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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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권은 건국의 진통이 부제다.

영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세금 부과와 국경 정리, 헌법 제정을 위한 과정이 그려진다.
주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 아니면 연합된 정부를 위해 하나의 이익을 중요시할 것이냐를 위한 결정이었다.
진통의 과정이었으나 양보를 통해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영국은 아메리카 남부 주요 전투에서 중요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정보 전쟁에서 뒤쳐졌고 현지인들의 협력은 저조했다. 대륙군이 물러서기를 택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지쳐갈 뿐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행군 일정만으로 쉽게 지치고 다쳤다.
아메리카군이 치고 빠지는 기습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의 피해는 커져갔던 것이다.

패트릭 퍼거슨은 7년 전쟁에 복무한 유능한 스코틀랜드 군인 출신으로 국왕파 민병대의 감찰관으로 지명되었다.
퍼거슨의 지위를 받은 국왕파는 나인티식스부터 노스캐롤라이나 경계 지역을 오가며 적을 상대했고 1780년 여름 끝 무렵이 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북서부의 아메리카군을 모조리 쫓아냈다.
퍼거슨의 병력은 9월 12일 길버턴에 도착해서 소규모 접전에서 붙잡은 사람을 풀어주면서 반군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국왕의 병사들과 맞서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주동자들을 목매달아 죽이고 화포와 검으로 이 지역을 초토화하겠다."
이는 식민지 대항군을 분노하게 하여 집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퍼거슨은 위협이 왔음을 느끼고 병사들을 킹산 위로 보냈다. 그곳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를 분리하는 경계에 있는 곳의 능선 정점에 있었다.
아메리카군은 킹산 전투에서 주변 지형을 활용하여 영국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뒀다.

대륙회의는 남부를 지휘할 새 사령관으로 너새니얼 그린을 뽑았다. 워싱턴에게 새 사령관 지명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그는 병참감으로 3년 차를 보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린은 위대한 대의에 닿기 위해선 위대하지 않은 일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워싱턴에게서 배운 바 있었다.
이처럼 그는 워싱턴에게서 많은 점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린은 총사령관의 방식과 전략을 검토했으며,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흉내를 포기하는 영민함도 보였다.
그는 이후 열 달 동안 군대가 반드시 온전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전쟁에 임하고자 했다. - P26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자부심 또는 원칙이 군인을 만든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휘하 병사들에게 심어준다.
하지만 병사들이 헐벗거나 굶주리면 그런 감화는 전부 실패할 것이다. - P27

11월 27일 힐즈버러에 도착한 그린은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걱정스러웠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보급품 없이 헐벗은 상태였고 싸우겠다는 기백이 사라져 있었다. 장교들도 캠던 전투의 패배로 패배감에 빠진 상태였다.

그린은 병사들을 나누어서 자신이 지휘하는 군은 체로로, 모건이 이끄는 군은 카토바강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781년 1월 초, 그린은 윈즈버러의 콘월리스에게서 탈턴이 모건의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탈턴은 콘월리스에게 힘을 합쳐 킹산 근처에 모건을 몰아넣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탈턴에게 추격을 허락했다.
모건은 1월 16일 해나스 카우펜스로 이동했다. 모건 부대는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다니는 상태로 탈턴이 가까이 추격하는 상태에서 도망쳤다가는 따라잡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우펜스는 목초지였다. 목초지에는 덤불은 별로 없었지만 소나무, 참나무, 히코리 나무가 산재해 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기병을 위한 장소였는데, 탈턴은 모건보다 3배 많은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장을 살펴본 영국군 자군 찰스 스테드먼은 모건이 전술적 의도와는 맞지 않는 지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양 측면이 열린 데다 기병에 취약했고 등 뒤의 브로드강이 퇴각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P38

이런 불리한 지형이었으나 모건은 지형을 잘 활용했다.
그리고 모건의 군사는 모두 정예였다. 탈턴의 병력은 모건의 군사보다 수적으로 우세였으나 정예병은 아니었다.
모건은 달아날 곳 없는 고립된 목초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결정을 내렸으나 완승을 거두었다.

콘월리스는 카우펜스 전투 소식을 듣고 모건을 뒤쫓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엉뚱한 방향을 선택해 하루를 날렸다.
(정보를 돈으로 사려 했지만 정보를 팔겠다는 이는 적었다.)
좀 더 일찍 더 나은 정보를 얻어 빠르게 움직였다면 모건을 따라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건은 길포드 법원 청사로 이동하여 대륙군 주력 부대와 합류했다.
작전회의를 통해 그린이 이끄는 대륙군은 도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콘월리스와 그린이 있는 길포드 법원 청사 사이에는 강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도주에 위험이 도사렸다.
이 때 대륙군 장교 중 한 사람인 윌리엄스는 군 내에서 과소평가를 받았으나 양동작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군사를 이끈다.

길포드 법원 청사는 언덕 위 마을의 가장 자리에 있었고 계곡 대부분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대부분 백병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대륙군이 점차 승기를 잡았다.
콘월리스는 아군이 패배할 거라 생각하고 대포 두 문을 가져와 아군과 대륙군이 뒤엉킨 곳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 때 영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게 컸다.

4월 7일 콘월리스는 윌밍턴에 도착했으나 오는 도중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콘월리스는 필립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의중을 드러냈다.

"전쟁의 목표가 확실해지고 우리가 만약 승리한다면 아메리카를 얻게 될지도 모르네."
체서피크가 중대한 곳이라는 추정, 단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콘월리스의 전략적 사고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루하고 비참하고 값비싼 작전에 좌절했던 그는 계속해 아메리카 정복의 꿈을 꾸다 마침내 착각에 빠졌다. - P64

그린은 홉커크스힐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소나무로 덮이고 동서로 뻗은 산등성이로 캠던에서 북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캠던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 판단한 그린이 적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끝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의 지원을 받는 메릴랜드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버지니아 대륙군 2개 연대가 있었다.
대륙군 좌측에는 오토 윌리엄스가, 아이작 휴거는 우측 진영을 지휘했다.
로던은 3개 연대를 전선에 내세우고 다른 3개 연대는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고, 아메리카군에 접근했다.
최정예 부대인 63연대는 공격 대형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

