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등이 만몽 영유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절실한 현안이 있고, 그것이 또한 일본의 국운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본의 국운을 결정하는 과제였던가.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거점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 통치와 방공(防)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연관되어 있어 일련의 문제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만몽 영유를 달성하면이 과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국내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외 진출에 의존할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작동하고 있었다. - P43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에서 군부가 정부를 끌고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실제 여론이 정부보다도 오히려 군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군부가 정부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정부를편달했던 것이다"라는 관찰이 있을 정도로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우선 1929년 가을 이래 세계공황에 의해 "자본주의 일본의 국민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 - P85

다라" 국민이 만몽에서 그에 대한 해결을 구했다는 경제적 배경을 들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장쭤린 폭살 사건으로 만몽 문제를 단번에해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군부가 "앞으로는 반드시 여론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여론을 환기시킬까를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를 도모하면서 매우 정력적으로 여론 조작을 추진한 것도 한 원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는 사회민중당도 만주사변 지지를 결의하고, 12월11일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에 의해 시데하라 외교가 종언을 맞이하는 등 사태는 급전되었고, 만몽 처리에 관해서는 관동군이 주도권을장악하게 되었다. - P86

만주청년연맹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만몽 자유국 건설 강령>을 제출했다. 거기서는 ① 둥베이 4성의 철저한 문호개방, ②현주 각 민족협화의 취지에 의해 자유평등을 지향하고, 현 주민으로 자유국민을 구성한다. ③ 군벌을 배제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로다스리며 병란이 잦은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하여 둥베이 4성의 경제적 개발을 철저히 한다는 것 등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 민족협화와만몽 독립국가 건설이 동일한 하나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자유‘에서 ‘자유‘란 "자유주의와는 다른, 각 민족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하여" 철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재만 일본인이 국적을 변경하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했던 것이다. - P116

다이호카이는 총 30명 남짓으로, 만주청년연맹과는 달리 대외적 선전활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모임으로서의 강령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어떤 주장이나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는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가사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사상에 공명하는 자들의 동지적 결합이라는 색채가 점차 농후해졌는데, 기아시아부흥사상과 불교적 신앙이 그 근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색인종의 해방‘, ‘세계의 도의적 통일‘ 등을 강령으로 내건 고치샤의 기관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가사기는 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국가의 목적과 이상은 이법(理法)을 체현하는 데에 있다"라고 논하고 있다. - P120

"만주사변은 구동북 군벌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 군벌의 붕괴는 그에 수반된 결과로서 수백만 명의 만몽 제민족과 3천만 남짓한 중화민중을 반봉건의 철쇄로부터 해방시켰고, 더군다나 이 해방은 바로 만주사회의 아시아적 본질을 각성시켜, 전통적 생활사상과 자치적 기능에 의해 새로이 왕도국가를 건설하게되었다. 그 때문에 왕도국가의 건설은 역사적·사회적 필연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시아 민족에게 왕도사상은 전통적으로 사회생활의 이상으로서 살아 있기 때문에, 구군벌의 철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봉건적인 사회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도국가 건설이 민중자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선언은 이처럼 만주 왕도국가 건설의 필연성을 주장한 후, 나아가왕도연방의 건설을 제창하고 있다. "만주 왕도국가의 건설은 반드시만주인민을 위한 낙토가 아니고, 또한 단지 일본제국의 생명선도 - P136

아니며, 하물며 파시즘의 연기장(場)은 더더욱 아니고, 지금 바로태평양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세계인류 생존전에 임해 우리 아시아 왕도사회의 자존을 확보해야 할 유일무이의 세력인 왕도연방의 모체가되어야 할 사명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 P137

만주국은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그 건국의 동기와 이념의 표명에 있어서 중화민국과의 이질성 · 대극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거꾸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승인과 일본의 기존권익 확보의필요성에서도 중화민국과의 국가적 계승성 (state succession)을 부정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화민국에 대해 단절성과 연속성이라는 상 - P143

