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만주족 이야기 - 만주의 눈으로 청 제국사를 새로 읽다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1
이훈 지음 / 너머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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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청 제국의 강역을 계승했고 만주족은 중국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사의 영역은 중국 내지China proper를 넘어 청 제국이 지배한 광활한 공간을 포괄한다. 중국은 만주 지역을 동베이東北라고 부르며 중국사가 포괄하는 공간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만주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두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태어난 국가를 각자 ‘국사’의 일부에 배치했고,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역사 공간은 충돌한다. 양자의 사이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이 영유했던 그들만의 역사와 그들만의 공간은 실종되어 갔다. 이 글은 만주족이 살았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으로 서술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청의 역사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만주족의 역사를 자연스레 훓게 된다. 근대 중국의 마지막 국가가 청이었기도 하지만 중국 땅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와 붙어 있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던 위치에 있었다. 다만 서로의 이해도가 달라 지금까지도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책과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명과 인명 등을 원어인 만주어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독자는 낯선 용어로 독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기존에 우리는 관련하여 한어적 명칭과 발음이 자연스러운 탓이다. 현대 만주족의 규모가 거의 줄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역사를 다루는데 만주어에 대한 이해와 고려 없이 한자만을 사용한다면 반쪽짜리 이해일지 모른다. 게다가 중국은 다양한 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므로 특정 시각에 입각하여 서술된 역사는 몰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만주어를 사용하여 책을 기술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읽다보니 괜찮아졌다.


1599년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의 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건주여진은 하다를 공격했고, 하다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비첩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G’ag’ai, ?盖(?~1600)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티다가 멸망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건주여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방파제가 되어 여허의 멸망을 막아 준 것은 명이었다. 명은 1619년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몇 년 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의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명은 여허를 후원하고 지켜 주기는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버일러 긴타이시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주족의 구성원은 어떤 방식으로 분화했을까. 우선 1644년 청이 중국 땅에 들어와 만주족이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1635년까지만 해도 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었던 것은 여진족과 소수의 한족, 조선족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는 강희제 시기 만주 동북부에 있던 퉁구스계 민족과 소수의 러시아 계열의 민족이 유입되고 건륭기에는 동투르키스탄에 있던 소수의 투르크계 사람들이 팔기군에 합류했다.


그렇다면 ‘만주족’이 가진 고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만주족은 성이자 씨족 집단인 ‘할라’, 2개 이상의 씨족 집단이 모인 ‘무쿤’, 하나의 할라가 여러 마을에 들어가서 각 마을에 서로 다른 할라가 섞이는 ‘가샨’ 등을 가진다. 만주족이 성을 잘 쓰지 않는 것은 국가를 세우기 전에 할라인 씨족 집단으로 생활했던 시기의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 과정에서 대부분 집단 고유의 조직을 니루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팔기에 편제된 후에도 큰 혼란이 없을 수 있었다.

둘째, 수렵과 군사 훈련이다. 만주족은 국가를 수립하고 나서도 수렵을 생산 활동의 일부로 중요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군사 훈련의 과정으로 이용했다. 

셋째, 황실에서 지낸 샤머니즘 제사인 탕서와 곤녕궁 제사다. 누르하치는 경쟁 여진 부족을 물리친 뒤 씨족 수호 신령을 모신 사당인 당서를 파괴함으로써 누르하치의 탕서가 다른 모든 씨족의 탕서를 대체하게 하면서 복속된 여진인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홍 타이지는 탕서 제사를 황실이 독점하게 하고 굿을 금지시켰다. 곤녕궁 제사는 탕서 제사와 유사하지만 하늘신, 조상신 뿐 아니라 석가모니, 관음신 등 외부에서 가져온 신도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 조선 시대 말을 끄는 하인인 ‘거덜’이 있었던 것처럼 만주족은 ‘쿠툴러’가 있었다. 쿠툴러도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지만 기병 위주의 전쟁을 하는 만주족에게 말을 관리하는 그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다섯째, 오락, 전투 훈련으로 빙상 경기를 했다. 건륭제는 자금성 북해에서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된 북해는 겨울에 북경 시민이 스케이팅을 즐기는 장소로 기능했다고 한다. 여섯 째, ‘가추하’라는 놀이다. 가추하는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로 뼈(주로 양이나 돼지의 뼈를 이용)를 던지며 노는 것이다. 가추하는 실내, 실외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즐기는 대중 놀이였다.

일곱째, 만주어다. 홍타이지는 특히 한어의 유입으로 만주어가 상실될 위협에 놓인 것을 경계하여 한어, 몽고어 어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점차 한족의 문화에 익숙해졌고 한자 사용이 많아지면서 소멸되어갔다.


