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이르러 할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분화가 진행되었다. 즉 하나의 할라가 나뉘어서 따로 거주하는 두 개 이상의 동성同姓 씨족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할라에서 분화된 씨족 집단을 무쿤muk?n이라고 했다.

모든 만주족은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은 그들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씨족 단위로 생활했던 시기의 관습이 청대 내내 지속된 때문이었다.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은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했다. 이 씨족을 여진어로 할라hala, 姓라고 했다. 할라는 하나의 씨족 집단을 가리킴과 동시에 성姓을 의미했다.

만주족이 대거 본래의 성을 축약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한족의 성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대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이후이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청 말기와 신해혁명 시기에 한인의 만주족에 대한 적대감이 급격히 커진 때문이었다.

과거에 할라는 자주 이동하면서 살았으나 농경이 발전하고 정착 생활이 늘어나면서 촌락을 구성하게 되었다. 하나의 할라가 몇 개의 촌락에 분산되어 살기도 하고, 촌락에 다른 씨족인이 섞이기도 했다. 이러한 촌락을 여진어로 가샨ga?an이라고 했다.

누르하치의 정복전에 강력히 저항하다 복속된 여진인은 기존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구성원을 개인 단위로 여러 니루에 배속시켰지만, 그 외에 다수의 여진인은 과거의 혈연 조직과 지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루로 편입되었다. 하나의 혈연 집단의 사람 수로 하나의 니루를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했고, 대개 씨족장인 할라 다hala da, 姓長나 무쿤 다muk?n da, 族長를 니루의 수장인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하나의 지연 집단 내에 몇 개의 혈연 집단이 있고 이를 합쳐서 하나의 니루를 만들면 대개 촌락장인 가샨 다ga?an da, ?長를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씨족은 여진인이 팔기로 편제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니루 속에서 존속되었다. 결국 팔기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의 일부가 아버지에서 아들과 손자로 대대손손 계승되면서 진짜 성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족의 이런 독특한 방식의 유사 성姓을 중국 학계에서는 수명성隨名姓이라고 부른다. 즉 아버지의 이름의 일부를 자식이 계승하여 마치 성처럼 쓴다는 뜻이다. 아버지 이름의 일부를 따서 아들이 성처럼 사용하다 보니 많은 한인들은 만주족의 아버지와 아들이 상이한 성을 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만주족이 성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고 이름의 첫음절이 성처럼 불리다보니 일어난 오해였던 것이다.

홍 타이지는 탕서 제사를 황실이 독점하는 조치를 반포하는 동시에 야제野祭, 즉 굿을 금지시켰다.

청 황실의 가장 중요한 샤머니즘 제사는 탕서 제사와 곤녕궁(입관 전은 청녕궁) 제사였다. 탕서 제사가 궁궐 밖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면, 곤녕궁에서 열리는 제사는 궁중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 곤녕궁에서 거행된 제사의 형식은 탕서 제사와 유사했다. 곤녕궁 제사에서는 탕서 제사와 마찬가지로 하늘신과 조상신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관음보살, 관제關帝 등 외부에서 도입된 신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 고유의 신인 조상신이나 부뚜막신jun ejen 등은 워처쿠라고 불린 반면, 외래의 신은 언두리enduri라고 불려서 양자가 구분되었다. 많은 신이 제사의 대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신은 역시 조상신이었다.

건륭제는 1747년(건륭 12)에 다양한 종류의 샤머니즘 제사의 격식과 축문들을 정리하여 『만주인의 제신祭神하고 제천祭天하는 규정서Manjusai wecere metere kooli bithe』라는 제목의 만문서를 편찬했다. 청대의 많은 만문서들이 처음부터 한문본과 함께 편찬된 것과 달리 이 책은 최초에 만문만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780년(건륭 45)에 『만주제신제천전례滿州祭神祭天典禮』라는 제목으로 한역漢譯되었다. 이런 사실은 만주족에게 샤머니즘 제사가 얼마나 강하게 고유의 전통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 주며, 건륭기의 샤머니즘 제사에 대한 황실 의례서를 만드는 일이 만주어 강화 정책과 연계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여 준다.

