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들을 가로지르는 운동, 즉 횡단-신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에 다양한 몸된 자연bodily natures 사이의 상호교환과 상호연결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횡단trans은 서로다른 장소들을 가로지르는 운동임을 부각하기 때문에 횡단-신체성은인간 몸, 비인간 생명체, 생태계, 화학 작용물, 그리고 여타 다른 행위자들의 종종 예측 불가능하고 반갑지 않은 작용들을 인정하는 유동적인공간을 열어 준다. 우리가 인간을 넘어서는more-than-human 세계와 인간 신체성이 맺는 물질적 상호연결을 중시하고, 동시에 물질 작용능력material agency 이더 광범위한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인간‘과 ‘환경‘이 결코 분리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20세기 후반과 - P19

21세기 초반의 복잡다단한 현실들과 씨름할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정립할 수 있다. - P20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종종 문화적 형성물과 물질세계의 교차점에서 작업하는 과학자의 도전에 직면한다. 과학은 사회·정치 이론에 근거하면서도 물질의 구성요소, 작용, 작용능력을다루기 때문에, 도발적이고, 심지어 충격적인 방법론과 재개념화를 내놓는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브뤼노 라투르는과학적·사회학적·텍스트적 지식이 서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적 삶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는 - P34

과학을 찬양하거나, 권력 게임에 임하기도 하고, 실재가 있다는 믿음을비웃기도 하지만, 이 세 가지 영역을 뒤섞으면 큰일이 난다"고 꼬집는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자연/문화 ‘하이브리드‘hybrid들은 개별 학문에 국한된 용어로는 이해될 수 없다. - P35

낸시 투아나는 주목할 만한 에세이 끈적끈적한 다공성 허리케인카트리나를 증언하기에서 유사한 혼합을 포착한다. 그녀는 바람, 비,
홍수, 살, 인종주의, 정치, 심리학, 수문학, 가난, 그리고 폴리염화비닐PVCs이 뒤섞이며 혼합되듯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사회적 실천과 자연 현상" 양자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상호작용주의 존재론interactionist ontology은 ‘끈적끈적한 다공성‘이라는 개념화로 요약된다. "살-내 살과 세계 살―의 끈적끈적한다공성이 존재한다.] 이 다공성은 우리가 세계에 속해 있고, 세계를 발생시키고, 세계 안에 존재하게 하는 경첩이다. 그것이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얇은 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끈적거린다고 부른다.
이 박막membrane들은 피부와 살, 예단과 상징적인 상상물, 습관과 신체화와 같은 다양한 유형을 지닌다." - P49

횡단-신체적 공간의 생생한 예인 독성물질로 중독된 몸은 환경주의운동과 환경보건운동, 사회정의운동이 서로 단절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이 중독된 몸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과 지속적으로 상호교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예측 불가능한 생성과 인간 지식의 한계를 동시에 고려에 넣는 인식론적 공간을상상하라고 자극하기도 한다. 독성물질에 중독된 몸은 우리가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개인이라는 탈신체적 가치와 이상에서 벗어나는 물질적·횡단-신체적 윤리를 지향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수많은 사람·종·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과 맞물려 전개되는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요구한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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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05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작하셨군요, 거리의화가 님! 이 책은 읽기에 어떠신가요? 일단 올리신 인용문들로만 보자면 결코 쉬운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포의 권력보다는 읽기에 나은것 같네요. 휴..

거리의화가 2024-02-05 09:42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짧은 인용문에도 벌써 파악하신 것 같은데요? 어쨌든 공포의 권력보다는 읽기 좋아요. 적어도 이해는 됩니다!
이 책 읽다보니 정희진 선생님 생각나더라구요. ‘횡단‘이란 개념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건수하 2024-02-05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쉽진 않겠구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해가 된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
저는 설 지나서 시작하려구요 :)
 

바투는 모든 왕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연로하고 존경받았고 또 중요했기 때문에 군주를 추대하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자신의 큰아들인 뭉케 카안에게 "다른 사람들이 바투에게가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아카이고 병들어 있다. 네가 문병을구실로 그를 서둘러 찾아가 보아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지시를따라 즉시 그곳으로 갔다. 바투는 [뭉케의] 그 같은 공로와 또한 그가 쌓은 다른 공로들로 인하여 그에게 맹서하고 그를 안의 지위에 앉혔다.
또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소르칵타니 베키는 극도의 유능함으로술두스의 군대의 문제로 쿠텐에게 어려움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쿠텐은 그들과 우애를 유지했다. 우구데이 카안의 일족이 카안위의 문제를 두고 뭉케 카안과 분쟁을 벌이고 그에 대해서 음모와 사술(詐術)을생각하고 있을 때, 쿠텐은 뭉케와 연합했고 그를 도와주었다. - P273

