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 토르구트에게 물자와 유목지를 지급했지만 그에 비할 수 없이 막대한 상징적 소득을 얻었다. 1771년 토르구트의 귀환은 세계의 군주를 자임하던 건륭제의 자존감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청의 국력과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먼 곳의 사람들이 귀순하여 찾아오게 만드는 것, 즉 회유원인懷柔遠人은 천하를 통치하는 제왕의 덕목이었고 국가의 부강함을 입증해 주는 증표였다. 토르구트가 러시아를 버리고 자진해서 청에 귀순해 온 것은 건륭제의 입장에서 회유원인의 실현이고 청의 성세를 입증해 주는 보증서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토르구트가 귀환한 일리 일대가 귀환 당시 청의 영역이었고 현재 중국의 영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토르구트와 그들의 본령이었던 서몽고 오이라트와의 관계는 무시하고 준가르 제국의 의미를 축소하며 토르구트가 그들의 조국인 청에 귀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추어 재단하는 환원론teleology적 시각이며, 현재와 과거를 착종시킨 시대착오적anachronism인 서술이다. 이런 시각과 서술로는 토르구트의 역사만이 아니라 중국의 변강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에카테리나 2세의 식민지배 정책으로 인해 토르구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다. 정치와 행정의 자치권은 러시아에 의해 박탈당했고 가축을 유목하는 초지도 잠식당했다. 이들은 러시아로부터 탈출했다.
토르구트의 탈출은 단순히 러시아 변경의 일개 부족의 이탈로 그친 문제가 아니었다. 토르구트의 탈출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해도 이들이 아무런 저지 없이 러시아 변경을 빠져나간 사건은 러시아 변경의 방어선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부족민들을 약탈했다. 러시아인들은 1650년 흑룡강 상류역의 다구르인 거주지인 약사Yaksa, 雅克薩에 알바진 요새를 세우고 흑룡강 연안의 부족민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야삭이라고 부른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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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입관 후 수십 년간에 걸쳐 중국을 정복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에서 다수의 병력을 원거리의 동북방 흑룡강 유역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침입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청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소규모 병력을 동원하고 현지의 부족민을 병력으로 활용하며 때로는 조선군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은 순치기에만 1652년부터 1660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수백 명 내지 1,000여 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흑룡강 유역 곳곳에서 러시아인을 공격했고 부족민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 가운데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참전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후 만주 지역의 북방은 안정된 상황으로 진입했지만 청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족민을 팔기로 편제하는 정책을 계속 진행시켰다. 시버족에 대한 지배권을 코르친으로부터 이양받아 팔기로 편제한 것도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준가르의 본거지였던 일리 일대는 인구가 텅 비어 버린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일리는 청이 신강과 몽고를 영유하기 위해서는 비워 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리는 신강의 북부를 제어하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그 북동쪽에 있는 타르바가타이(현 신강의 탑성塔城)와 호응하여 몽고의 알타이 지역과 호브드(현 몽골국의 지르갈란투)까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다. 청은 1762년(건륭 27) 밍슈이ming?ui, 明瑞를 일리 장군에 임명하여 일리에 혜원성惠遠城을 건설했고 그 인근에 안원성安遠城과 수정성綏定城 등을 계속 건설해 갔다. 그리고 이 주둔지들에 파견할 병사를 선발하여 배치하기 시작했다. 몽고의 차하르, 솔론, 다구르가 일리 일대에 주둔군으로 영구 파병되었고 심지어 한인 군대인 녹영綠營에서도 주둔군이 선발되었다. 시버족도 영구 파병군으로 선발되었다.

시버족은 병역의 의무 외에 자신들이 먹고 살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을 해야 했다. 이주 초기에는 정부에서 정착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을 제공했지만 그것은 한정된 기간에 국한되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주둔병은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군사 의무와 경작을 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버족은 주로 벼를 재배하고 목축업도 겸하며 일리강 유역을 개발했다. 더욱이 시버족은 신강 남부의 호탄, 카쉬가르 등 무슬림 지역에 있는 주둔지에 3년씩 파견 근무를 나가야 했다. 시버족에게 부과된 임무는 상당히 과중했다. 시버족은 이주 후에 만주팔기와 몽고팔기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버영錫伯營, Sibe k?waran으로서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유지했고 일리강 남안의 시버족 영역인 찹찰에서 집단 거주했다. 이렇게 분리되고 고립된 거주 형태는 시버족이 만주어를 모어로 유지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영제營制가 와해되고 민간인으로 재편되기 전까지 청의 서북 변강을 수비하는 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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