청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조치는 다양했다. 귀족층 자제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당근을 주는 대신 귀족층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황제가 몽고 왕공을 자주 접견하고 장성 밖에 사찰을 지어 타 민족을 고려하는 모습을 비춰주기도 했다. 동전에 만주어와 한어를 함께 새기면서 백성들에게 통합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도 있었다. 신강을 정복한 이후에는 전쟁기념관인 자광각을 세워 군사적 메시지를 주었다. 한인이 숭배하던 관우 신앙을 만주족 지배자들은 계속 존숭했다. 관우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청의 변경은 제국의 역사 동안 끊임없이 변경되는 과정을 거쳤다. 1644년 청은 입관 후 수십 년간에 걸쳐 중국을 정복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에서 다수의 병력을 원거리의 동북방 흑룡강 유역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입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소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현지의 부족민을 병력으로 활용하며 때로는 조선군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은 순치기에만 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수백 명 내지 1,000여 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 가운데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참전했다. 조선의 신유 장군이 참여하여 알려진 ‘나선 정벌’이 이 중 하나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후 만주 지역의 북방은 안정된 상황으로 진입했지만 청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족민을 팔기로 편제하는 정책을 계속 진행시켰다. 시버족은 이 때 만주에서 신강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책은 만주족의 역사도 다루지만 특히 ‘만주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더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 거기에 원하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적합했고 역사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무얼 하며 살았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하기 때문에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주족에 대해서 세밀하게 알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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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tars Are Scattered (Paperback, 미국판) - 『별들이 흩어질 때』원서
빅토리아 제이미슨 / Dial Books for Young Readers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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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파괴되고 우여 곡절 끝에 난민 캠프에 들어온 두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게 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둘의 모습이 대견했다. 가족과 헤어지고 고향이 사라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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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5-28 0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4-05-29 21:41   좋아요 2 | URL
괭 님도 완독하셨던 것으로 봤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미나게 읽었네요. 감동적이기도 했고요. 특히나 저는 난민캠프에서 만난 엄마와의 일화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훔쳤답니다.
완독 축하드려요^^

미미 2024-05-29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4-05-29 21:42   좋아요 1 | URL
미미 님 덕분에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뭉클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후기까지 읽으면 가슴에 불꽃이 절로!ㅎㅎ 요새 일 때문에 스트레스 가득이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힐링했습니다. 감사드려요. 다음 달 책도 기대해봅니다.
 

이시하라 등이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에서 군부가 정부를 끌고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실제 여론이 정부보다도 오히려 군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군부가 정부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정부를편달했던 것이다"라는 관찰이 있을 정도로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 - P85

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장악하게 되었다. - P86

만주청년연맹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만몽 자유국 건설 강령>을 제출했다. 거기서는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 민족협화와만몽 독립국가 건설이 동일한 하나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자유‘에서 ‘자유‘란 "자유주의와는 다른, 각 민족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하여" 철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재만 일본인이 국적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 P116

다이호카이는 총 30명 남짓으로, 만주청년연맹과는 달리 대외적 선전활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모임으로서의 강령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어떤 주장이나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는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가사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사상에 공명하는 자들의 동지적 결합이라는 색채가 점차 농후해졌는데, 기아시아부흥사상과 불교적 신앙이 그 근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색인종의 해방‘, ‘세계의 도의적 통일‘ 등을 강령으로 내건 고치샤의 기관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가사기는 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국가의 목적과 이상은 이법(理法)을 체현하는 데에 있다"라고 논하고 있다. - P120

"만주사변은 구동북 군벌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 군벌의 붕괴는 그에 수반된 결과로서 수백만 명의 만몽 제민족과 3천만 남짓한 중화민중을 반봉건의 철쇄로부터 해방시켰고, 더군다나 이 해방은 바로 만주사회의 아시아적 본질을 각성시켜, 전통적 생활사상과 자치적 기능에 의해 새로이 왕도국가를 건설하게되었다. 그 때문에 왕도국가의 건설은 역사적·사회적 필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시아 민족에게 왕도사상은 전통적으로 사회생활의 이상으로서 살아 있기 때문에, 구군벌의 철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봉건적인 사회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도국가 건설이 민중자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선언은 이처럼 만주 왕도국가 건설의 필연성을 주장한 후, 나아가왕도연방의 건설을 제창하고 있다. "만주 왕도국가의 건설은 반드시만주인민을 위한 낙토가 아니고, 또한 단지 일본제국의 생명선도 - P136

아니며, 하물며 파시즘의 연기장(場)은 더더욱 아니고, 지금 바로태평양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세계인류 생존전에 임해 우리 아시아 왕도사회의 자존을 확보해야 할 유일무이의 세력인 왕도연방의 모체가되어야 할 사명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 P137

만주국은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그 건국의 동기와 이념의 표명에 있어서 중화민국과의 이질성 · 대극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거꾸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승인과 일본의 기존권익 확보의필요성에서도 중화민국과의 국가적 계승성 (state succession)을 부정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화민국에 대해 단절성과 연속성이라는 상 - P143

