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태동

땅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이동한 아메리카인.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설정된 인디언 보호구역.
설탕법을 둘러싼 논란.

영국 각료들은 상당한 기량을 갖춘 정치적 전략가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 놀라운 실수를 저질렀다. 아메리카인의 생각을 잘 모르는 채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최악의 실수였고, 그들이 생각을 분명하게 표명했을 때 타협하기를 거부한 것 역시 심각한 실수였다. 영국 각료들은 아메리카인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타협과유연성의 필요를 망각해버리는 등 정치적 감각을 잃은 듯 보였다. 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아주 먼 거리도 이들의 정치적 감각을 둔화시켰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통치하는 일은 현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평소 예리한 후각을 가진 많은 정치가도 결국은 아메리카의 관심사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 P112

사실관계는 명확했다. 땅에 굶주린 아메리카인은 인디언을 무시하면서, 또 인디언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단속하는 토지 감독관들의 지시를 무시하면서 계속 서부로 흘러들었다. 토지 회사들은 토지의 배타적소유권과 판매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허가를 따내기 위해 런던과 식민지의 중심지에서 경쟁을 벌였다. 인디언은 저항했고 토지 획득에 혈안이 된 백인을 당연히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P120

그렌빌 내각은 애팔래치아산맥과 미시시피강 사이의 서부 지역에 백인 점령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공식 선언했다. 또한 이 선언에서 퀘벡, 이스트플로리다, 웨스트플로리다라는 3개 식민지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공표했다. 이 지역들은세인트로렌스밸리의 프랑스 정착촌과, 예전에 스페인 땅이었다가 7년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할양된 땅이었다. - P125

1763년 영국의 국가 부채 규모를 살펴본 각료라면 누구라도 너무놀라서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1763년 1월 5일 당시 재무부 회계에 따르면 국가 채무는 1억 2260만 3336파운드라는 엄청난금액이었다. 더욱이 이 원금에 대한 1년 이자만 440만 9797파운드나되었다. 1년 후 700만 파운드 정도의 부채가 더 늘어났고, 그렌빌이내각을 떠난 지 6개월 뒤인 1766년 1월에도 700만 파운드가 추가됐다. - P126

그들은 세수 증대를 위해과세를 해야겠다는 영국 의회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권리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 권리를 누렸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권리는 언제나 사치품 같은 것이었다. 아메리카인들은 곧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 P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