샤머니즘은 누르하치가 국가를 수립해 가던 초기부터 복속된 여진인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누르하치는 기병한 후 여진족의 다른 경쟁 부족을 격파한 뒤에 그들의 씨족 수호 신령을 모신 사당인 탕서tangse, 堂子를 파괴했다. 결국 자기 씨족의 수호 신령을 모신 누르하치의 탕서가 다른 모든 씨족의 탕서를 대체했다. 다만 누르하치 편에 동참한 부족은 자신들의 신령을 모시는 것이 인정되었다.

조선어의 ‘거덜’과 같은 뜻의 어휘인 만주어 ‘쿠툴러kutule’도 몽고어 ‘쿠투치’로부터 유래했다. 쿠툴러는 몽고어 쿠투치와 마찬가지로 ‘말을 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용어는 만주어에서 동사형 어미 ‘?mbi’와 결합하여 ‘말을 끈다’는 의미의 동사형 ‘쿠툴럼비kutulembi’로도 쓰였다. 한문으로는 고도륵庫圖勒 혹은 고독립孤獨立이라고도 음사했고 때로는 의역하여 근마인?馬人, 사졸?卒, 공마노控馬奴, 근역?役 등으로 쓰기도 했다. 『만문노당』에서 쿠툴러를 때로는 쿠투시kutusi라고도 썼다. 아마도 몽고어 쿠투치의 원래 발음이 만주어에 강하게 남아 있는 현상일 것이다.
만주족의 쿠툴러도 조선의 거덜처럼 기본적으로는 말을 관리하고 끄는 일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기병 위주의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쿠툴러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조선의 거덜보다 훨씬 복잡하고 컸다.

조선 시대에 말을 끄는 하인을 ‘거덜’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는 ‘구종驅從’ 혹은 ‘구종배驅從陪’라고 했다. 조선의 사복시司僕寺에서 말 관리를 담당하던 종7품의 잡직 종사자들도 거덜이라고 했는데, 이들의 정식 관칭은 견마배牽馬陪였다. 이들 거덜들은 평소에 말을 관리하다가 궁중의 귀인이나 상전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면 말고삐를 잡고 행차의 앞에서 ‘물렀거라’를 외치며 위세를 부렸다. 때로는 이들이 공무에 개입하여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건륭제는 해마다 겨울에 북경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북해北海에서 팔기군의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빙희?嬉’라고 불렀다. ‘빙희’는 청조 이전에도 중국에 있었던 어휘였고 단순히 ‘빙상의 오락’을 가리켰다. 그러나 청대에 만주족 황제가 개최한 빙희는 성격이 특수했다. 청대의 빙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일종의 빙상 전투 훈련이자 황제의 참관하에 진행된 빙상 사열이었다.

청대 만주족의 스케이팅 관습은 청조가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겨울철 오락으로 유지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북경 시민이 된 만주족은 겨울이 되면 종종 조양문朝陽門에서 출발하여 얼어붙은 수로를 따라 활주하여 이갑二閘을 지나 로하潞河로 진입해서 북경의 동남쪽 교외 통주通州까지 가서 그곳 특산인 삭힌 두부醬豆腐를 한 사발 사들고 북경으로 돌아오곤 했다. 북경 시내에서 통주까지의 거리가 대략 20킬로미터 정도이니까 빙상으로 마라톤을 즐긴 셈이다.
청대에 해마다 빙희가 열렸던 북해는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북경 시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가추하gacuha, ?出哈’ 혹은 ‘가라하galaha, ?拉哈’는 직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이다. 또한 가추하는 청대에 만주족이 이 뼈를 던지며 노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의 만주어 사전인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가추하를 ‘노름하는 깍뚝 뼈’라고 설명했다. ‘노름’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행성 짙은 도박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 사전에서는 단순히 ‘놀이’의 의미이고, 깍뚝 뼈는 깍뚜기처럼 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뼈라는 뜻이다. 가추하를 한어로는 배식골背式骨이라고 했다. 이 놀이 도구를 만들 때 주로 양이나 돼지의 뼈를 많이 사용했다. 돼지의 관절뼈로 만든 가추하는 특히 롤로lolo라고 하고, 소나 사슴의 관절뼈로 만든 것은 로단lodan이라고 불렀다.