전투가 끝날 때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부대는 대륙군 우측의 버지니아 연대였다.
워싱턴 기병대는 늦게 도착하여 후위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그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했고 추격하는 로던을 잘 방어했다.
홉커크스힐 전투가 끝나고 로던은 결국 캠던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1781년 9월 8일 그린과 스튜어트는 유토 스프링스 전투를 한 번 더 치른다.
유토 스프링스는 찰스턴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병력과 보급품이 충원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통제력 상실을 보면서 의욕을 높일 수 있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진영 공격에 성공했으나 전열이 무너진 가운데 혼란 속에 영국군에 반격의 기회를 내준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영국군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잃음으로써 남부에서 힘을 잃게 된다.
이는 현지인들의 비협조 속에 정보전에서 허약했고, 아메리카군의 대의 앞에 스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캐롤라이나인은 콘월리스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콘월리스나 그의 후임들에게 아메리카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캐롤라이나인은 오히려 영국군의 정보병들을 습격했고, 보급품 수송 행렬을 공격했으며, 영국군을 지원하려는 왕당파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남부 민병대는 대다수의 북부 비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대치전에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국왕과 민병대와 싸울 때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유능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라도 그들은 그런 비정규 전투에서 훌륭하게 싸웠다.
첫째,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믿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남부에 사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 P77


아메리카인들은 모든 전투에서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메리카 민병대는 버티고 싸우는 일을 잘하지 못했지만 서로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단결력이 강했다.
영국 정규군은 아메리카 민병대와는 반대로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엄격한 규율 속에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영국군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지만 전투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아메리카 정규군인 대륙군은 영국군만큼 정비되지 않았지만 점차 인내심을 키워갔다. 패배하고 물러나더라도 다시 쉼없이 공격하는 그런 끈기 말이다.

일부 아메리카인이 독립의 원칙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전장에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역설은 어떤 측면에서는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원칙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그들을 전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대의 덕분에 독립 전쟁이 자유민 대 용병의 싸움이 되었다는 점을 줄곧 휘하 병사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유의 축복'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 P101

병사들은 싸울 때마다 집단과 자유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다.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
그들은 선택이 죽음과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들은 밀집대형에 끼어서 전우들과 어깨를 맞댔고, 자신에게도 미덕을 실천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면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은 개인의 안위만을 지키는 것이었다. - P102

대륙회의와 각 주 정부는 입대 보상금을 지급하고 복무 후 토지 지급을 조건으로 신병을 모집했다.
이 때문에 부패한 군인들이 나타나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다. 각 주의 경쟁은 보상금 철새들을 출현시켰고, 보상금만 챙기고 탈주하는 군인들을 낳았다.

대륙회의는 병참 체계를 개편해야 했다.
부대를 편성해 전쟁 지역에 파견해야 했고, 부대에 보급품을 팔아 수입을 내고자 했다.
대륙회의는 병사들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했으나 큰 조직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병사들은 만족스러워해하지 않았다.

1776년 말 대륙회의는 병참부의 업무를 개편했다.
첫째는 전쟁청 산하에 신설된 피혁 조달부로 신발을 보급하는 업무였다. 둘째는 군대에 의복을 제공하는 독립된 피복 조달부 설립이었다.
대륙회의에 재무감으로 일한 사람 중 로버트 모리스는 보급 체계 혁신을 위해 노력한 인물 중 탁월한 성과를 냈다.
모리스는 필라델피아 상인으로 전국적으로 재계의 인맥을 알고 있어 대륙회의의 재원으로 납품계약금을 지불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대규모 군사 작전에도 충분한 보급을 제공했다.

연대 군의관들은 종합병원을 보급소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병사들은 연대 내의 야전 병원을 더 선호했다.
연대 병원과 종합병원 외과의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병원부 조직은 전쟁 끝무렵까지 정비되지 못했다. 게다가 장교들과 연대 군의관들은 위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대륙군의 위생은 엉망이었던 반면 영국군은 야영지를 께끗하게 정비하여 질병에 덜 걸렸다.

18세기 천연두는 위험한 질병이었다. 워싱턴은 병사들의 감염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의 형 로렌스는 폐를 망가트리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바베이도스로 요양을 갔고, 워싱턴도 동행했다.
바베이도스에서 지내던 워싱턴은 1751년 천연두에 감염됐다.
로렌스 워싱턴은 18세기에는 폐병, 현대에는 폐결핵으로 불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그는 낫지 못하고 1752년에 사망했다.
조지 워싱턴은 병마를 이겨냈지만, 천연두를 겪은 일은 잊지 못했다. - P126

워싱턴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천연두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1775년 보스턴 인근에 퍼진 천연두 문제 해결을 위해 병사들에게 접종을 받게 할지, 격리를 할지 판단해야 했다. 접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병사들과 민간인 중 천연두에 걸린 자만 격리했다.
하지만 1777년 1월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에서 천연두가 퍼졌을 때 접종을 선택했고 효과를 보았다.

존 폴 존스는 대륙군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항구에서 출발해 영국 본토를 공격했다.
존스는 영국에 가능한 많은 피해를 입히겠다는 생각으로 본험 리처드호와 콜베트함(소형 호위함), 커터(소형 보트)와 사략선 두 척을 이끌고 간 것이다.
1779년 9월 23일 본험 리처드호는 영국의 세라피스호에 맞서 용기와 기백, 행운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농촌에 사는 민간인들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위한 대의에 나섰을까.
민간인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에 다른 형태로 참여했고, 여성들은 가정에서 남성을 대신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파, 흑인, 인디언 등도 참호를 파고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세탁이나 간호 등의 업무를 하기도 했다.

전쟁의 '이면'은 '외부', 즉 전쟁을 지속하는 민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이면과 외부를 구별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기만적이고 더 나아가 엉뚱한 것이기도 하다. - P151
전쟁이 일으킨 물리적 파괴는 아메리카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 P152

파괴의 아픔보다는 덜 극적이었지만, 전쟁이 불러온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전투에서 싸우는 동안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주로 여자들이 이러한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다.
나아가 그들은 남은 가족의 단합을 걱정해야 했다. - P154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전쟁에 나간 남편을 떠올리며 그립기도 하고 불안해했을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을 위한 생계로 마냥 시름에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을 오로지 신의 처분에 맡기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변함없이 지켜주실 테니까요."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세월을 잘 견뎠고, 1779년 6월에 조지프는 집으로 돌아왔다. - P156

사라 호지킨스는 남편의 목숨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적이 그녀의 재산을 빼앗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더 위태로웠다.