그는 부친의 야사와 명령을 가감하거나 개정하여 바꾸지 않은 채 온전히보전하였다. 또한 그는 "우구데이 카안의 축복받은 탐가인이 찍힌 칙령은 나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이 서명하여 통용하라!"고 지시했다.
구육 칸은 원래 몸이 약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떤 병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침부터저녁까지, 그리고 해질녘부터 동틀때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미희와 즐기는 데에 몰두했다. 이런 생활은 그의 병을 더욱 깊게 만들었으나 그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우울한 성품을 갖고 있어대화하는 데에 별 뜻이 없었다. 국사를 해결하고 결속하는 모든 처리를카닥과 친카이에게 위임했고, 선악호(好)의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맡겼다. 그의 치세에 기독교의 상황은 좋아져서, 어떠한 무슬림도그들 무리에 대해 감히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없었다. - P295

"이스칸다르(Iskandar)가 지상의 왕국 대부분을 정복했을 때 인도 방면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미르들과대신들은 복속과 복종의 정도에서 벗어나 각자 독립과 전제(專制)를 얻고자 했습니다. 이스칸다르는 당황하여 룸(Rúm)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atalis)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기 아미르들의 반역과 거역의 상황을설명하고, ‘이 문제에 대한 방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신과 함께 어떤 정원에 들어가서 뿌리가 깊은 큰 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작고 약한 묘목들을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신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신은 낙심하여 이스칸다르에게로 가서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스칸다르가 ‘네가 그에게서 본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어떤 정원으로 가서 큰 나무를 뽑고 작은 가지들을 그 자리에 심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스칸다르는 ‘그가 대답을 한 것인데 네가 이해를 못한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제적이고 강력한 아미르들을 처형시키고 그 대신 그들의 자식들을 임명했습니다."
뭉케 카안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했고, 그 반역의] 무리들을제거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26

칭기스칸은 자기 자식들에게 단합과 합심을 강조하며 "너희들이 서로 단합하는 한 행운은 너희들의 벗이 될 것이고 적들은 승리를거두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와 그의 일족은 지상의 왕국 대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그가 흥기하던 초기에 아들들에게 충고를 해주었는데, 예시를 보여 주기 위해 활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그들에게 주면서 "부러뜨려라!"고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힘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부러뜨렸다. 그는 다른[화살] 두 개를 주었는데 이 역시 쉽게 부러뜨렸다. 이런 식으로 화살의숫자를 늘려가 열 개에 이르니, 군대 안의 뛰어난 역사나 용사들도 그것을 부러뜨릴 수 없었다. 그는 "너희들의 처지는 이와 같다. 너희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한 어느 누구도 너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오랫동안왕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슬람의 술탄들이 이런식으로 행동했다면 그들의 왕조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31

‘쿨루카나 일‘ 즉 쥐해 - 662[/1264)년에 해당 - 에 그가 카안의 어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수의 군대를 배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그로 하여금 고두(tikishmishi)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그같은 경우 고두를 할 때에는 [모포로 된] 천막문을 죄인의 어깨에] 씌워 놓는데, [아릭 부케는 그런 식으로 뒤집어쓰고 고두를 했다. 그리고한참 뒤 허락이 내려지자 천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비틱치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감정과형제에 대한 사랑이 그를 흔들었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오,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가 옳았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훌레구 칸이 보낸 칭쿠르(Chingqúr)라는 사신이 그곳에 참석해 있었다. 그가 돌아가 그 상황의 모습을 그의 어전에 설명했다. 훌레구 칸은 카안의 어전으로 전갈을 보내어 "야사를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 일족을 이런 식으로 고두시키게 허락을 내려서 형 · 아우들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했다. 카안은 그 말에 동의하고
"훌레구가 옳다. 내가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 뒤 아릭 부케를 일년 동안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 P390

티무르 카안은 술마시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카안이 그에게 충고를 하고 야단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지금까지 세번이나 그를 막대기로 때렸고, 호위를 그에게 몇 명 붙여서 술을 마시지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부하라 출신으로 라디(Radi)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한 식자(識者, dânishmand)가 그를 모셨다. 그는 연금술과 마법과부적술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요술(妖術)과 술(術)로[티무르 카안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는 항상 티무르 카안과 은밀히 술을 마셨고, 그런 까닭에 [쿠빌라이] 카안은 그에게 분노했다. 아무리 그를 티무르 카안의 어전에서 멀리 떼어놓으려 해도 되지가 않았는데, 그것은 그(티무르 카인가 사교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감시인과 호위인들이 그가 술마시는 것을 말리면 라디는 그에게 욕탕(bamam)으로 가자고 하고는, 욕탕지기에게 말해서 물 대신 술을 몰래도랑으로 흘려보내 (술이) 관을 통해 욕조로 들어가면 그것을 마실 수있도록 하자고 교사하였다. 케식들이 그 같은 정황을 알아채고 카안의어전에 보고했다. 카안은 라디를 강제로 그에게서 떼어놓고 어떤 구실을 대어 시키(Siki) 시로 보내 도중에 몰래 죽이라고 명령했다. - P447