가추하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었으며 실내건 실외건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놀이였다. 그러나 어린이와 여성 들이 겨울철 실내에서 만주족의 쪽구들 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즐기는 것이 가추하 놀이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한어를 구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한인 통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족에게 한어를 습득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만주어가 쇠퇴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입관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로, 만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중국에 입관한 만주족이 여전히 만주어를 사용하며 만주족의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만주족이 만주어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만주어의 쇠퇴를 걱정할 만한 현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강희제 자신이 만주어·몽고어·한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기 때문에 만주족이 한어를 습득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만주어의 쇠퇴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강희제가 만주족 관원에게 한어의 습득을 강조한 것이 만주어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자언어가 타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쇠퇴했는가 발전했는가 하는 판단은 자언어가 타언어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했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 막대한 타언어가 유입되었어도 자언어가 본래 모습을 일부라도 갖추고 있으면 타언어는 자언어 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 반대로 자언어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면 타언어는 자언어의 쇠퇴와 소멸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주족이 만주어를 상실하기 전인 18세기 초기, 즉 옹정기 내지 건륭 초기 정도를 기준점으로 설정하여 만주어와 한어의 관계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한어가 반드시 만주어에 대해 공격자이고 침투자이고 상극자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한어가 만주어의 보완자였다고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만주족이 일상생활에서 만주어보다 현격히 한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 18세기 중후기 어느 시기 이전까지는 만주어에 대한 한어의 유입이 만주어를 쇠퇴시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주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주족은 한어의 유입 앞에서 피동적으로 그 세례를 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한어를 만주어 속으로 유입시키고 녹여 나가기도 했다.

만주어에 없는 한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만주어 어휘를 만드는 작업은 입관 후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그 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만주어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최고조로 증폭된 건륭기였다. 1771년(건륭 36) 출판된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鑒,Han i araha nonggime toktobuha Manju gisun i bulek? bithe』은 강희기에 출판된 『어제청문감』을 증보한 만주어 사전이지만 체례와 수록된 어휘의 수를 보면 완전히 새로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증정청문감』에는 『어제청문감』에 없는 5,000여 개의 만주어 어휘가 더 수록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기존에 없는 새로 만들어진 만주어 어휘였다. 이 외에도 건륭기에 『청문휘서淸文彙書,Manju gisun i isabuha bithe』(1751년), 『청자회전淸字會典,Manju hergen i uheri kooli bithe』(1769년), 『청문보휘淸文補彙,Manju gisun be niyeceme isabuha bithe』(1786년) 등의 만주어 사전과 문법서들이 간행되었다.

만주족이 남긴 방대한 문헌들을 검토하다 보면 모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대량의 어휘들이 만주족의 실제 언어생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 만든 만주어 어휘를 보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점차 소실되어 가는 기존의 만주어를 지키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어려워졌다. 청조는 기인의 학교 교육을 통해 만주어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조차 만주족 통치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세기 말기를 지나며 만주어는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로 풍성해졌지만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점차 사라져 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청은 만주족 고유의 국가 체제인 팔기와 중국의 국가 행정 체제를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서 결합시켰고 상이한 두 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제도의 창설과 운용 면에서 청의 또 다른 탁월한 점은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에 맞추어 입관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들을 창안한 것이었다. 내무부內務府는 그 가운데 하나로, 만주족 고유의 조직과 중국식 제도에서 각각 일부가 결합하여 명과 청 황실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기구로 등장한 것이었다.

