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저자가 가부장제 등에 의한 여성들의 지난한 싸움에 대한 역사를 왜 다루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선사학과 고고학에서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사회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함임을 어느정도 이해했다.

남자는 물론 여자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역사와 선사시대에서 각자의 역할을 복원해야 한다. 지난 60여년간 여성사 연구에서 전념하는 과제는 ‘여성들을 보이게하라‘는 것이다. 여성 역사가 미셸 페로의 주장처럼, 여성사는 이러한 "특수성의 실체에 관해 연구해야 할 것이다." 1960년대까지 여성에 대한 가설은 대부분이 남성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철학가이자 심리분석학자인 모니크다비드-메나르의 표현을 가져다 쓴다면, "놀랍도록 반역사적‘이었다. 이는 극소수 여성이 학문 분야의 연구자나작가"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대학 교육을 받았던 것과 분명 - P277

히 관련이 있다. 20세기가 될 무렵 아주 조용히 등장한 여성사는 영미 역사가들의 연구와 1960년대 말에 일어난 사회운동 덕분에 미국에서 먼저 발달했고 뒤이어 유럽에서도발달하게 된다. - P278

조앤 스콧 이후 거의 30여 년이 지났을 때, 여성역사학자 이사벨 에르노는 "여성사와 젠더사는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 공헌에 대해서도 인정받지 못했다"고하면서, 이 작업에 맞부딪히는 저항이 너무 세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 작업은 너무 유토피아적인 걸까, 아니면 저항 요소가 너무 강해서 실현되기 어려운 걸까?" 역사에 대한해석은 우리가 놓인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에르노가 제안한 것처럼, "하나로 통제된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류학적 접근과 학제 간 접근을 기반으로 반론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연구할 필요가있다. 우리는 에르노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미력하나마 우리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 P280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더가까운 성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은 특히나젠더 고고학이 해야 할 작업이다.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이제 틈이 벌어졌다. 그 틈은 여성이 역사 안에서 올바른 자리를 되찾기 전에는 닫히지 않을 것이다.
선사학은 이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부장제가 - P281

근본적인 명분을 찾고자 하는 먼 과거의 심연을 선사학이탐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정당성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지식이 많아질수록 가부장제에 인류학적 근거가 전혀 없음이 드러난다. 가부장제는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 만큼 깊이 뿌리 내리고 있지만, 기준을 바꿔서 가장 오래된 사회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젠더 사이의 위계화가 사실은 편견에 근거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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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3]

한나라 효선제가 황태자가 유약하고 유학을 좋아하기만 하여 등용한 관리들이 ‘문’에 치우쳐 있어 비판하였더니 이에 온공이 대답한 말이다.

온공이 말하였다.
왕도와 패도는 도가 다르지 않아서 옛날 삼대가 융성할 때에 예약과 정벌이 하늘로부터 나오면 이것을 왕도라 이르고, 천자가 유약하여 제후를 다스리지 못하는데 제후가 동맹국들을 거느려서 함께 조회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여 왕실을 높이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패자라 일렀다.
왕자나 패자가 행하는 것은 모두 인에 근본하고 의를 원조로 삼으며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이를 부리며 선한 자를 상 주고 악한 자를 벌주며 포악한 자를 막고 난을 일으키는 자를 주벌하니, 다만 명성과 지위에 높고 낮음이 있고 덕택에 깊고 얕음이 있으며 공업에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요. 흑색과 백색, 단맛과 쓴맛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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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경전이나 종교적 문헌에서 여자를 평가하는 단어는 거칠고, 절대적인 경멸을 담고 있다. 때로는 증오가 보이기도 한다.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는 어떤 존재일까? 손사래를 치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갈망하기도 하는 존재다. 여자는 얼마만큼은 사람이다. 크로마뇽 사람이 네안데르탈 사람에게 할만한 말이다. 실패한 스케치다. 동물임에 틀림이 없지만, 본질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존재다. 본능 때문에 권력을 갖기도 하고 권력에 소유되기도 한다. 항상 불완전하고, 본질에서 죄인이다. 따라서 여자를 감시하고 처벌해야 마땅하다. - P41