메리 피쉬 실리먼은 영국군의 상륙작전에 고통받은 코네티컷 페어필드에 살고 있었다.
남편인 골드 셀렉 실리먼은 1779년 영국군 국왕파 무리에게 납치되었다가 1780년 국왕파 판사와 교환되어 귀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 시작 전만 해도 열성적인 애국자가 아니었으나 영국 정부가 아메리카의 자치권을 제약하는 강압법 제정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리는 남편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참전했던 화이트플레인스의 전투 이후에 그녀는 달라졌다.
남편의 코트 주머니에서 옷을 뚫고 들어온 머스킷 총 탄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남편이 죽거나 다쳤을지도 모르는 이 단순하지만 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메리는 영국에 단호히 저항하게 되었다.
실리먼이 1780년에 풀려났을 때, 메리는 이제 더 이상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뉴잉글랜드인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아메리카인으로 거듭났다. - P159

남편과 아버지가 군대로 떠난 대다수의 가정은 궁핍하게 지내야 했다.
로이스 피터스 역시 그랬지만, 남편의 안장 작업을 이어받으며 아이들의 옷을 만들고, 소를 키우며 치즈를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게다가 직접 만든 셔츠와 양말과 치즈를 남편에게 보내기도 했다.
가족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독립 전쟁의 주역이 아니라 보조역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이 자신의 희생과 자립적인 생활을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그것을 강요했다고 비춰지는 것이다.
이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립을 쟁취하는 데 많은 여성이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독립하기 한참 전에도 여성들은 솔선수범해 결단력 있는 행동에 나섰다.- P161

전쟁 내내 약탈이 계속되면서 민간인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영국군이 점령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빈민층의 사람들이었다.
전쟁으로 생필품의 물가가 폭등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영국군이 점령한 9개월의 기간 동안 각종 사업이 번창했는데 럼주, 증류주, 당밀 소금 등이 밀수 대상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국왕파 상인들은 크게 돈을 벌었다.
돈을 가진 상인이나 영국군 장교들은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겼는데 매주 무도회를 열고 연극, 연주회, 파티가 개최되었다.

한쪽에서는 사치가,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이 이어지는 상황은 씁쓸함이 들게 만든다.

아메리카 내부의 모든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충성했고, 8만 명은 아메리카를 떠났다. 이들은 국왕파였는데 아메리카 총 인구의 약 16퍼센트 정도에 해당했고 백인을 기준으로 하면 19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인구였다.
국왕파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국왕파는 유서 깊은 전통과 의회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기구들이 자유를 만들고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왕파 대다수는 독립 선언의 방안이 제시됐을 때 아메리카의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 새로운 기반이나 정치권력이 생겨났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
예전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왕파는 예전의 것을 고수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 P195

영국에 충성하는 그들은 기존의 아메리카를 고수하는 것이 이득이였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독립은 그들에게 원치 않는 움직임이었고 그에 대한 반발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파와는 다르게 흑인 노예들은 자유의 대의의 원칙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노예 해방에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인종주의와 경제적 필요성은 혐오와 맞물려 심리적 강화를 불러 일으켰다.

모든 북부 주는 어떻게든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북부 주는 노예의 자식은 반드시 출생 후 몇년 뒤 해방되어야 한다고 명시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노예 해방을 향해 나아갔다. - P198

남부 주는 북부 주의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너무나 깊이 정착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노예 무역을 폐지하자는 북부 주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런 조치들을 다 종합하더라도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대책들은 별로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치들은 노예제를 무너트리지 않았다.
노예제는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번창할 터였다. - P199

독립 혁명 과정에서 인디언은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실을 겪었다.
서부 경계지를 따라 벌어진 싸움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농지와 거주지도 잃은 것이다.
일부 인디언은 싸움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인디언들은 참담한 운명에 휩싸였다.


1781년이 되면 독립 전쟁은 막바지로 향한다.
아메리카군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을 포위하면서 항복을 받아낸다.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강화회담을 벌이게 되고 1782년 11월 공식 합의에 이른다.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는 리치먼드, 포인트 오브 포크, 샬러츠빌을 점령하고 체서피크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에 따라 요크타운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드 그라스 제독이 가세하면서 프랑스 해군은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거기에 프랑스 육군에 로샹보 백작이 합류한다. 그는 워싱턴보다 7살이나 많았으나 유럽의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활약을 보여준 베테랑 군인이었다.
대륙군은 영국군 몰래 체서피크만 방향으로 남하하였고, 영국군은 윌밍턴에서 올라와 요크타운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와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만에서 해전을 벌였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에 승리하여 영국 함대가 뉴욕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요크타운에 2개의 방어선을 만든 영국군에 맞서 아메리카군과 프랑스 육군 연합군은 포위 작전을 벌여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는 미리 배치한 대포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영국군의 보루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의 전투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 의회는 전쟁에 더 이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1782년 3월 20일 노스는 총리직을 사퇴하고 로킹엄이 총리에 오른다.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하지만 강화 협상은 쉽지 않음을 예고했다.
영국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이 생각하는 바가 다 달랐기 때문이었다.

3개월 간의 협상이 진행된 결과 1782년 11월 30일 미국과 영국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 합중국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이 인정되었고 국경 문제도 합의를 보았다.
1783년 1월 20일 프랑스와 영국도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과 영국도 비슷한 시기 강화에 동의했다.

1783년 아메리카 북쪽 국경은 오늘날의 국경과 비슷했고, 남쪽 국경은 위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강으로 정해졌다.
평화조약 체결 소식에 아메리카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1783년 11월 25일 영국군이 뉴욕에서 철수하고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은 뉴욕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입성했다.

아메리카인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의를 향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대의는 아메리카인의 치열한 저항에 영향을 주었다.
독립 혁명 기간 중 아메리카에서 제기된 무언의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하고 있는가?"였다.
1760년 전까지 아메리카인은 언어, 혈연, 친척, 무역, 자유, 입헌주의 등 영국인과 많은 요소를 공유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아메리카가 겪은 경험은 이런 유대 관계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이익은 상호적이지 않았고, 가치는 공유되지 않았으며, 공통점은 손상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메리카인이 자유를 손상하는 행동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 P254

종전 후 군사권, 영토권, 재정권을 두고 이견을 정리하는 작업이 남았다.

전쟁 후 워싱턴은 대륙군의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의 행동은 위엄과 기개, 결단력이 느껴졌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이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려온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P263

대륙회의는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 영토를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이 영국과 맺은 조약은 불명확했고, 스페인 등 다른 나라들도 이 조약을 존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서부에서 주권을 수립하려는 대륙회의에 맞서 영국군은 5대호의 모피 교역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미시시피강 동쪽 영역도 미합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스페인이 미시시피강을 자유롭게 탐사할 독점 권리를 요구했다.
서부와 동부 간의 갈등도 첨예했다.