내무부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훗날 1679년(강희 18)부터이지만, 그 조직 안에서 일하는 주체가 환관에서 보오이 니루의 보오이들로 대거 물갈이된 것은 순치제가 사망한 직후였다. 따라서 내무부가 출범한 시기를 1661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내무부가 창설된 후 십삼아문의 환관이 모두 자금성 밖으로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내무부에 부속된 하부 기구인 경사방敬事房에 남아서 황제와 황후·비빈들의 잠자리를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강희기 경사방에 남은 환관의 수는 고작 400명에 불과했다. 명 말기에 환관의 수가 10만 명에 달했음을 감안하면 청 궁정의 환관은 양적으로 그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순치제는 1653년(순치 10)에 명의 환관 조직인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을 모방하여 십삼아문十三衙門을 창설하자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왕공 대신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십삼아문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신권을 위축시키리라는 불안감이 반발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청 초기의 신하들은 만주족이건 한인이건 명의 멸망이 환관의 폐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정부패의 상징인 환관이 만주족 황실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순치제는 자신의 구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십삼아문의 지휘권을 전적으로 만주족 대신에게 부여해서 환관이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했다.

내무부는 만주어로 ‘도르기 바이타 버 우허리 카달라라 야문dorgi baita be uheri kadalara yamun(안의 일을 모두 관리하는 아문)’이라고 하며, 청대 궁정의 의식주와 관련한 온갖 잡다한 일상적 업무들을 수행하고 황실의 재정을 총괄한 기구였다. 내무부라는 한어 명칭이 제정된 것은 1679년(강희 18)이었다. 그전에 순치제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환관의 기구인 심삽아문十三衙門과 팔기의 보오이 니루booi niru, 包衣佐領, 包衣牛錄가 담당했다. 그보다 더 전인 청 태종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보오이 니루가 담당했고 그 조직을 한어로 ‘내부內府’라고도 칭했다. 즉 내부는 내무부의 전신이었다.
내부의 보오이 니루는 청 태종 홍 타이지가 장악하고 있던 상삼기上三旗,dergi ilan g?sa(즉 양황기·정황기·정백기) 예하의 하층민인 보오이들로 구성되었다. 상삼기의 보오이 니루는 내부를 구성했고, 내부가 청 궁정의 살림을 전담하면서 ‘보오이 니루’라는 조직명은 내부 혹은 훗날의 내무부와 거의 동일하게 쓰이게 되었다.

일반 관원이 황제와 공적인 영역에서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보오이들은 황제와 사적 영역에서 관계를 맺었고 사적 관계는 공적 영역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조인의 가문은 옹정제의 즉위와 함께 몰락하기 전까지 강희제의 총애와 비호 아래 남경에서 엄청난 세도가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열하에 피서산장이 세워지기 이전에, 순치기와 강희기 중반까지 황제의 북순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은 카라호톤 행궁이었다. 카라호톤은 열하의 남서쪽의 난하?河와 이손하伊遜河가 합류하는 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승덕시承德市의 난하진?河鎭이다. 카라호톤의 ‘카라’는 ‘검다’는 의미의 몽고어이고 ‘호톤’은 ‘도시’를 의미하는 몽고어 ‘호트’가 만주어화한 어휘로, 청대 한문 기록에서는 객라하둔喀喇河屯이나 객라성喀喇城으로 음사되어 쓰이거나 흑성黑城으로 의역되어 쓰였다.

열하행궁이 완성된 후 강희제의 주요 숙박지 및 몽고 왕공과의 회견지는 카라호톤에서 열하로 이동했고, 카라호톤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열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감소했을 뿐, 카라호톤은 열하 인근의 주요 도시로 계속 존속했고, 옹정기와 건륭기에는 팔기병이 배치되기도 했다. 카라호톤 행궁은 수렵을 위한 숙박지와 회견지로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그리고 궁전과 별서와 사묘로 이루어지는 구조적 측면에서 열하행궁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은 몽고 왕공의 자제들을 북경으로 데려와서 만주 자제들과 함께 교육시키고 장성한 후에 현지로 돌려보내서 부친의 직을 계승시키는 방식을 활용했다.