반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여기에 만주국의 모반(母)이라 할 ‘출생‘에 뿌리내린 특징이 보이며, 또한 그것이 만주국의 건국이념과 국제 자체를 크게 규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44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일만 정위이건, 일만 비율이건, 총무청 중심주의건, 내면 지도건 모두 국법상의 권한과 사실상의권한이라는 양면성을 표상하면서도 그 어긋남을 호도하기 위한 미봉책이며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푸이는 자신과 천황을 정신일체로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불충이라는 낙인을 들고 나옴으로써 일계 관리와 관동군을 견제할수 있기를 바랐다. 천황에 대한 재만 일본인의 충성심을 역이용했던것이다.
그러나 푸이의 전략은 반드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일계 관리와 관동군 군인들에게 푸이를 천황과 동일시해야 할 필연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본래 사령관 "마음대로 군대를 진퇴시키는 것은 사형에 처한다"라는 육군 형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만주사변을 일으킨 혼조 시게루 사령관 이하 관동군 참모들은 군법회의에서 심문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조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남작을 수여받은 데다시종무관장의 중책에 임명되고, 이시하라 등에 대해서도 진급 서훈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율과 명령계통을 무시하더라도결과만 좋다면 상을 받는다는 풍조가 군부 막료 사이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견 군인들의 공명심은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을 취하려고 내몽 공작과 화북에 대한 정치적 · 군사적 진출로 내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풍조는 이윽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講橋)사건의 발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 P275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은, 중국이 만주사변 이래 일관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주권성을 부인해온, ‘위(가짜)국가‘로서의 만주국을 괴멸시키고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항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에 중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이 만주국을 ‘위국가‘가 아니라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 혹은 신중국의 성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정권과 국가의 정통성과도 관련되는 미묘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데, 동아시아 세계의 전후를 생각하는 데 조선반도에서의 만주국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하다. - P408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외에도, 최규하 대통령 등의 대동학원 출신자, 강영훈 총리나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의 겐코쿠대학 출신자 등, 만주국에서 육성된 인재가 전후 한국 정계의 주요 인물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친일파‘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와 뒤얽혀 한국에서 앞으로도논란이 될 터인데,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에 비해 만주국을 거친 사람들 쪽이 자신의 능력을 살려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은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통해 반만항일전쟁을 지도하여 승리했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원래 김일성이라는 이름 자체가젠다오 지방의 조선인사회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상의 민족영웅의름이기도 한 것처럼, 만주와의 관련은 민족적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고있는 측면이 있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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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토르구트에게 물자와 유목지를 지급했지만 그에 비할 수 없이 막대한 상징적 소득을 얻었다. 1771년 토르구트의 귀환은 세계의 군주를 자임하던 건륭제의 자존감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청의 국력과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먼 곳의 사람들이 귀순하여 찾아오게 만드는 것, 즉 회유원인懷柔遠人은 천하를 통치하는 제왕의 덕목이었고 국가의 부강함을 입증해 주는 증표였다. 토르구트가 러시아를 버리고 자진해서 청에 귀순해 온 것은 건륭제의 입장에서 회유원인의 실현이고 청의 성세를 입증해 주는 보증서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토르구트가 귀환한 일리 일대가 귀환 당시 청의 영역이었고 현재 중국의 영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토르구트와 그들의 본령이었던 서몽고 오이라트와의 관계는 무시하고 준가르 제국의 의미를 축소하며 토르구트가 그들의 조국인 청에 귀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추어 재단하는 환원론teleology적 시각이며, 현재와 과거를 착종시킨 시대착오적anachronism인 서술이다. 이런 시각과 서술로는 토르구트의 역사만이 아니라 중국의 변강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에카테리나 2세의 식민지배 정책으로 인해 토르구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다. 정치와 행정의 자치권은 러시아에 의해 박탈당했고 가축을 유목하는 초지도 잠식당했다. 이들은 러시아로부터 탈출했다.
토르구트의 탈출은 단순히 러시아 변경의 일개 부족의 이탈로 그친 문제가 아니었다. 토르구트의 탈출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해도 이들이 아무런 저지 없이 러시아 변경을 빠져나간 사건은 러시아 변경의 방어선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부족민들을 약탈했다. 러시아인들은 1650년 흑룡강 상류역의 다구르인 거주지인 약사Yaksa, 雅克薩에 알바진 요새를 세우고 흑룡강 연안의 부족민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야삭이라고 부른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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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입관 후 수십 년간에 걸쳐 중국을 정복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에서 다수의 병력을 원거리의 동북방 흑룡강 유역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입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소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현지의 부족민을 병력으로 활용하며 때로는 조선군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은 순치기에만 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수백 명 내지 1,000여 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 가운데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참전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후 만주 지역의 북방은 안정된 상황으로 진입했지만 청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족민을 팔기로 편제하는 정책을 계속 진행시켰다. 시버족에 대한 지배권을 코르친으로부터 이양받아 팔기로 편제한 것도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준가르의 본거지였던 일리 일대는 인구가 텅 비어 버린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일리는 청이 신강과 몽고를 영유하기 위해서는 비워 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리는 신강의 북부를 제어하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그 북동쪽에 있는 타르바가타이(현 신강의 탑성塔城)와 호응하여 몽고의 알타이 지역과 호브드(현 몽골국의 지르갈란투)까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다. 청은 1762년(건륭 27) 밍슈이ming?ui, 明瑞를 일리 장군에 임명하여 일리에 혜원성惠遠城을 건설했고 그 인근에 안원성安遠城과 수정성綏定城 등을 계속 건설해 갔다. 그리고 이 주둔지들에 파견할 병사를 선발하여 배치하기 시작했다. 몽고의 차하르, 솔론, 다구르가 일리 일대에 주둔군으로 영구 파병되었고 심지어 한인 군대인 녹영綠營에서도 주둔군이 선발되었다. 시버족도 영구 파병군으로 선발되었다.