재정권을 둘러싼 주 정부와 대륙회의의 갈등도 컸다.
정부는 독립 혁명 전 돈을 마구 찍어내고 그 돈으로 각종 비용을 충당했다.
무절제한 화폐 발행으로 화폐 가치는 급락하였고 세수는 걷히지 않았다.
대륙회의는 통화 회수를 위해 특별 증서를 발행했으나 각 주 정부와 공채 모집관이 계획을 따르지 않아 실패했다.

연합헌장이 작성되고 주 헌법이 비준되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연합회의가 중앙정부의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을 경계했다.
연합규약은 16개월 간의 토론 끝에 대륙회의에서 1777년 11월 채택됐다.
연합규약 2조는 각 주들이 대륙회의보다 우월한 지위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783년 아메리카인들은 사실상 연합회의가 아니라 주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당시 주들은 독립 혁명의 목적에 자극을 받아 많은 일을 해낸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될까?

1781년 이후로 아메리카는 많은 점을 배웠다.
연합규약으로는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 헌법은 풍부한 정치적인 지혜를 담고 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합중국은 쪼개진 주권을 지닌 소규모 공화국들의 유별난 연합체로서 강력한 군주제가 번성하던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며 사람들은 헌법제정회의로 모였다. - P328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토론을 거쳐 미국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만들었다.
본래 연합규약을 개정하여 개정할 목적으로 모인 것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연방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여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9월 17일 55명의 대표 중 39명이 헌법에 서명하면서 비로서 헌법이 비준되었다.

55명의 대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최소한 34명은 법률 교육을 받았고, 21명은 법조인이었다. 농장주와 농부는 18명, 노예주는 19명, 상인은 7명이었다. 나머지 8명은 변호사이자 상인이었다.
이들 중 다수가 주의 공직을 맡았거나 대륙회의에 있었거나 독립전쟁의 참전 용사였다.
이 짧은 개요로 이 회의에 믿음직한 시민, 자산가, 정치 및 사회 분야 지도자가 모였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
변화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소수는 융통성 없는 보수주의자였다.
대표들은 대부분 30대나 40대 젊은 사람이었고, 몇 명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 P337

인구비례와 대표성에 관한 입장 차이로 합의를 보기 까지 대토론이 이어졌다.
작은 주들은 평등하게 한 표를 갖게 되는 것을 고수하기를 원했으나 큰 주는 인구에 비례해 투표권을 갖게 되는 것을 원했다.
헌법제정회의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성과 지성을 작용시켰던 반면 비합리성, 열정 등도 일부 작용했다.

대위원회가 제출한 최종 보고서는 '대타협'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엘스워스와 코네티컷 대표단이 고안해낸 작은 주들의 방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대타협은 인구 4만 명당 한 명의 연방의회 의원을 두고,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민으로 산정하며, 연방 하원만이 재정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가지고, 상원에서는 각 주가 동등한 대표 구성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 P359

대표들은 9월 17일 서명에 참여했다. 헌법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은 이들도 대부분 서명했다.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나 공화국의 가치를 어느 정도 구현한 안이었다.
권력을 제한함으로서 부패를 막고 다수의 폭정으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이는 것이었다.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존재했으나 결국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헌법은 비준되었다.

연방 하원은 인민이 선출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계층, 지위, 숫자와 무관하게 인민은 자유로웠고 동시에 구속받았다.
자유롭다고 한 것은 공화국이 도덕적인 인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구속을 받는다고 한 것은 이런 다양한 부류의 인민이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표들은 이런 추정을 공화주의의 언어로 표현했다.
그들은 간접적으로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익숙한 옛 도덕적 확신을 상기시켰다.
대표들은 인간의 이기심, 욕망, 악을 행하려는 성향 등을 분명히 고려했다.
인간이 지닌 매우 악한 충동 중 최악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본능이다.
이런 본능을 제약할 수 있는 정부를 설립한 것은, 헌법 자체에 신교 문화의 지속적인 관심사인 도덕성이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 P385

헌법 비준 과정은 대체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비록 반연방주의자들은 헌법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헌법에서 자유로운 영국인들의 권리장전의 내용이 빠졌다는 것과 큰 영토를 지닌 나라에서 공화정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연방주의자들이 비준회의에서 우위를 점했다.

조지워싱턴은 1789년 4월 30일 뉴욕에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치렀다.


1권에서부터 3권까지의 시리즈 1 중에서 압권은 3권이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표와 희망을 엿볼 수 있고 또 대의를 위해 나선 대표들의 리더십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중요한 목표가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 흑인 노예들의 시선에서 미 합중국의 대의를 위한 행동들은 감동적이었다.
(이는 개정판에서 많이 보강된 부분이라고 한다.)

부디 4권부터 12권까지 남은 시리즈의 책들도 늦지 않게 완간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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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27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권 짜리 시리즈군요~! 이 시리즈 다 읽으시면 미국역사의 천재가 되는건가요? ^^ 리뷰만 봐도 3권이 제일 재미있는거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3-27 18:46   좋아요 2 | URL
네 새파랑님. 남은 4권부터 12권까지 빠른 시일 내에 나오면 좋겠습니다.
3권이 제일 재밌었어요. 읽을수록 작가의 문체에 적응되는 것도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용 자체가 주는 재미가 컸던 것 같아요. 미국역사의 천재까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역사의 이정표로 참고할 책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2-03-27 17: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께서 3권까지 단숨에 읽으내신 것 같아요.
이 책 다 읽으면 어느정도 미국 역사의 흐름은 잘 알 수 있을것 같네요.
완간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3-27 18:48   좋아요 3 | URL
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그래도 좀 빨리 나오면 좋겠어요ㅎㅎ
이 책은 한 번에 몰아읽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재미도 있고 유익도 있는 책이었어요.
다 읽으면 아마 미국 역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mini74 2022-03-27 1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화가님 ~ 요약도 발췌글도 👍. 저도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옛날 세계사 시간도 생각나고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3-27 19:1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세계사 시간에 보통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가던 빈 공간을 채우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얼른 4권을 읽고 싶은데 말이죠ㅎㅎ 역사의 방향은 구성원들의 생각과 의지가 큰 몫을 차지하는구나 느끼게 됩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7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역사 박사님 되시겠군요?^^
꾸준히 읽으시는 모습 정말 본받고 싶어요.
12 권까지면 정말 미국의 모든 것을 정립하겠습니다.
아직 4 권부터는 안나왔나 보군요?