청은 복속된 몽고를 촐간盟과 호슌旗 단위로 세분하고, 각각의 호슌에 ‘자삭’이라는 명칭의 수장을 임명했다. 막남몽고(내몽고)는 내자삭몽고Dorgi jasak i Monggo, 內札薩克蒙古로 불렀으며, 6촐간 49호슌으로 나뉘었다. 막북몽고(외몽고)와 막서몽고는 외자삭몽고Tulergi jasak i Monggo, 外札薩克蒙古라고 불렸으며 막북몽고는 4촐간 86호슌으로, 막서몽고는 9촐간 61호슌으로 구획되었다. 자삭에게 행정과 사법상의 실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아이막部의 수장인 칸의 통합적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삭과 호슌 설치의 핵심 목적이었다.

청은 황제와 황족의 딸을 몽고의 왕공 귀족과 결혼시키고, 황제와 왕공은 몽고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동맹 관계를 강화해 갔다. 이 방식은 양자의 동맹에 효과적이었다.

청의 황제들은 몽고 왕공들을 접견한 후에, 그들이 이끌고 온 수렵단과 함께 무란위장에 가서 수렵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씨름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청의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을 다양한 신민에 맞추어 여러 형태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 황제는 만주족의 한han일 뿐만 아니라 한인에 대해서는 유가적 성왕聖王이자 황제皇帝였고, 몽고에 대해서는 칭기즈칸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었고, 티베트에 대해서는 극락정토의 불법을 현세에 펼치는 차크라바르틴轉輪法王이었다. 청 제국의 황제는 다면성simultaneity을 띠고 다양한 유형의 백성을 통치했다.
149) 청의 황제는 상이한 여러 정치체제의 통치 중심이자 왕중왕이었고, 하나의 국가 안에 공존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한 몸에 모아서 구현했다.

외팔묘는 청 정부에서 승려를 파견하고 북경의 이번원 소속의 라마인무처喇?印務處에서 승려의 월급과 자금을 지급해서 운영된 일종의 국립 사찰이었다. 열하 현지에서 외팔묘 전체를 관할하는 것은 보녕사에 주재하는 감포mkhen po,堪布였다. 감포는 티베트 불교에서 주지를 의미했다. 감포의 관할하에 외팔묘 각각의 사찰을 관할하는 것은 다-라마da lama, 達喇?였다. 다-라마는 수석을 의미하는 만주어 ‘다da’와 승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라마lama’를 합쳐 만든 명칭이었다. 12개의 사찰 외에도 열하에 건립된 소규모의 민간 사찰이 다수 있었고, 불교 사찰 외에 민간종교 시설까지 계산하면 수는 더욱 많아진다.

거시적으로 보면 외팔묘의 수많은 건물군은 중국식과 티베트식을 혼융한 새로운 건축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 외팔묘의 혼융된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국과 내륙아시아를 함께 지배하게 된 청의 제국적 지배 체제를 상징한다.

청은 준가르의 내분을 이용하여 1755년(건륭 20) 중심부인 일리(현 중국 신강성 이닝伊寧)를 공격했다. 100여 일의 전투 끝에 청은 수장인 다와치를 생포하고 준가르를 멸망시켰다. 3년 후인 1758년(건륭 23)에는 동투르키스탄 남부의 알티샤르를 정복했다. 다음 해에 청은 동투르키스탄을 신강新疆, Ice jecen으로 명명하고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준가르를 정복한 사건은 청의 역사에서 중국을 정복한 일에 버금가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준가르를 정복함으로써 청은 17세기 초 누르하치 시기부터 몽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이래 150년 만에 내몽고와 외몽고에 이어 서몽고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청의 번부藩部, tulergi golo가 완성되었다. 청과 러시아와 준가르가 각축해 오던 중앙유라시아는 이후 청과 러시아의 세력이 상충하는 장이 되었다.