시버족은 병역의 의무 외에 자신들이 먹고 살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을 해야 했다. 이주 초기에는 정부에서 정착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을 제공했지만 그것은 한정된 기간에 국한되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주둔병은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군사 의무와 경작을 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버족은 주로 벼를 재배하고 목축업도 겸하며 일리강 유역을 개발했다. 더욱이 시버족은 신강 남부의 호탄, 카쉬가르 등 무슬림 지역에 있는 주둔지에 3년씩 파견 근무를 나가야 했다. 시버족에게 부과된 임무는 상당히 과중했다. 시버족은 이주 후에 만주팔기와 몽고팔기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버영錫伯營, Sibe k?waran으로서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유지했고 일리강 남안의 시버족 영역인 찹찰에서 집단 거주했다. 이렇게 분리되고 고립된 거주 형태는 시버족이 만주어를 모어로 유지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영제營制가 와해되고 민간인으로 재편되기 전까지 청의 서북 변강을 수비하는 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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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이르러 할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분화가 진행되었다. 즉 하나의 할라가 나뉘어서 따로 거주하는 두 개 이상의 동성同姓 씨족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할라에서 분화된 씨족 집단을 무쿤muk?n이라고 했다.

모든 만주족은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은 그들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씨족 단위로 생활했던 시기의 관습이 청대 내내 지속된 때문이었다.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은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했다. 이 씨족을 여진어로 할라hala, 姓라고 했다. 할라는 하나의 씨족 집단을 가리킴과 동시에 성姓을 의미했다.

만주족이 대거 본래의 성을 축약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한족의 성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대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이후이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청 말기와 신해혁명 시기에 한인의 만주족에 대한 적대감이 급격히 커진 때문이었다.

과거에 할라는 자주 이동하면서 살았으나 농경이 발전하고 정착 생활이 늘어나면서 촌락을 구성하게 되었다. 하나의 할라가 몇 개의 촌락에 분산되어 살기도 하고, 촌락에 다른 씨족인이 섞이기도 했다. 이러한 촌락을 여진어로 가샨ga?an이라고 했다.

누르하치의 정복전에 강력히 저항하다 복속된 여진인은 기존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구성원을 개인 단위로 여러 니루에 배속시켰지만, 그 외에 다수의 여진인은 과거의 혈연 조직과 지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루로 편입되었다. 하나의 혈연 집단의 사람 수로 하나의 니루를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했고, 대개 씨족장인 할라 다hala da, 姓長나 무쿤 다muk?n da, 族長를 니루의 수장인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하나의 지연 집단 내에 몇 개의 혈연 집단이 있고 이를 합쳐서 하나의 니루를 만들면 대개 촌락장인 가샨 다ga?an da, ?長를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씨족은 여진인이 팔기로 편제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니루 속에서 존속되었다. 결국 팔기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의 일부가 아버지에서 아들과 손자로 대대손손 계승되면서 진짜 성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족의 이런 독특한 방식의 유사 성姓을 중국 학계에서는 수명성隨名姓이라고 부른다. 즉 아버지의 이름의 일부를 자식이 계승하여 마치 성처럼 쓴다는 뜻이다. 아버지 이름의 일부를 따서 아들이 성처럼 사용하다 보니 많은 한인들은 만주족의 아버지와 아들이 상이한 성을 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만주족이 성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고 이름의 첫음절이 성처럼 불리다보니 일어난 오해였던 것이다.

홍 타이지는 탕서 제사를 황실이 독점하는 조치를 반포하는 동시에 야제野祭, 즉 굿을 금지시켰다.

청 황실의 가장 중요한 샤머니즘 제사는 탕서 제사와 곤녕궁(입관 전은 청녕궁) 제사였다. 탕서 제사가 궁궐 밖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면, 곤녕궁에서 열리는 제사는 궁중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 곤녕궁에서 거행된 제사의 형식은 탕서 제사와 유사했다. 곤녕궁 제사에서는 탕서 제사와 마찬가지로 하늘신과 조상신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관음보살, 관제關帝 등 외부에서 도입된 신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 고유의 신인 조상신이나 부뚜막신jun ejen 등은 워처쿠라고 불린 반면, 외래의 신은 언두리enduri라고 불려서 양자가 구분되었다. 많은 신이 제사의 대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신은 역시 조상신이었다.