뇌 용량이 조금 적고 머리뼈가 조금 작다. 육체는 부드럽고지성은 생리주기에 따라 변덕스럽다. 늘 징징거리고 신경질 - P55

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히포크라테스 이후 이어진 여성에 대한 아주 흉측한 고정관념이다. 본질적으로 남성의 영역인 의학은 이런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을 영속시키고 굳히려는목적에서 고대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당화하게 된다. - P56

3대 일신교 종교부터 18세기 말과 19세기의 과학 이론,
초기 정신분석학에 이르기까지, 순수함과 부정함을 둘러싼개념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남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두려워하고, 여자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여자의 육체를 갈망하고 탐구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여자의 육체는 지속적인 평가 절하와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의 육체에 대한 인식은 다양했다. 생명을 낳기에 위대하다는 인식도 있었고, 병들고 수치스러운 존재로받아들여지기도 했다. 19세기의 의사들이 넘어서야 할 큰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 P72

수 세기동안 여성들은 ‘영원한 병자‘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점액질 체액 또는 히스테리로 평가되었다. 히스테리라는 용어는히포크라테스가 만들었다. 그는 이 단어를 ‘자궁의 질식‘이원인이 되어 신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질병이 되는 현상을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히스테리를 악마가 여성의 몸을 차지하는 현상이라고 여겼다. 19세기 초대부분 의사는 자궁이 질식하거나 과도하게 흥분해서 질병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자들은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므로 ‘정신 질환이 있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병원의 정신병동에 여자가 남자보다 많다는 것이 근거였다." - P73

이 글은 신화와 동화 속에서 남성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며, 형제자매간의 결혼, 왕들과그 딸들과의 결혼 등 근친상간과 강간이 얼마나 경시되는지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성행위에서 여성의 동의가무시되는 것도 보여준다. 《잠자는 숲속의공주》의 원작자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작품이 바로 그런 사례인데, 이 이야기는 강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82

이 동화의 끝에는 "행운이 있는 자에게 축복은 자는 동안에도 찾아온다"라는 교훈이 첨부되어 있는데, 이는 성폭행이 "축복"이며, 벌을 받지 않고 반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지배해서 여자의 쾌락이 종속되는 것은
‘심리적 할례"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런 심리적 손상과함께 음핵을 잘라내거나, 소음순의 일부 또는 전체를 자르거나, 음부를 봉합하는 신체적인 손상이 추가되기도 하는데, - P83

다윈은 교육을 통해 미래에는 평등이 올 수 있다고 보았다. 108 다윈의 저서를 전문으로 다루는 철학자이자 과학사가인 패트릭 토트는 다윈이 "여성은 모성애라는 가장 독창적이고 초기적인 형태의 사회적 본능(도덕적 감정의 기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다윈이 논리적으로 여성들에게서 인간의 감성과 윤리적 진화에 대한 미래의 희망을 두도록 이끈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 P89

<마녀>에서 쥘 미슐레는 19세기의 동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마녀사냥은 고대 이교도 의식을 근절하는 역할을 했지만, 폭력에 직면한 여성의 반란 행위였다는 것이다. 한 세기 후, 페미니스트 운동은 미슐레의 뒤를이어 이것이 사회 구조와 "가부장제 사회의 이상적인 여성상"218을 감히 위협한 사람들을 제거한 "여자 사냥"이라고 말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슨 롤랜즈가 지나치게 급진적인 페미니즘 분석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마술 - P99

에 대한 비난에서 보이는 젠더적 특성을 투영하는 유용한통찰력으로 연구하는 것, 특히 가부장제 분석과 연관시키는연구"21"를 남성 역사가들이 단념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걱정 때문인데, 마녀 사냥꾼들이 깨고 싶었던 것은 여성의독립에 대한 의지다. - P100