거리의화가 2022-03-28 09:10   좋아요 1 | URL
미국 역사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한 권씩 읽으면서 공부해가는거지요.
꾸준함밖에 없는 사람이라...ㅎㅎ
저는 한 권의 책을 깊이 읽는 것도 좋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덧칠해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더라구요. 모르는 게 많아서 그렇게 읽고 좋은 책은 여러 번 읽으면서 깊이 읽고 그런 방식이 역시 정공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권부터는 아직 안 나왔어요. 나오면 바로 읽어볼 참입니다^^

scott 2022-03-28 0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추카합니다 화가님
3권 마지막 정말 재밌죠
저는 대여섯번은 읽었습니다(3권만)
12권 완독 출간을 간절히 바라며
출판사에 독촉 메일을 써야 겠어요.^ㅅ^

거리의화가 2022-03-28 09:13   좋아요 2 | URL
아니 대여섯번을!!! 역시 스콧님 대단하셔요.
저도 시간이 넉넉하다면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을텐데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역사는 시간을 그만큼 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한국사 책도 읽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쌓여있고 참... 여러 모로 욕심만 드네요.
저도 3권이 젤 재밌었어요. 12권까지 최대한 빨리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미국인 이야기 2 : 전쟁의 서막 1770~1780 -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미국인 이야기 2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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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2권은 전쟁의 서막이 부제다.

개인적으로 1권보다 2권이 재밌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하나의 주제가 관통되어서인 것 같다.

2권은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에 갈등이 폭발되어 전쟁이 발발한 뒤 그 전개 과정이 그려진다.
영국은 아메리카를 하위에 두고 싶어했음이  분명했다.
아메리카는 영국의 권력에 의한 압제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했고 압제라 느꼈다.
둘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영국 노스 내각이 들어서면서 톤젠드 법안이 철회되고, 상인들이 수입 거부 운동을 중단하면서 문제는 봉합되는 듯 했다.
그러나 종교적 갈등과 경제 문제로 결국 아메리카인들은 통신위원회란 조직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게 된다.
영국은 국교회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국교회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또한 상인과 세관 징수관 사이 갈등은 톤젠드 법안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보스턴 선언은 식민지인의 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권리는 자연과 이성에서 온 것이므로 어떤 권력도 민중의 권리를 침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 이후 보스턴 앞 바다에 도착한 차 상자를 던지는 것으로 대응했다.
영국 의회는 이를 반란으로 여겨 한층 더 강화된 제재를 단행했으나 식민지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전면적인 수입 거부 운동이 일어나고 대륙회의에서 권리선언을 발표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된다.

군중은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모임 장소를 빠져나가 선창을 따라 달리면서 그리피스 부두로 갔다.
그곳에는 다트머스호, 엘리너호, 비버호 등이 계류되어 있었는데, 뒤의 두 배 역시 차를 싣고 최근에 도착해 있었다.
얼굴을 검게 칠하고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인디언 복장을 한' 약 50명의 남자가 군중 사이에서 빠져나와 배에 오르더니 보스턴 항구 앞바다에 차를 우려내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웠는데, 차가 든 궤짝을 갑판 위에 올려서 깨부순 다음, 차를 선창 너머 바다로 내던졌다.
배 주위의 바닷물은 곧 차로 뒤덮였고, 아침이 오기도 전에 일부 차는 저 멀리 도체스너 넥까지 흘러내려갔다. - P45

영국 의회는 군중의 행동에 대응하여 보스턴 항구법을 통과시키고 이후 매사추세츠 정부법, 정의의 불편 부당한 시행법을 통과시킨다.
보스턴 항구법은 영국 국왕이 재개항을 명령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동인도회사가 차 손실에 대해 보스턴 시로부터 전액 배상을 받을 때까지 재개항 명령을 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정부법은 매사추세츠 정부를 왕실 직영 정부로 전환하는 것으로 매사추세츠 식민 정부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정의의 불편부당한 시행법 또한 식민지 권한을 축소한 것으로 식민지에서 중죄를 저지른 영국 관리를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로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 개항기 외국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이다.)

필라델피아에 대륙회의로 모인 대표들은 영국을 향한 분노보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이다.
버지니아주 주지사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제3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고 존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대표를 거쳐 미국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을 종종 비교했다.
제퍼슨은 아주 평온한 외양을 유지한 반면, 늘 불안감을 느끼던 애덤스는 단 한순간도 그런 평온함을 얻지 못했다.
제퍼슨은 우아한 반면, 애덤스는 결코 막돼먹지는 않았으나 충동적인 기질로 인해 다소 거칠었다.
그는 제퍼슨처럼 다재다능하지는 못했으나, 제퍼슨 못지않게 날카로웠고, 종교사와 정치학이라는 두 분야에서 애덤스의 학문이 제퍼슨을 능가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공직 생활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했고 인기와 명성을 갈망했지만 오로지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처신은 대체로 청교도의 문화였다. - P67

애덤스에 대한 평가가 좀 박하고 제퍼슨은 후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둘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었고 그만큼 달랐던 듯하다.

토론의 진통 끝에 권리선언 발표가 합의되었다.
발표문에는 식민지의 권리가 자연법, 영국 헌법, 식민지 특허장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담겼다.

청교도 윤리를 강조하면서 아메리카인들은 오래된 생활방식을 상기해냈다.
18세기 동안, 인생 내내 더 많이 획득하고 소비하라는 강요 때문에 잊어버렸던 이전의 생활방식 말이다.
영국과의 위기가 닥치면서 아메리카인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계속 고민해야 했고, 대륙협회는 아메리카인에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라는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 P85

영국 내각은 대륙 회의의 결정과 아메리카인들의  지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개전이 시작되며 드디어 전쟁은 막에 오른다.