외팔묘의 사찰들은 티베트 불교 세계의 주요한 사찰들이 변형된 모방품이고 축소판이었다. 보녕사는 티베트 최초의 사찰인 삼예사를 모방했고, 안원묘는 준가르 제국의 중심지인 일리의 쿨자사를 모방했으며,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의 중심지인 라싸의 포탈라궁을, 수미복수지묘는 티베트 둘째 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사를 모방했다. 그러나 외팔묘는 단순히 티베트 불교 세계의 대표 건축물들의 모방품이 아니고, 라싸와 시가체와 일리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권위들을 가져와서 열하라는 공간에 재배치한 만다라였다.

1644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에 만문 동전과 한문 동전을 따로 주조하지 않고 하나의 동전에 만문과 한문을 함께 새기는 형식으로 변화했다. 동전을 주조하는 곳도 수도와 지방 각 성의 중심지들로 다원화되었다.

한인은 동전에 새겨진 만주 문자의 의미를 모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문자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감숙 지역에서는 보천국에서 발행한 동전이 부정不淨과 사기邪氣를 막아 주는 신묘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고 앞다투어 소장하려고 해서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그 이유는 동전 뒷면에 천泉을 음사하여 새겨진 만문 ciowan의 모양새가 『삼국지』의 관운장이 휘두르던 청룡언월도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인은 때로 동전의 만주 문자를 그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청 말기에 태평천국을 통해 일시적으로 한인의 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발행된 동전에서는 만주 문자가 모두 사라졌다. 만주 문자를 없애고 한자만을 새긴 동전을 발행한 것은 만주족과 청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수립된 한인의 국가 태평천국이 자신을 표명한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자광각은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중남해中南海의 서안에 세워졌다. 자광각과 그 터는 본래 무과 시험을 치르던 시험장이었다. 건륭제는 1760년(건륭 25) 자광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짓고, 이곳을 일종의 전쟁기념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광각의 준공을 기념하여 건륭제는 바로 몇 해 전에 정복한 신강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전쟁 영웅 100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100폭의 초상화를 자광각의 네 면의 벽에 걸었다. 초상화 외에도 자광각에는 앞에서 말한 동판화와 황제가 지은 기념문, 수많은 전리품, 지도들, 황제의 전투 장비 등이 전시되었다. 자광각은 전쟁기념관이자 승전을 환영하는 연회장이었다.

시위 제도는 청대 만주족이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만주족은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한인처럼 치열하게 과거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만주족도 과거시험을 치러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만주족만의 정원을 정해 두고 만주족만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제도가 운용되었기 때문에 한인의 시험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에게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는 관직 진출 통로가 있었다. 만주족은 대대로 세습되는 팔기의 직책을 계승하거나, 자신이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관료로 진출했다. 그에 더해 시위 제도는 만주족이 관직으로 진출하고 고위 관료로 진급해 가는 지름길이었다.

북송 말기부터 관우는 국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존숭되고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 이면에는 북송이 관우를 통해 백성의 충성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북송은 거란, 여진, 서하 등 북방 민족의 위협에 계속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심을 집결시키고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된 인물이 관우였다.

관우가 중국인의 재신으로 숭상되기 시작한 시기도 북송 말기로 추정된다. 관우는 송대에 호국신으로 숭상되었지만 송이 멸망한 후 몽골이 중국을 통치했어도 그 숭상이 단절되지 않았다. 원대에 관우는 궁중의 불교 행사 때에 신단에 불교의 신과 함께 모셔졌다.

송대와 마찬가지로 명대에도 관우 신앙은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부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강화와 연계되면서 더 확산되었다.

청의 지배 민족이 만주족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악비보다 관우를 현창한 원인 외에 관우 신앙이 확산된 또 하나의 원인은 청 전기에 민간의 상업 활동이 극성기를 맞은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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