건륭제는 1747년(건륭 12)에 다양한 종류의 샤머니즘 제사의 격식과 축문들을 정리하여 『만주인의 제신祭神하고 제천祭天하는 규정서Manjusai wecere metere kooli bithe』라는 제목의 만문서를 편찬했다. 청대의 많은 만문서들이 처음부터 한문본과 함께 편찬된 것과 달리 이 책은 최초에 만문만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780년(건륭 45)에 『만주제신제천전례滿州祭神祭天典禮』라는 제목으로 한역漢譯되었다. 이런 사실은 만주족에게 샤머니즘 제사가 얼마나 강하게 고유의 전통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 주며, 건륭기의 샤머니즘 제사에 대한 황실 의례서를 만드는 일이 만주어 강화 정책과 연계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여 준다.

샤머니즘은 누르하치가 국가를 수립해 가던 초기부터 복속된 여진인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누르하치는 기병한 후 여진족의 다른 경쟁 부족을 격파한 뒤에 그들의 씨족 수호 신령을 모신 사당인 탕서tangse, 堂子를 파괴했다. 결국 자기 씨족의 수호 신령을 모신 누르하치의 탕서가 다른 모든 씨족의 탕서를 대체했다. 다만 누르하치 편에 동참한 부족은 자신들의 신령을 모시는 것이 인정되었다.

조선어의 ‘거덜’과 같은 뜻의 어휘인 만주어 ‘쿠툴러kutule’도 몽고어 ‘쿠투치’로부터 유래했다. 쿠툴러는 몽고어 쿠투치와 마찬가지로 ‘말을 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용어는 만주어에서 동사형 어미 ‘?mbi’와 결합하여 ‘말을 끈다’는 의미의 동사형 ‘쿠툴럼비kutulembi’로도 쓰였다. 한문으로는 고도륵庫圖勒 혹은 고독립孤獨立이라고도 음사했고 때로는 의역하여 근마인?馬人, 사졸?卒, 공마노控馬奴, 근역?役 등으로 쓰기도 했다. 『만문노당』에서 쿠툴러를 때로는 쿠투시kutusi라고도 썼다. 아마도 몽고어 쿠투치의 원래 발음이 만주어에 강하게 남아 있는 현상일 것이다.
만주족의 쿠툴러도 조선의 거덜처럼 기본적으로는 말을 관리하고 끄는 일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기병 위주의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쿠툴러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조선의 거덜보다 훨씬 복잡하고 컸다.

조선 시대에 말을 끄는 하인을 ‘거덜’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는 ‘구종驅從’ 혹은 ‘구종배驅從陪’라고 했다. 조선의 사복시司僕寺에서 말 관리를 담당하던 종7품의 잡직 종사자들도 거덜이라고 했는데, 이들의 정식 관칭은 견마배牽馬陪였다. 이들 거덜들은 평소에 말을 관리하다가 궁중의 귀인이나 상전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면 말고삐를 잡고 행차의 앞에서 ‘물렀거라’를 외치며 위세를 부렸다. 때로는 이들이 공무에 개입하여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건륭제는 해마다 겨울에 북경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북해北海에서 팔기군의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빙희?嬉’라고 불렀다. ‘빙희’는 청조 이전에도 중국에 있었던 어휘였고 단순히 ‘빙상의 오락’을 가리켰다. 그러나 청대에 만주족 황제가 개최한 빙희는 성격이 특수했다. 청대의 빙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일종의 빙상 전투 훈련이자 황제의 참관하에 진행된 빙상 사열이었다.

청대 만주족의 스케이팅 관습은 청조가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겨울철 오락으로 유지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북경 시민이 된 만주족은 겨울이 되면 종종 조양문朝陽門에서 출발하여 얼어붙은 수로를 따라 활주하여 이갑二閘을 지나 로하潞河로 진입해서 북경의 동남쪽 교외 통주通州까지 가서 그곳 특산인 삭힌 두부醬豆腐를 한 사발 사들고 북경으로 돌아오곤 했다. 북경 시내에서 통주까지의 거리가 대략 20킬로미터 정도이니까 빙상으로 마라톤을 즐긴 셈이다.
청대에 해마다 빙희가 열렸던 북해는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북경 시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가추하gacuha, ?出哈’ 혹은 ‘가라하galaha, ?拉哈’는 직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이다. 또한 가추하는 청대에 만주족이 이 뼈를 던지며 노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의 만주어 사전인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가추하를 ‘노름하는 깍뚝 뼈’라고 설명했다. ‘노름’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행성 짙은 도박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 사전에서는 단순히 ‘놀이’의 의미이고, 깍뚝 뼈는 깍뚜기처럼 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뼈라는 뜻이다. 가추하를 한어로는 배식골背式骨이라고 했다. 이 놀이 도구를 만들 때 주로 양이나 돼지의 뼈를 많이 사용했다. 돼지의 관절뼈로 만든 가추하는 특히 롤로lolo라고 하고, 소나 사슴의 관절뼈로 만든 것은 로단lodan이라고 불렀다.