1775년 4월 18일 영국군은 콩코드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출발했으나, 이미 소식을 접한 아메리카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전투에서 영국군은 모두 273명의 사상자를 냈고, 아리카는 95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사령관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아메리카 민병대를 군대다운 군대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어지는 벙커힐 전투와 퀘벡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아메리카군은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1775년 6월 뉴잉글랜드 벙커힐에서 아메리카 민병대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선공을 감행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벙커힐과 브리즈힐에 주둔한 아메리카군에 일제 포격을 퍼부어 영국군의 상륙을 돕는다.
아메리카군은 브리즈힐에서 미스틱강까지 전선을 구축해 상륙한 영국군에 대항했으나 아메리카군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영국군은 찰스타운 넥까지 반도를 완전 점령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 자리를 맡기는 했지만 자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능력과 군사적 경험으로 이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신임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워싱턴은 실패를 예상하는 일을 싫어했고, 그것이 그의 '명성'에 입힐 피해를 의식했다. - p162

그는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에겐 명예라는 가치가 중요한 사람이었고 실패로 인해 주변인들에게 줄 실망 등으로 걱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전쟁에서 자신이 선택됐다는 믿음, 아메리카인의 자유 수호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었다.

막상 민병대를 맡고 보니 그들은 너무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병들의 군기와 임무 수행의 기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군법회의도 진행하는 등 규율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을 진행했다.

대륙회의의 뜻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군은 퀘벡 원정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290킬로미터만 여행하면 될 것으로 알았으나 실제로 캐나다 북상까지 560킬로미터를 이동하느라 45일의 강행군을 하게 된다.

퀘벡 원정에서 대륙군의 한 부분을 이끌던 몽고메리 장군은 머리에 총을 맞아 전사한다.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이 보이는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해 보스턴 공격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날이 추워 보스턴 항구가 얼어붙어 땅을 굴착하기 어려워 요새화할 수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영국군이 쉽게 공격해올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이미 보스턴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를 선택했고 1776년 3월 27일 그들이 항구에서 물러나면서 1년에 걸친 전투가 끝이 난다.

그것은 존 애덤스가 그 당시 말한 "절반의 전쟁"이 아니었고, 아메리카 측에서 전면적인 노력을 기울인 온전한 전쟁도 아니었다.
캐나다에 대한 점령 시도는 식민지가 "방어선 위에서 행동"한다는 주장, 즉 방어전을 펴는데 만족한다는 애덤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애덤스의 실망은 이해할 만했다.
그는 보스턴 포위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로의 공격도 원했다.
나아가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하기를 바랐다.
아마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퇴각한 바로 그 다음 날에 독립 선언이 나왔더라면 그는 더욱 흡족해했을 것이다. - P190

전쟁 후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를 시작하여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영국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식민지 의회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와중에도 식민지의 독립을 부추기는 주장으로 흔들리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머스 페인이다.

토머스 페인은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페인의 친구이자 세무 관리인 조지 스콧이 1774년 그를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소개했다.
프랭클린은 페인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페인이 아메리카로 간다고 하자 자신의 사위인 필라델피아 상인 리처드 바크에게 소개장을 써준다.
페인은 1774년 11월 30일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바크를 찾아갔고 현지 신문에 시와 논평을 기고하는 일을 했다.

페인은 다양한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글쓰기 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을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 대의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메리카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몇 가지 확신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가령 아메리카인은 그들의 권리가 오래된 정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이해는 영국과의 전통적인 유대 관계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확신했다.
페인은 그런 확신이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 P204

최근에 아메리카인이 피의 희생을 치렀고, 그 때문에 '모국'에 대한 아메리카의 사랑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현재 벌어지는 갈등에 아메리카인들은 많은 열정을 쏟았고, 영국을 향한 그 열정은 곧 증오로 바뀌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론은 너무나 분명했다. "타협은 이제 헛된 꿈이다." - P205

《상식》은 아메리카의 독립의 당위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된 상식은 신문에 게재되었고 주요 아메리카 도시와 마을에서 책자로 간행된다. 몇 달 사이 10만 부가 발간되고 신문의 지면을 채웠다고 한다.

미국의 독립 선언서 작성 위원회는 조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로저 셔먼, 로버트 R. 리빙스턴이 참여했고 대부분은 제퍼슨이 맡았다고 한다.

대륙회의가 7월 4일 최종 승인한 문서는 위기 사태의 책임자로 영국 국왕과 영국 의회를 지목했다.
독립 선언은 존 로크의 계약 이론을 바탕에 두었다. 
아메리카를 통치하는 영국인이 아메리카-영국 관계의 합의 사항을 위반했고 시정 사항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거부 당했으니 아메리카는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서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상하겠지만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인에게는 흑인 노예를 해방할 의사가 없었다. 대규모 백인 농장주들이 있었고 그들은 흑인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을 결코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었고 양측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은 뉴욕의 여러 요새에서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을 몰아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고전을 거듭하던 워싱턴은 1776년 크리스마스 트랜턴의 공격으로 마침내 전쟁의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잡는다.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1776년 8월 뉴욕 브루클린 하이츠를 둘러싸고 벌어진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에 패한다.
워싱턴은 패배 후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의 또 다른 공세가 있을까 불안했다. 
아군과 적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진지전과 방어전을 선택했다. 
이는 영국군이 대양과 해안지대, 대부분의 강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해상에서만 강했던 게 아니라 육지에서도 강했다. 
그들은 정규 군대로 일정 이상의 기량을 발휘했다. 
반면 아메리카군은 들쑥날쑥한 기량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지휘하는 장군들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미흡함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29일 워싱턴은 참모회의에서 나온 건의에 따라 브루클린 하이츠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철수를 결정한다.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포위 공격을 예상하여 영국군을 피해 비밀리에 강 건너 뉴욕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맨해튼에서도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의 공세에 밀려 진지를 옮겨 다니며 고전했다.

영국 군함은 허드슨강 양쪽의 요새인 포트 워싱턴과 포트 리를 돌파하며 내륙으로 북상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 아메리카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2월 3일 델라웨어강의 트랜턴에 도착했다.

필라델피아를 사수하기 위해 워싱턴은 이곳에서 영국군에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모 아니면 도였다. 위험하고 무모할 수 있었던 그의 결정에 운명은 뒤바뀌었다.