인류학에서 성차별주의 이념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부터 다수의 미국 인류학자들"이 인류학적사유에서 드러나는 남성 중심성에 관해 의문을 표했고, 여성을 자연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한 것을 기반으로 한 남성적지배의 합법성에도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사회 · 역사적맥락에 따라, 즉 생산 양식의 변화, 엘리트와 계급의 등장 등남녀의 성적 불평등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주로 연구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00년 뒤에 이런 시각이 등장한 것이다. 엥겔스는 사회적 요인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바뀔 수있고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주목하고, 이것을 여성의 복종과 어떤 관계인지 살피고 있다. 이런 생각은 사냥-채집 사회처럼 일부 사회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점에서 증명되고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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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선사시대 여성을 향한 몽상적인 시각

선사시대 여성들은 비어 있는 살림터에서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며 사냥꾼들이 돌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대부분 그려진다. 다큐 픽션이나 다큐멘터리는고고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하지만,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작품이 선사시대의 사냥채집 사회에서남성의 경제적, 사회적 우세를 강조하는데, 인류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여성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P25

초기 선사학자들이 접근했던 방식과 여기에서 파생된 선사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두 가지 편견과 연결되어있다. 첫 번째 편견은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고, 두 번째 편견은 인류 역사가 단일한 경로를 따라 진화하고 발달했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억지스러운 가설은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졌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대중의 상상력에 영향 - P26

을 주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19세기 중반부터 선사시대 인류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선사시대 사람들은 대형 유인원, 고릴라, 침팬지와 비슷하게행동하고, 원시적이라 인식된 ‘열등한 종족‘의 행동과 가깝다고 여겨졌다. 초기 연구자들은 선사시대의 도구에 몽둥이,
곤봉, 손가락 관절에 끼우는 쇳조각, 단검처럼 무기류의 명칭을 붙였지만, 사실 그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에 열린 만국박람회와 초기의 박물관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했다. - P27

여성 납치는 1865년 발간된 <원시적 결혼>에 처음으로등장한다. 선사시대 남성은 유아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했으며, 강간과 납치를 자행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전리품이된 여성은 ‘상품‘이 되어 교환되거나 사들여졌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성의 ‘상품 가치‘가 농경, 목축, 결혼(일부일처제)"과 함께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30만 년 이전부터 선사 인류는 복잡한 사회적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여성을 납치하는 것만으로 혈통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와 민족학자가 교환 이론"을 선호한 뒤로는 이 이론이 거부되고 있다. - P34

그러나 교환 이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는전혀 없다. 증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관습이 만약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일까 아니면 상호 협의한 것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귀중품‘이 교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선사사회에서교환품인 여성의 가치가 높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있다. 특히 출산으로 후손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즉 집단의영속을 보존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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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0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상당히 분개하며 읽게될 듯한 책이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3-11-10 10:35   좋아요 1 | URL
선사고고학을 젠더학 관점에서 쓴 책이더군요. 인류학과도 맥락이 닿아있을 듯합니다^^
 

며칠 동안 그들에 대한 공격을계속하니, 마침내 성채에 있던 사람들이 궁지에 몰렸다. 성채의 해자는생물·무생물들로 땅과 같이 평평해졌고, 부하라 징용대의 시체]로 말미암아 높아졌다. 성을 장악하고 성채에 불을 질렀다. 자신의 발을 흙에 묻히지도 않던 지체 높은 당대의 칸들과 귀족들, 술탄을 위해 일하던사람들은 비참한 포로가 되어 소멸의 바다에 익사했다. 캉클리인들 가운데 채찍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3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포로로 끌려 갔다. 반항자들이 시내에서 일소되자 성벽을 부수어] 지표면과 같이 만들고, 도시민 모두를 벌판의 기도장(namáz-gah)으로 내몰아 젊은이들을 징용대로 선발해 사마르칸트와 다부시야로 끌고 갔다. - P340

도시와 성채를 폐허나 마찬가지로 만들고 수많은 아미르와 병사들을죽인 뒤, 다음날 [108r] 79v」남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그 무리들가운데 3만 명을 職人이라는 명목으로 정하여 아들. 카툰아미르들에게나누어 주었고, 그와 같은 숫자를 징용대로 정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생명을 건진 대가로 20만 디나르가 지정 - P343

