었다고 했다. - P53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은 가득찬데, 오히려 또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정책에 한국의 인민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른다'며 각국에 발표하여 세계를 속여넘겼다. 이제야 한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잔인한 행위와 한국인들의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널리 드러내어 알리기 위해 많은 수가 외국으로 나아갔다." - P130

"나는 사천 년의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백성과 나라의 권리를 짓밟고 우리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간악한 도적을 죽이는 하나의 거사, 이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바르고 옳으니, 나는 국민의 커다란 의무로서 살신성인하려고 한 것이다." - P136


3. 이재명 등의 이완용 암살 시도

1909년 12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벨기에국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 참석 후 돌아가기 위해 나섰다. 이재명이 길 옆에서 나와 단도를 휘두르며 인력거 앞으로 달려들었다. 인력거꾼을 찌르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수레가 뒤집히고 이완용이 허리와 어깨가 찔리자 순사들이 이재명에 맞서며 상처를 입혀 이재명은 결국 붙잡혔다.
1910년 5월 13일 이재명 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방청인들이 1천여 명이었는데, 방청권을 얻은 사람은 1백 여명을 넘지 않았다. 변호사 안병찬, 이면우, 오사키 유노쇼, 이와타 센소, 기오가 줄지어 앉았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기자 수십 명도 자리했다. 독일 통신사의 사원 보리안(정확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도 있었다. 이재명의 아내 오인성과 백 소사 등 부인 다섯이 있었다. 사법청 관리 10여 명과 독일의 총영사도 자리했다.
최종 선고로 이재명은 사형, 김정익 김병록 이동수 조명호는 징역 15년, 오복원 전태선은 징역 10년, 김용문 박태현은 징역 7년, 이응삼 김병현 김이걸 이학필은 징역 5년에 처해졌다.

"이완용이 죽어 마땅한 죄는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낱낱이 지적할 겨를도 없다. 5조약의 이전과 7조약 이후의 드러나지 않은 죄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 P218

"이재명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의 이재명이지만, 죽은 뒤에는 수천 수백의 이재명으로 바뀌어져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빨리 통감을 없애버리고 당장 5조약과 7조약을 폐기하며, 그밖에 옮겨지거나 빼앗긴 모든 우리 나라의 권리나 물품을 일일이 돌려 받아, 뒷날의 두려워할 만한 일을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24


국민들에게는 그 어떤 시도들보다 통쾌한 소식이었겠지만 이들이 암살 또는 기도 이후 법정에서 하는 이야기와 암살 배경 스토리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안병찬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변호인으로써 최선의 변론을 하는 모습은 정말 뭉클했다. 안병찬 선생은 안중근, 이재명 재판에 변호를 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이 아니면 변호 자체가 거부되어서 달려갔음에도 변호를 할 수 없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명 변호는 진행은 되었으나 1심의 결과 그대로 사형이 내려졌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셨을 것이다.


4. 일진회의 (끊임없는) 한일합방 상소

전 일진회 부회장 홍긍섭이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일진회 총재 송병준과 한일합방의 문제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귀국해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이 일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연합한다는 ‘한일연방’의 이야기와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로 합친다는 ‘한일합방’의 이야기, 일진회 회원들이 화계사에 모여 ‘합방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이야기 등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인심이 떠들썩했다.
1909년 12월 2일 밤 이용구는 일진회 본부 앞에서 총회를 열었다. 참석한 회원은 수백 명이었다. 한 회원에게 성명서를 낭독시키게 한 뒤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발표했다.(이때 여러 회원은 갑자기 이 말을 듣고 까닭을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회원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고 생각해 만장일치 가결이라 했다.) 우편으로 성명서를 내각과 부 원 청 및 13도 관찰사와 군수, 서울과 지방의 각 사회단체, 학교와 신사들에게 발송했다.
12월 3일 밤 대회에서 한일합방의 문제를 결의하여 황제에게 상소했다. 또 한 통의 상소를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보내 일본 황제에게 아뢰어 달라고 부탁했다. 또 이완용과 소네 아라스케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었다가 일진회로 개칭된 후 9월에 동학 잔존 세력이던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최종 통합된 조직이다.
따라서 천도교 세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일진회 회원 중 많은 이들이 탈퇴하고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도 이 때 일진회와 결별하게 된다. (손병희 등이 일진회에 몸담았다는 것이 사실 그들의 인생의 오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이후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이전부터 일진회라는 세력 자체의 기원과 이후 조직이 전개되는 과정이 매끄럽고 깔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이 그렇기도 했고 조직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던 과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껄끄럽고 찜찜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한일합방 청원 상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마치 일본인의 입장 같은 발언을 일삼는 그들을 보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법률에서 '정치적으로 나라를 합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합병'은 나라의 영토를 큰 나라에 딸려 붙이는 것이라느니 갖가지 다른 잘못된 말로 선동하면서, 인심을 의혹시키고 나라의 방침을 어지럽게 하여 갈수록 헛갈리게 합니다. 앞길을 아득하게 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와 의분에 찬 뜻 있는 선비들은 이 일에 대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할지를 알지 못하여 애써 속을 태웁니다. 일본의 황실과 정부의 여론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은 우리 이천만 국민 모든 사람이 진실로 호소하고 요청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P68

근대 세계의 대세가 크게 바뀌고 국제 경쟁이 더욱더 격심해져 이긴 자는 흥하고 패한 자는 망하는데 이것은 진화의 법칙으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인도 미얀마 자바 필리핀이 멸망한 것이나 베트남 타이가 거꾸러진 것, 중국이 쇠퇴해진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P80


이들의 논리의 기저에는 진화론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라는 논리, 그 흐름 속에 대한제국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 일본에 합쳐져야 보전될 수 있다라는 흐름으로 가게 만든다. 당시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8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방 청원 상소 이후 채응언 등 의병들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용구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용구는 합방 청원이 거절당했으나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 이후 연이어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상소, 국민대연설회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이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잘 울지는 않지만 도무지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그랬는데 한 번은 안중근의 변론과 사후 과정.
다른 한 번은 이재명의 변론 후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한일강제병합 소식이다.

두 분 모두 재판 과정에서 결코 굽힌 적이 없고 시종일관 기개가 있었고 당당했다.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을 생각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분들이다. 남에게 손벌리거나 아첨하거나 그러기 쉬웠을텐데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이들이다.

비록 1910년 대한제국은 망했으나 그 과정이 진행되기까지 선택의 순간들은 많았다.
국가의 선택의 순간들.
개개인의 선택의 순간들.
당시의 선택들이 그 당시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현재는 그 선택에 따른 평가를 각기 받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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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2 2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국가는 망했지만 국민들은 망하지 않았단 생각들어요. 그 용기와 기개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3 11:58   좋아요 1 | URL
대다수의 백성들의 행동이 권력자들의 오만이나 잘못을 참고 두고 보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요. 지금도 계속 이 전통(!)은 이어지는 것 같아서 뿌듯함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보고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워요.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고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scott 2022-03-15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고통스러웠던 한반도


화가님 읽는 동안 흘러 내리는 눈물 ㅠ.ㅠ

역사의 과오, 독립 운동가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3-15 17:41   좋아요 2 | URL
눈물 훔치며 읽었어요.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는.

역사에서 배울 수만 있다면 지금 이렇지 않을텐데... 왜 늘 반복되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전진할 수 있기를 희망할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