그가 델라웨어강 위쪽으로 밀고 올라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오래된 열정, 즉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 공격하려는 열정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군이 봄에 반드시 필라델피아를 공격하려고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꺾어놓자는 생각도 했다.
"나는 필라델피아를 생각하면 몸이 떨려옵니다"라고 그는 썼다. 하지만 이런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야할 만큼 그 도시가 중요한가?
그곳은 아메리카의 수도였고, 그 도시를 잃으면 공동의 대의에 큰 손상을 입을 터였다.
그것은 "모든 고결한 아메리카인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라고 워싱턴은 존 핸콕에게 썼다. 공격의 배경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 대중의 사기를 유지하고, 대중의 미지근한 애착심을 더욱 강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 P273

추운 날씨로 델라웨어강은 얼어붙었고 워싱턴은 트랜턴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강을 건넜다.
크리스마스 날 밤, 2400명 정도로 구성된 주력 부대가 맥콩키 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결했다.
부대는 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위쪽인 페닝턴로드로 가고, 다른 한쪽은 리버로드로 향했다.
대포로 헤센인들이 전투대형을 갖추지 못하게 만들고 난 뒤 서서히 포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전투는 1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헤센인과 영국군은 도망쳤고 워싱턴은 펜실베니아로 들어갔다.
워싱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프린스턴까지 북상했고, 직접 말에 타고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겨울이 되자 전투는 잠시 중지가 되었다가 봄이 되어 다시 재개되었다.
영국 내각은 하우에게 작전지휘를 내리지 못했고 존 버고인은 캐나다에서 남하해 아메리카 공격에 참여했지만 하우와 손발이 맞지 않았다.

하우에게 전쟁의 전체적 국면과 현재 진행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하는 책임은 아메리카 식민지 담당 장관 조지 저메인 경의 몫이었다.
저메인은 북부에서 모종의 작전이 구상되고 있다는 막연한 소식을 하우에게 알려주었을 뿐 그 이상은 조치하지 않았다.
버고인이 북부 원정대의 지휘권을 받는 것이 거의 확실했던 3월 3일과 4월 19일 사이에 저메인 장관은 하우에게 여덟 번이나 편지를 쓰면서도 버고인 부대의 임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저메인은 캐나다의 칼턴에게 버고인이 남하침공부대의 맡을 것이라고 알리면서 그 편지의 사본을 하우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전략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하우 부대가 버고인 부대와 협력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다.
그 대신 저메인은 하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필라델피아 침공 계획을 승인하면서 그 계획이 적절하며 하우의 암울한 전망과는 반대로 그것으로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는 격려를 써서 보냈다. - P296

버고인 부대는 다양한 병력이 모인 혼성 부대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이에 맞서는 아메리카 북부군의 지휘관 필립 스카일러는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나 호레이쇼 게이츠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아메리카군에 호기로 작용했다. 결국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아메리카군에게 영국군이 항복하고 만다.
하우는 브랜디와인과 저먼타운에서 아메리카군을 물리쳤으나 완전한 승리 상태는 아니었다.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의 관계가 흔들리자 유럽의 판도도 불안정해졌다.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흔들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다. 프랑스와 아메리카가 비밀리에 접촉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유럽의 정세를 흔드는 것으로 변모한다.

1778년 3월 영국은 윌리엄 하우 대신 총사령관으로 헨리 클린턴 장군을 임명한다.
전쟁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것이 되어야 했기에 서인도제도에 일부 병력을, 플로리다로 일부 병력을 파견하고, 나머지 병력은 직접 이끌고 뉴욕으로 철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영국의 핵심 전력은 아메리카에 있었고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에 맞설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워싱턴이 이끄는 아메리카군은 포지 계곡으로 이동해 겨울 숙영을 했으나 추위와 배고픔에 어려움을 겪었다.
워싱턴 자신도 간단한 식사를 했고 모자란 식량을 구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대륙회의 의원들은 필요 식량을 민간에서 강제 징발하라고 권유했으나 워싱턴은 이를 물리쳤다. 혁명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때때로 물자를 압수하거나 무력으로 빼앗는 경우도 생겼으나 이 때도 약속어음을 주고서 가져오고 판매자 이익을 가능한 보호하려 애썼다.
탈영 병사는 많지 않았으나 일부 병사들은 인근 농가를 약탈하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쏘는 병사들이 생겼다.
열악한 환경은 군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킬 조련사로 프로이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남작이 등장했다.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으로 아메리카에 도착해 대륙회의를 찾아간 뒤 포지계곡으로 가게 된 것이다.
슈토이벤은 프로이센군의 앞서가는 병영 체계와 전투 방식을 워싱턴 군대에 전수해주었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에 파견되 있던 스파이로부터 영국군이 그곳에서 뉴욕으로 떠날 것 같다는 첩보를 받는다.
프랑스의 라파예트 후작은 적 보급선을 타격하겠다고 워싱턴에게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는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라파예트가 아메리카로 건너온 1777년은 21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부모와 왕은 그가 목숨을 버리지 않길 원했으나 영국의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목적 하나로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워싱턴은 아메리카군을 이끌고 포지 계곡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델라웨어강을 건넜고, 영국군은 앨런 타운을 지나 샌디 훅 방향으로 진군했다. 양군은 몬머스 법원 청사에서 충돌하였다.
영국군은 찌는 더위에 긴 거리를 이동하여 지쳐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모직 군복, 성가신 소총 등으로 인해 더욱 버거운 상태였다.
헤센인 용병 부대는 영국군보다 더 두꺼운 군복을 입었기에 고통이 더 컸다.

워싱턴은 지휘관들을 사령부로 소집했다. 이 중에 찰스 리가 있었다.
그는 워싱턴과 하우 사이의 포로 교환 합의에 의해 4월에 영국군 포로 신세에서 해방되어 아메리카군에 돌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군에 잡혀 있는 동안 영국군에게 작전 계획을 제공하는 등 동료를 배반한 흔적이 보인다.
포로 신분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메리카군은 영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 워싱턴이 지휘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 라파예트가 적임자라고 했다가 라파예트가 다시 지휘를 맡겠다 하자 돌변하여 지휘관을 맡겠다 선언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러 가지로 볼 때 그는 지휘관을 맡기에는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워싱턴은 그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이 패인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다른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전선 구축에 대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다행히 워싱턴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퇴각하는 아메리카군을 잘 이끌어내었다.

해가 바뀌기 전까지 양측에게 전투는 계속 이어졌으나 1778년 말이 되자 영국 내각과 의회 내 비관론이 커졌다.
식민지에 병력을 집중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고 아메리카 전쟁도 실패라는 것이었다.
아메리카군도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전쟁 종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남부에 희망을 걸기로 한다.