되었다. 사마르칸트에서 관직을 지닌 고관들 가운데 씨카트 알 물크(Thiqat al-Mulk)와 아미르 아미드 부주르그(Amir ‘Amid Buzurg)를 지명해 그것을 징수하도록 하고, 하나를 임명했다. 징용대 가운데 일부는 후라산으로 데리고 가고, 일부는 아들들과 함께 호라즘 쪽으로 보냈다. 그 뒤 몇 차례 더 징용대를 요구했다. 그 징용대들 가운데 목숨을 보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런 까닭으로 그 지방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칭기스칸은 그해 여름과 가을을 사마르칸트 주변에서 보냈다. - P344

"아미르들과 대인들과 많은 백성들은 위대한 신께서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지상의 모든 곳을 내게 주었다는 것은 알라! 누구라도복속하면 그 자신과 처자식들과 권속들에게는 자비가 있을 것이나, 누구라도 속하지 않고 적대와 저항을 앞세운다면 그는 처자식들과 권속들과 함께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이런 내용의 서한을 주고 진군했다.
50)제베는 주베인 (Juvain) 길을 따라갔고, 수베테이는 ‘제왕의 길‘
(shâh-rah)을 따라 잠(Jam)을 거쳐 투스로 갔다. 복속하는 곳이면 어디든 살려 두었고, 반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없애 버렸다. - P349

사신이 도착하여 칙령을 전달하자 톨루이 칸은 명령에 따라 출정했다. 그는 수완과 지모를 발휘하여 매일 형제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 친절을 베풀며 아양을 부렸고, 훌륭한 지략을통해 그들 사이를 화해시켰다. 또한 그는 임무에 적합한 사무 처리를 통해 군무를 정비하고 법령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exa그렇게 한 뒤 병사들을 모두 전투에 투입시켰고, [몽골군은) 그날로깃발을 보루 위에 꽂고 시내로 진입했다. 나프타가 담긴 병에 불을 붙여[시내의] 동리들에 던졌다. 도시 주민들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고, 골목길과 동리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인들은 격렬하게 싸워 동리를하나씩, 또 건물을 하나씩 장악하고 무너뜨리고 태웠으며, 이런 식으로해서 일주일 만에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 P358

그곳에 도착한 칭기스칸은 사신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복속하고 성벽과 성채를 허물라고 요구했다. 그곳 주민들은 성벽의 반이 아무다리아에 접해 있는 성채의 견고함에 의지하여, 또한 자신들의 용맹과 위세를 자신하여 복속하기를 거부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몽골군은] 11일째 되던 날 도시의 성문을 힘으로 열고 사람들을 모두 벌판으로 내몰아, 일정한 수를 병사들에게 분배한 뒤 모두를 죽여 버렸다. 어떤 노파는 [병사들에게] "나를 죽이지 않으면 진주를 주겠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자 "삼켜 버렸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즉시 그녀의 배를 갈라서 그 진주를 꺼냈고, 이런 까닭으로 죽은 사람들 모두의 배를 갈랐다. - P360

믿을 만한 역사서에 따르면, 술탄은 [113v] 「85r」 〔적과]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먼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과 비빈들이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재물들도 물에 던져버린 뒤 물에 뛰어들어 건너갔다고 한다. 술탄의 병사들은 모두 죽음을당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의 다른 아들들은 젖먹이에 이르기까지모두 살해되었고, 후궁에 있던 어린 여자들도 약탈해 갔다고 한다. 술탄의 재물들은 대부분 금과 은과 보석들이었기 때문에 술탄은] 그 모두를인더스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었다. 그 뒤 칭기스칸은 잠수부들에게 명령하여 강으로 들어가서 가능한 것들을 모두 건져 올리라고 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모은 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진영을 쳤다. - P371