가추하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었으며 실내건 실외건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놀이였다. 그러나 어린이와 여성 들이 겨울철 실내에서 만주족의 쪽구들 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즐기는 것이 가추하 놀이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한어를 구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한인 통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족에게 한어를 습득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만주어가 쇠퇴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입관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로, 만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중국에 입관한 만주족이 여전히 만주어를 사용하며 만주족의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만주족이 만주어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만주어의 쇠퇴를 걱정할 만한 현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강희제 자신이 만주어·몽고어·한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기 때문에 만주족이 한어를 습득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만주어의 쇠퇴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강희제가 만주족 관원에게 한어의 습득을 강조한 것이 만주어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자언어가 타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쇠퇴했는가 발전했는가 하는 판단은 자언어가 타언어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했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 막대한 타언어가 유입되었어도 자언어가 본래 모습을 일부라도 갖추고 있으면 타언어는 자언어 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 반대로 자언어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면 타언어는 자언어의 쇠퇴와 소멸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주족이 만주어를 상실하기 전인 18세기 초기, 즉 옹정기 내지 건륭 초기 정도를 기준점으로 설정하여 만주어와 한어의 관계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한어가 반드시 만주어에 대해 공격자이고 침투자이고 상극자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한어가 만주어의 보완자였다고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만주족이 일상생활에서 만주어보다 현격히 한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 18세기 중후기 어느 시기 이전까지는 만주어에 대한 한어의 유입이 만주어를 쇠퇴시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주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주족은 한어의 유입 앞에서 피동적으로 그 세례를 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한어를 만주어 속으로 유입시키고 녹여 나가기도 했다.

만주어에 없는 한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만주어 어휘를 만드는 작업은 입관 후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그 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만주어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최고조로 증폭된 건륭기였다. 1771년(건륭 36) 출판된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鑒,Han i araha nonggime toktobuha Manju gisun i bulek? bithe』은 강희기에 출판된 『어제청문감』을 증보한 만주어 사전이지만 체례와 수록된 어휘의 수를 보면 완전히 새로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증정청문감』에는 『어제청문감』에 없는 5,000여 개의 만주어 어휘가 더 수록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기존에 없는 새로 만들어진 만주어 어휘였다. 이 외에도 건륭기에 『청문휘서淸文彙書,Manju gisun i isabuha bithe』(1751년), 『청자회전淸字會典,Manju hergen i uheri kooli bithe』(1769년), 『청문보휘淸文補彙,Manju gisun be niyeceme isabuha bithe』(1786년) 등의 만주어 사전과 문법서들이 간행되었다.

만주족이 남긴 방대한 문헌들을 검토하다 보면 모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대량의 어휘들이 만주족의 실제 언어생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 만든 만주어 어휘를 보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점차 소실되어 가는 기존의 만주어를 지키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어려워졌다. 청조는 기인의 학교 교육을 통해 만주어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조차 만주족 통치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세기 말기를 지나며 만주어는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로 풍성해졌지만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점차 사라져 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청은 만주족 고유의 국가 체제인 팔기와 중국의 국가 행정 체제를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서 결합시켰고 상이한 두 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제도의 창설과 운용 면에서 청의 또 다른 탁월한 점은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에 맞추어 입관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들을 창안한 것이었다. 내무부內務府는 그 가운데 하나로, 만주족 고유의 조직과 중국식 제도에서 각각 일부가 결합하여 명과 청 황실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기구로 등장한 것이었다.

내무부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훗날 1679년(강희 18)부터이지만, 그 조직 안에서 일하는 주체가 환관에서 보오이 니루의 보오이들로 대거 물갈이된 것은 순치제가 사망한 직후였다. 따라서 내무부가 출범한 시기를 1661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내무부가 창설된 후 십삼아문의 환관이 모두 자금성 밖으로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내무부에 부속된 하부 기구인 경사방敬事房에 남아서 황제와 황후·비빈들의 잠자리를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강희기 경사방에 남은 환관의 수는 고작 400명에 불과했다. 명 말기에 환관의 수가 10만 명에 달했음을 감안하면 청 궁정의 환관은 양적으로 그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순치제는 1653년(순치 10)에 명의 환관 조직인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을 모방하여 십삼아문十三衙門을 창설하자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왕공 대신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십삼아문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신권을 위축시키리라는 불안감이 반발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청 초기의 신하들은 만주족이건 한인이건 명의 멸망이 환관의 폐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정부패의 상징인 환관이 만주족 황실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순치제는 자신의 구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십삼아문의 지휘권을 전적으로 만주족 대신에게 부여해서 환관이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했다.