티무르 카안과 그보다 한 살이 더 많은 형 카말라 사이에 보좌와 황위를 둘러싸고 이견과 언쟁이 벌어졌다. 매우 현명하고 유능한 쿠케진 카툰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첸 카안, 즉 쿠빌라이 카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라도 칭기스칸의 성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보좌에 앉혀라! 이제 너희는 각자 그분의 성훈을 말해 보라. 그래서여기에 참석한 대인들이 누가 더 잘 알고 있는지를 알도록 하라!" 티무르 카안은 매우 유창하고 달변이어서 좋은 성훈들을 깨끗한 발음ayalgu)으로 말했지만, 카말라는 말을 약간 더듬거렸고 그 방면에서는좋은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데에서는 그보다 처졌다. 모두 다 한입으로 "티무르 카안이 더 잘 알고 더 잘 말한다. 그가 왕관과 보좌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케이밍푸 시에서 ...……… 일 - ……………년에 해당"
상서로운 시점에 맞추어 그를 카안의 보좌에 앉혔는데, 이럴 경우 행해왔던 관례와 관습에 따라서 시행했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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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안은 며칠 전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는데, 톨루이 칸이그의 침소에 왔다. 무당(qâm)들은 그들이 늘 그러하듯이 주문을 외우고나무로 된 잔에 담긴 물에 그의 병명이 적힌 글]을 씻었다. 톨루이 칸은형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그 잔을 움켜잡고는 정성을 다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 영원한 신이시여! 만약 죄를 지었다면 제가 더 많이 지 - P60

었음을 아소서! 여러 지방을 정복할 때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식들을 포로로 삼아 통곡케 했습니다. 만약 [용모의 준수함과 뛰어난 재주 때문에 우구데이 카안을 데려가시는 것이라면, 제가더 준수하고 재주가 더 많습니다. 그를 용서하시고 그 대신 저를 당신에게 데려가소서!" 그는 성심을 다해서 이렇게 말하고는 병을 씻어낸 그물을 마셔 버렸고, 우구데이는 회복되었다. 그[톨루이]는 허락을 요청한 뒤 출발했으나, 며칠 뒤 병이 들어 사망하고 말았다. - P61

밤중이 되어 카안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잠자던 도중에사망하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카툰들과 아미르들은 이바카와 그의 아들이 술잔을 받쳐 들었기 때문에 필시 카안을 독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카안의 젖 친구(kukeldâsh)이자 잘라이르 종족 출신의 중요한 아미르였던 일치다이 노안은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 이바카 베키의 아들은 바우르치이고 [이제까지 줄곧 잔을 받들어 왔다. 또 카안은 항상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셨다. 무엇 때문에 카안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해야 하는가? 그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온 것이니, 다른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과도한 음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지나친 음주가 마침내 그와 같은 해악을가져오게 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 P102

아주 늙고 병든 어떤 사람이 카안의 어전에 찾아와서, 자기에게 금 200발리시를 오르탁)의 형식으로(bi-sabili ortâqi) 달라고 청원했다. [카안이] 주라고 명령하자 신하들은 "이 사람의 일생은 하루의 저녁에 다다른 셈입니다. 그는 거처도 자식도 친척도 없고, 아무도 그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카안은 "그는 일생 동안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았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 했는데, 그를 나의 궁전에서낙담케 한 뒤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고귀한 뜻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지고한 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이 같은 제왕의 지위에도 어울리지않는 일이다. 그가 청원한 것을 신속하게 그에게 주도록 하라.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희망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 P121

그가 장성하게 되자 항상 아버지와 함께 그를 모시고 있었고 좋을나 힘들 때나 도왔다. 그러나 그와 그의 형제들 즉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사이에는 항상 (156r]「128v 반목과 다툼과 불화가 벌어졌고, ····… 때문에 그와 톨루이 칸 및 [톨루이의 일족, 이 양측은 서로 일치 · 단결의길을 걸었으며, 그들은 결코 비난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출생의] 건전함(sabih)을 인정했다. - P152