열한 살이었던 쿠빌라이 카안과 아홉 살이었 - P379

던 훌레구 칸이 마중 나왔다. 마침 그때 나이만 지방 변경의 아이만 후이(Aîmân Hî)-일리(Hila)‘15) 강 건너편에 있는 이밀 쿠친(imil Qúchin)근처이며 위구르 지방에 가까웠다에서 쿠빌라이 카안은 토끼를 잡고훌레구 칸은 영양을 잡았다. 몽골인들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으면 그의 엄지손가락에 살코기와 비계를 발라 주는 것,
즉 ‘자미시‘ (jamishi)116)를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칭기스칸은 몸소 자미시‘를 해주었는데, 쿠빌라이 카안은 칭기스칸의 엄지손가락을 아주 부드럽게 잡았고 훌레구 칸은 강하게 잡았다. 칭기스칸은 "이놈(gatar)이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네!"라고 말했다. - P380

[칭기스칸은]노카이 일‘, 즉 개해-623 1126)년에 해당초봄에옹군 달란 쿠둑(Ongún129) Tâlân Qudaq)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상황에대해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왕자들 가운데 주치 카사르의 아들인 이게30)가있었는데, 그에게 "내 아들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는 멀리에 있는가가까이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자기 軍陣(jerge-i lashkar) 안에 있었다. [이숭게는] "2~3파르상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칭기스칸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식사를 할 때 그는 아미르들과 임석한 사람들에게 "내 아들들과 상의하고 밀담을 나누어야 할 것이 있어, 잠시 조용히 [아들들과]비밀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에 관해 논의했으면 좋겠다. 우리가따로 있을 수 있도록 자네들은 잠시 물러나 주겠는가?"라고 말했다. - P383

"오, 아들들이여!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마지막 여행을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알라! 나는 창조주의 힘과 하늘의 도움으로, 그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이제 나의 遺志는 너희들이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치켜세워 주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편안하고 풍요롭게 인생을 보내고 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우구데이 카안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유촉을 모두 마친 뒤, 이렇게 충고했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왜냐하면 왕국이 소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노라.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 법령(yásáq)를 바꾸지 말라." - P384

돼지해가을 가운뎃달 보름-624년 라마단(1227년 8~9월에 해당ㅡ에 그는보좌와 왕국을 명망 높은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덧없는 세상을 떠났다.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이 사실을 은폐했다가 그 종족이밖으로 나오자 그들 모두를 죽인 뒤, 그의 관을 모시고 귀환했다. 그것을오르두들에 운반할 때까지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였다.
부근에 있던 왕자들과 카툰들과 아미르들이 모두 모여 장례를 치렀다. - P386

[한번은 칭기스칸이 사냥을 갔는데, 이 지방의 어떤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아래 멈추었는데, 그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찼다. 그는
"이곳은 내가 묻힐 만한 곳이다. 이를 잘 표시해 두어라!"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다시 [일화를 말하자, 왕 - P387

자들과 아미르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그곳을 선정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를 묻은 바로 그해에 그 평원에서 수많은 나무와 풀이 자라나,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되어 그 안을 지나갈 수도 없으며, 처음의 그 나무와그가 묻힌 곳을 다시는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된 禁區지기(gorigchi)들조차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 P388

칭기스칸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의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는 자식들, 형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생들,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 남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부인,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며느리,
어린애들을 보호(asrâmishi)하지 않는 어른들, 연장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연소자, 종들의 마음을 멀리하는 대인들, 외부인을 맞아 주지않는 사람, 나라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강화시켜 주지 않고 법령과 규범과 현명한 방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반목으로말미암아 도둑과 사기꾼과 반도와 불법자들이 창궐하고 그들은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말과 가축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전쟁시] 선봉에 세워 타고 다니던 말들이 안식을 얻지 못해, 마침내 그 말들은 버려지고 쇠약해져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족은 혼란되고 우둔하다." - P426

"군대의 지휘관이 될 만한 사람은 스스로 배고픔과 갈증을 체험했기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행군할 때는 보조를 맞추어서 병사들이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끼거나 가축들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희들 가운데가장 약한 사람의 행보에 맞추어 행군하라!"는 속담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P431

" [술은] 어떤 지식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것들을 빼앗아 버리고, 그가 가는 길이나 하는 일을 가로막아 버린다. [지식과 기술]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마치 음식과 산해진미 (shilan)를 불에 집어 넣고 물에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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