내무부는 만주어로 ‘도르기 바이타 버 우허리 카달라라 야문dorgi baita be uheri kadalara yamun(안의 일을 모두 관리하는 아문)’이라고 하며, 청대 궁정의 의식주와 관련한 온갖 잡다한 일상적 업무들을 수행하고 황실의 재정을 총괄한 기구였다. 내무부라는 한어 명칭이 제정된 것은 1679년(강희 18)이었다. 그전에 순치제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환관의 기구인 심삽아문十三衙門과 팔기의 보오이 니루booi niru, 包衣佐領, 包衣牛錄가 담당했다. 그보다 더 전인 청 태종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보오이 니루가 담당했고 그 조직을 한어로 ‘내부內府’라고도 칭했다. 즉 내부는 내무부의 전신이었다.
내부의 보오이 니루는 청 태종 홍 타이지가 장악하고 있던 상삼기上三旗,dergi ilan g?sa(즉 양황기·정황기·정백기) 예하의 하층민인 보오이들로 구성되었다. 상삼기의 보오이 니루는 내부를 구성했고, 내부가 청 궁정의 살림을 전담하면서 ‘보오이 니루’라는 조직명은 내부 혹은 훗날의 내무부와 거의 동일하게 쓰이게 되었다.

일반 관원이 황제와 공적인 영역에서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보오이들은 황제와 사적 영역에서 관계를 맺었고 사적 관계는 공적 영역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조인의 가문은 옹정제의 즉위와 함께 몰락하기 전까지 강희제의 총애와 비호 아래 남경에서 엄청난 세도가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열하에 피서산장이 세워지기 이전에, 순치기와 강희기 중반까지 황제의 북순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은 카라호톤 행궁이었다. 카라호톤은 열하의 남서쪽의 난하?河와 이손하伊遜河가 합류하는 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승덕시承德市의 난하진?河鎭이다. 카라호톤의 ‘카라’는 ‘검다’는 의미의 몽고어이고 ‘호톤’은 ‘도시’를 의미하는 몽고어 ‘호트’가 만주어화한 어휘로, 청대 한문 기록에서는 객라하둔喀喇河屯이나 객라성喀喇城으로 음사되어 쓰이거나 흑성黑城으로 의역되어 쓰였다.

열하행궁이 완성된 후 강희제의 주요 숙박지 및 몽고 왕공과의 회견지는 카라호톤에서 열하로 이동했고, 카라호톤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열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감소했을 뿐, 카라호톤은 열하 인근의 주요 도시로 계속 존속했고, 옹정기와 건륭기에는 팔기병이 배치되기도 했다. 카라호톤 행궁은 수렵을 위한 숙박지와 회견지로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그리고 궁전과 별서와 사묘로 이루어지는 구조적 측면에서 열하행궁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은 몽고 왕공의 자제들을 북경으로 데려와서 만주 자제들과 함께 교육시키고 장성한 후에 현지로 돌려보내서 부친의 직을 계승시키는 방식을 활용했다.

청은 복속된 몽고를 촐간盟과 호슌旗 단위로 세분하고, 각각의 호슌에 ‘자삭’이라는 명칭의 수장을 임명했다. 막남몽고(내몽고)는 내자삭몽고Dorgi jasak i Monggo, 內札薩克蒙古로 불렀으며, 6촐간 49호슌으로 나뉘었다. 막북몽고(외몽고)와 막서몽고는 외자삭몽고Tulergi jasak i Monggo, 外札薩克蒙古라고 불렸으며 막북몽고는 4촐간 86호슌으로, 막서몽고는 9촐간 61호슌으로 구획되었다. 자삭에게 행정과 사법상의 실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아이막部의 수장인 칸의 통합적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삭과 호슌 설치의 핵심 목적이었다.

청은 황제와 황족의 딸을 몽고의 왕공 귀족과 결혼시키고, 황제와 왕공은 몽고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동맹 관계를 강화해 갔다. 이 방식은 양자의 동맹에 효과적이었다.

청의 황제들은 몽고 왕공들을 접견한 후에, 그들이 이끌고 온 수렵단과 함께 무란위장에 가서 수렵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씨름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청의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을 다양한 신민에 맞추어 여러 형태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 황제는 만주족의 한han일 뿐만 아니라 한인에 대해서는 유가적 성왕聖王이자 황제皇帝였고, 몽고에 대해서는 칭기즈칸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었고, 티베트에 대해서는 극락정토의 불법을 현세에 펼치는 차크라바르틴轉輪法王이었다. 청 제국의 황제는 다면성simultaneity을 띠고 다양한 유형의 백성을 통치했다.
149) 청의 황제는 상이한 여러 정치체제의 통치 중심이자 왕중왕이었고, 하나의 국가 안에 공존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한 몸에 모아서 구현했다.

외팔묘는 청 정부에서 승려를 파견하고 북경의 이번원 소속의 라마인무처喇?印務處에서 승려의 월급과 자금을 지급해서 운영된 일종의 국립 사찰이었다. 열하 현지에서 외팔묘 전체를 관할하는 것은 보녕사에 주재하는 감포mkhen po,堪布였다. 감포는 티베트 불교에서 주지를 의미했다. 감포의 관할하에 외팔묘 각각의 사찰을 관할하는 것은 다-라마da lama, 達喇?였다. 다-라마는 수석을 의미하는 만주어 ‘다da’와 승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라마lama’를 합쳐 만든 명칭이었다. 12개의 사찰 외에도 열하에 건립된 소규모의 민간 사찰이 다수 있었고, 불교 사찰 외에 민간종교 시설까지 계산하면 수는 더욱 많아진다.