어제 나는 그와 속보로 말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내가 카안과 시합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법도인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야사에처해질 수 있도록 온 것이다. 나를 처형할지 아니면 곤장을 칠지 명령을내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고그에게 더 많은 애정을 느끼며 공손하게 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보내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는 나의 형이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어찌해서 신경을 쓰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고, 마침내 카안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그는 말 아홉 필을 바치고 고두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또한 카안이 차가타이의 목숨을 용서해 주고차가타이는 면죄의 대가로 고두한다는 사실을 듣고 또 알도록 하기 위해 비틱치들은 이러한 내용을 선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오르두에 들어와 유창한 언변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더욱 합심 · 단합하게 되었고, 다른 친족들은 [카안의] 명령서(khatti farman)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의 길을 다졌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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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홍범도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
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에 ‘지배, 통치‘를 뜻하는 ‘크라시(cracy)‘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카코스가 ‘나쁜, 못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카키스토크라시를 흔히 ‘가장 저열한 자들의 지배 정도로 번역한다. 이 말은 원래 17세기영국 내전 시 왕당파에서 의회파를 공격할 때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정)‘
의 반대말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즉 아리스토크라시를 교양, 품위, 덕성 등을 갖춘 통치로 규정한 사람들이 그 반대의 의미를 담아 카키스토크라시라는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오늘날카키스토크라시는 낯선 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 말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실제로 가장 저열한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P2

국방부 당국자는 ‘독립군‘과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 양 이해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용법은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다. 식자층의 웃음을 자아낸다. 빨치산이란 말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 P16

(IIapru3aH)‘에서 온 외래어로서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무장부대를 가리킨다. ‘비정규군‘이란 뜻이다. 1919~1922년 시기에 러시아어로 작성된 문서 속에서 ‘한인 빨치산‘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면, 그 용어는 한국어의 ‘독립군‘이나 ‘의병‘을 번역하는 용어로 사용됐음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빨치산‘이란 말은 ‘독립군‘과 동의어였다. ‘빨치산‘이란 말을 ‘공산주의 무장부대‘로 사용하는 용례는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 P17

홍범도부대 440명은 6월 2일, 고려혁명군의 주도권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대한의용군주둔지를 벗어나 고려혁명군 주둔지인 자유시로 이동했다. 6월 7일에는 총군부 군대(최진동 부대)의 1/4에 해당하는 군인 70명과 국민회군사령관 안무)이 뒤를따랐다. 이러한 행동은 당면한 무장충돌의 위험으로부터 북간도 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한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간도 무장부대의 지휘관인 홍범도와 최진동은 쌍방간의 무장충돌을 우려하여 평화적인타결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전이 있기 전에는 수차례에 걸쳐 쌍방간에 긴밀한 협의가 있었다. 자유 주둔 병사대회(6월12일), 양측 분대장 이상 통합장교회의(6월 19일), 양측 병사대회(6월22일), 양측 군인대표회(6월 23~24일) 등이그것이다. 여기서 북간도 군인들은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음이 확인된다. 030이로 미뤄볼 때 국방부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의 근거가 박약함을 알 수 있다. 홍범도는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던 비극적인 무장해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그와는 반대로 평화적인 통합을 지지했다. 그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라는 주장은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 P21

일제 식민지 시대에 소련공산당은 한국독립운동의 우군이었다.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200만 금화 루블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그중에서 도합 60만 금화 루블이 실제로 지급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수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권대사 한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었다. 이승만조차 소련의 독립운동지원을 얻기 위해 밀사 이희경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국제공산당이 소집한1921년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독립운동계의 다수 단체들이 56명에 달하는 최대대표단을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서는1927년에 소련에 거주하던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발전을 위한 자연스럽고 합목적적인 선택이었다. 소련과 일본은 시종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소련과 미국은 일본에 맞서 싸운 연합국이었다. 1946년에 냉전이 개시되기 전에는 소련과 공산당은 미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독립운동의 우군이었음을이해해야 한다. - P22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주력군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그랬다.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비밀결사 운동에서나, 해외 망명지의 무장투쟁과 정치·외교 활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영토에 거주하는 혁명가가 현지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에 맞서는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국제주의 보편성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됐으리라고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은 냉전이 격화된 이후에야 생겨났음에 유의해야 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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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始가 장수를 보내어 武關을 공격하게 하자, 三輔의 鄧曄과 于匡이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에 호응해서 武關을 열어 漢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여러 縣의 大姓들이 또한 각각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 장군이라 칭하였으며, 長安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사방에서長安城 아래로 모여들었다. 9월 戊申에 군대가宣平門을 따라 들어가니, 불길이 掖庭의 承明殿에까지 미쳤다. 王莽이 불길을 피하여 宣室로 달아나서 자리를 돌려 자루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앉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德을 내려 주셨으니, 漢나라 군대가 나를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庚戌日 아침에 여러 신하들이 王莽을 부축하여 漸臺로 갔는데, 申時에 여러 군사들이 漸臺에 올라가 王莽의 머리를 베고 王莽의 몸을 분해하여 마디마다 해체하고 살점을 나누니, 다투어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王莽의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宛邑에 이르자 시장에 매다니, 백성들이 함께 때리고 혹은 그 혀를 잘라 먹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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