반되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여기에 만주국의 모반(母)이라 할 ‘출생‘에 뿌리내린 특징이 보이며, 또한 그것이 만주국의 건국이념과 국제 자체를 크게 규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44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일만 정위이건, 일만 비율이건, 총무청 중심주의건, 내면 지도건 모두 국법상의 권한과 사실상의권한이라는 양면성을 표상하면서도 그 어긋남을 호도하기 위한 미봉책이며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일·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푸이는 자신과 천황을 정신일체로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불충이라는 낙인을 들고 나옴으로써 일계 관리와 관동군을 견제할수 있기를 바랐다. 천황에 대한 재만 일본인의 충성심을 역이용했던것이다.
그러나 푸이의 전략은 반드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일계 관리와 관동군 군인들에게 푸이를 천황과 동일시해야 할 필연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만주국의 제제를 천황제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에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천황제의 황실에 대응하여 제실이 만들어졌고, 국문장에 대응하여 제제 실시 후 일본식으로 난화(花)가 문장이 되었다. 이외에 궁성(宮城)에 대응한 제궁(宮), 행행(行)에 대응한 순수 나중에 순행), 어진영(御眞)에 대응한 어용(御容: 나중에 어영御影), 황위에 대응한 제위, 황후에 대응한 제후라는 식으로 만주국제제는 천황제의 모조)로서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 P255

본래 사령관 "마음대로 군대를 진퇴시키는 것은 사형에 처한다"라는 육군 형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만주사변을 일으킨 혼조 시게루 사령관 이하 관동군 참모들은 군법회의에서 심문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조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남작을 수여받은 데다시종무관장의 중책에 임명되고, 이시하라 등에 대해서도 진급 서훈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율과 명령계통을 무시하더라도결과만 좋다면 상을 받는다는 풍조가 군부 막료 사이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견 군인들의 공명심은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을 취하려고 내몽 공작과 화북에 대한 정치적 · 군사적 진출로 내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풍조는 이윽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講橋)사건의 발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 P275

일. 만 관계가 진정으로 새로운 이념하에서 독자적인 국제관계를 창출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 적합한 개념과 체계로써 구미의 정치학이나 법률학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설명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구미의 정치학과 법률학에서 말하는 ‘괴뢰국가의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시아 역사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고 지적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시아 역사 자체"란 도대체 어디의, 어떤 역사란 말인가. 건국 이래 일관되게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지탄해 왔던 중화민국과 삼십 몇 만이나 되는 반만항일군 전사들, 그리고 앞에서 든 겐코쿠대학의 중국인 학생은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아시아를 거론할 때 우리들
일본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아시아 담론을 기만의 방패로삼아 왔다. 만약 자신의 삶을 경멸할 생각이 없다면 21세기에는 이러한 ‘아시아‘라는 담론으로 자신과 타자를 함께 속이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생각한다. - P334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시대에 일본인=‘동양궤이즈(東洋鬼구)‘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얼웨이즈(鬼)‘로서 전후에는 참혹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귀국도 할 수없어 11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주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은 일본인 다음가는 "만주국 중요 구성분자"로서 국방의 책무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징병 · 징용되어 중국·남방전선에 동원됨으로써 전범이 되거나 시베리아에 억류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일본국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보호나 보상의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 P399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은, 중국이 만주사변 이래 일관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주권성을 부인해온, ‘위(가짜)국가‘로서의 만주국을 괴멸시키고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항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에 중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이 만주국을 ‘위국가‘가 아니라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 혹은 신중국의 성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정권과 국가의 정통성과도 관련되는 미묘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데, 동아시아 세계의 전후를 생각하는 데 조선반도에서의 만주국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하다. - P408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외에도, 최규하 대통령 등의 대동학원 출신자, 강영훈 총리나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등의 겐코쿠대학 출신자 등, 만주국에서 육성된 인재가 전후 한국 정계의 주요 인물이었던 시기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친일파‘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와 뒤얽혀 한국에서 앞으로도논란이 될 터인데,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에 비해 만주국을 거친 사람들 쪽이 자신의 능력을 살려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은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통해 반만항일전쟁을 지도하여 승리했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고, 원래 김일성이라는 이름 자체가젠다오 지방의 조선인사회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상의 민족영웅의름이기도 한 것처럼, 만주와의 관련은 민족적 심성에 깊이 뿌리내리고있는 측면이 있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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