거시적으로 보면 외팔묘의 수많은 건물군은 중국식과 티베트식을 혼융한 새로운 건축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 외팔묘의 혼융된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국과 내륙아시아를 함께 지배하게 된 청의 제국적 지배 체제를 상징한다.

청은 준가르의 내분을 이용하여 1755년(건륭 20) 중심부인 일리(현 중국 신강성 이닝伊寧)를 공격했다. 100여 일의 전투 끝에 청은 수장인 다와치를 생포하고 준가르를 멸망시켰다. 3년 후인 1758년(건륭 23)에는 동투르키스탄 남부의 알티샤르를 정복했다. 다음 해에 청은 동투르키스탄을 신강新疆, Ice jecen으로 명명하고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준가르를 정복한 사건은 청의 역사에서 중국을 정복한 일에 버금가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준가르를 정복함으로써 청은 17세기 초 누르하치 시기부터 몽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이래 150년 만에 내몽고와 외몽고에 이어 서몽고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청의 번부藩部, tulergi golo가 완성되었다. 청과 러시아와 준가르가 각축해 오던 중앙유라시아는 이후 청과 러시아의 세력이 상충하는 장이 되었다.

외팔묘의 사찰들은 티베트 불교 세계의 주요한 사찰들이 변형된 모방품이고 축소판이었다. 보녕사는 티베트 최초의 사찰인 삼예사를 모방했고, 안원묘는 준가르 제국의 중심지인 일리의 쿨자사를 모방했으며,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의 중심지인 라싸의 포탈라궁을, 수미복수지묘는 티베트 둘째 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사를 모방했다. 그러나 외팔묘는 단순히 티베트 불교 세계의 대표 건축물들의 모방품이 아니고, 라싸와 시가체와 일리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권위들을 가져와서 열하라는 공간에 재배치한 만다라였다.

1644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에 만문 동전과 한문 동전을 따로 주조하지 않고 하나의 동전에 만문과 한문을 함께 새기는 형식으로 변화했다. 동전을 주조하는 곳도 수도와 지방 각 성의 중심지들로 다원화되었다.

한인은 동전에 새겨진 만주 문자의 의미를 모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문자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감숙 지역에서는 보천국에서 발행한 동전이 부정不淨과 사기邪氣를 막아 주는 신묘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고 앞다투어 소장하려고 해서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그 이유는 동전 뒷면에 천泉을 음사하여 새겨진 만문 ciowan의 모양새가 『삼국지』의 관운장이 휘두르던 청룡언월도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인은 때로 동전의 만주 문자를 그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청 말기에 태평천국을 통해 일시적으로 한인의 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발행된 동전에서는 만주 문자가 모두 사라졌다. 만주 문자를 없애고 한자만을 새긴 동전을 발행한 것은 만주족과 청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수립된 한인의 국가 태평천국이 자신을 표명한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자광각은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중남해中南海의 서안에 세워졌다. 자광각과 그 터는 본래 무과 시험을 치르던 시험장이었다. 건륭제는 1760년(건륭 25) 자광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짓고, 이곳을 일종의 전쟁기념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광각의 준공을 기념하여 건륭제는 바로 몇 해 전에 정복한 신강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전쟁 영웅 100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100폭의 초상화를 자광각의 네 면의 벽에 걸었다. 초상화 외에도 자광각에는 앞에서 말한 동판화와 황제가 지은 기념문, 수많은 전리품, 지도들, 황제의 전투 장비 등이 전시되었다. 자광각은 전쟁기념관이자 승전을 환영하는 연회장이었다.

시위 제도는 청대 만주족이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만주족은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한인처럼 치열하게 과거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만주족도 과거시험을 치러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만주족만의 정원을 정해 두고 만주족만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제도가 운용되었기 때문에 한인의 시험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에게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는 관직 진출 통로가 있었다. 만주족은 대대로 세습되는 팔기의 직책을 계승하거나, 자신이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관료로 진출했다. 그에 더해 시위 제도는 만주족이 관직으로 진출하고 고위 관료로 진급해 가는 지름길이었다.

북송 말기부터 관우는 국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존숭되고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 이면에는 북송이 관우를 통해 백성의 충성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북송은 거란, 여진, 서하 등 북방 민족의 위협에 계속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심을 집결시키고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된 인물이 관우였다.

관우가 중국인의 재신으로 숭상되기 시작한 시기도 북송 말기로 추정된다. 관우는 송대에 호국신으로 숭상되었지만 송이 멸망한 후 몽골이 중국을 통치했어도 그 숭상이 단절되지 않았다. 원대에 관우는 궁중의 불교 행사 때에 신단에 불교의 신과 함께 모셔졌다.

송대와 마찬가지로 명대에도 관우 신앙은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부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강화와 연계되면서 더 확산되었다.

청의 지배 민족이 만주족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악비보다 관우를 현창한 원인 외에 관우 신앙이 확산된 또 하나의 원인은 청 전기에 민간의 상업 활동이 극성기를 맞은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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