1779년 12월 26일 영국군 원정대는 뉴욕을 떠났다.
찰스턴은 남부 도시들 중 유일하게 1만2천명의 시민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거주민들은 주로 영국인의 후손이었으나 흑인 노예도 많았고 프랑스 신교도도, 소수지만 프랑스인과 독일인도 있었다.
찰스턴에서 공성전이 발생했고 캠던 전투에서 승리를 취한 영국군은 남부를 반격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2권은 둘 간의 많은 전투를 담고 있어 많은 전투명이 나오고 관련된 사건과 인물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흐름을 놓치면 곤란할 수 있다.
집중해서 읽기를 권한다^^;

나는 이틀 만에 몰아 읽었는데
아메리카의 독립이 쉽게 얻어진 게 아니구나~
꾀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많은 거래가 오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한계를 가지기는 하지만 아메리카의 독립선언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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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6 0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벌써 2권? 전 아직 1권 읽고 있습니다. 요약 잘 해주셔서 넘 잘 읽고 갑니다 *^^* 그래도 1권 좀 읽었다고 아는 녀석이 피츠버그대 간다길레 오 월리엄 피트 이름 딴 동네? 하고 아는 척 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3-26 08:05   좋아요 2 | URL
윌리엄 피트 저도 1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입니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는게 이 책의 장점인 것 같아요ㅎㅎ 재밌게 읽으셔요!^^
 
미국인 이야기 1 : 독립의 여명 1763~1770 - 혁명은 경제에서 시작된다 미국인 이야기 1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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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미들코프의 미국인 이야기 1권은 독립의 여명이 부제다.

이 책은 이야기체로 서술되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역사를 접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돋보였고 명사를 수식하는 미사여구가 재치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딱딱한 문체의 역사서를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라면 오히려 그것이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인상적인 사건과 인물 위주로 소감을 정리하려 한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7년 전쟁을 치뤘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했다.

윌리엄 피트는 영국 제10대 총리(1766~1768)였는데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피트는 18세기의 경이적인 인물이었고, 음울한 정치가들과 몽매한 대중을 동시에 환호하게 만든 지도자였다.
특별한 호소력을 가진 그의 기질과 심성으로 강력하게 일을 완수했으며, 사회적 통념과 반대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피트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성품대로 일을 완수했으며, 평범하고 뻔한 것을 경멸하면서 화려한 웅변으로 자신의 입장을 멋지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면서 영감까지 불어넣는 그의 웅변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 P24

그는 상대를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쟁의 주력군을 캐나다와 서부 지역에 투입시켰던 것이 성공하면서 7년 전쟁 성공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피트는 전쟁을 스페인까지 확대하기를 원했고 새로 즉위한 조지3세는 이를 불편하게 여겨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무렵 아메리카 식민지는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의 발달, 무역의 활발한 전개로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로의 인구 이동과 계층의 분화가 생겨났다.
도시에서는 빈민층이 생기고 농촌에서는 대지주가 등장했다.


종교의 분화도 있었다. 일명 대각성 운동이다.

식민지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는 데 평신도가 처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목사들이 바다를 건너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을 훈련시키기는 했지만 평신도는 교회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런 평신도의 주도적 역할과, 여러 방식이 식민지 사회의 종교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중부 식민지나 남부 식민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율권을 누린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에서도, 교회 주변 사회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P104

대각성 운동은 사회 유동성, 경제성장, 인구 증가 등과 함께 회중교회 민주주의를 부양한 원천이었다.
종교의 부흥에 적극적인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매달리면서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줄어들었다.
권위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 P106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는 기성 교회 제도의 권위를 무너트렸다.
개인적 성령 체험과 새로운 탄생이 진정한 종교를 의미한다는 대각성 운동을 통해 당대 사람들은 청교도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떠올리게 된다.
도덕과 올바른 행동, 공동체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 윤리와 개인주의의 가치관이 그들을 자연스레 이끌었다.


영국 내각은 조지 그렌빌이 총리에 오르며 인지세법 등 식민지 과세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조지 그렌빌은 영국의 제8대 총리(1763~1765)로 뷰트 총리에 이어 내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정치가들보다 더 날카롭고 야망이 컸지만, 전통적인 영국 정치가였다.
그는 정치적 연줄이 풍부했는데 형인 템플 백작 리처드는 수년 동안 영국 정계의 거물이었다.
두 형제는 번창하는 영국 정치 가문에서도 독보적인 대표 주자였고, 이 가문의 힘은 30년 사이에 몇 개의 카운티에서 의회 전체로까지 확대됐다. - P118

1763년 영국의 부채 규모는 1억 2260만 3336파운드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원금에 대한 이자만 매년 440만 9797파운드나 되었다. 부채에 대한 이자 처리는 내각을 힘들게 했다.
게다가 그렌빌이 취임했을 때 영국 무역마저 위축되어 있어 영국인에게 세수를 더 높이 거두는 것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렌빌 내각은 13개 아메리카 식민지에 당밀세를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그렌빌은 재무부 관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당밀에 과세하면 세수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렌빌은 당밀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전 세관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또 다른 조치를 취했다.
1763년 7월 관세청의 조언을 받아서 관세 징수관들에게 모두 현지에 부임하여 징수 업무를 수행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라고 지시했다. - P133

설탕법은 외국 당밀에 대한 관세를 갤런당 3펜스로 낮춘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이 법은 무역을 규제하고 세수를 올리기 위해 다른 관세들도 부과했다.
또한 오로지 영국으로만 선적할 수 있는 물품들을 지정했는데, 특히 그중 목재는 식민지 무역에서 가장 귀중한 품목들 중 하나였다. - P134

1760년 후반부터 경제 불황이 시작되어 경기가 체감되자 아메리카인들은 불황의 원인을 설탕법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식민지로 보내진 세금 징수관들은 무역 관세를 징수하겠다 압박했으니 이는 아메리카인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아메리카 영국 세관 곳곳에서 충돌을 일어나게 만들고 반대 운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렌빌 내각은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인지세 요청이다.

1765년 2월 영국 의회가 소집되기 직전, 절망적 상태에 빠진 식민지의 대리인들은 동료 네 명을 보내 마지막으로 그렌빌을 만나게 했다.
전기 실험으로 명성을 얻었고 세상사에 밝으며 약간 냉소적인 벤저민 프랭클린, 아메리카에서 금방 건너온 강인하면서도 철저하게 보수적인 자레드 잉거솔,
영국 의회 의원이면서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펜실베이니아의 대리인인 리처드 잭슨, 역시 의회 의원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리인이며 예리하고 총명한 찰스 가스 등이었다.
그랜빌은 회담 초반부에 아메리카인에게 불안감을 안겨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국방비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의회를 통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말했다. - P156

아메리카인(자유의 아들들)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매사추세츠 인지 분배관으로 임명된 앤드루 올리버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열 나인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자유의 아들들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들은 장인과 가게 주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존 길과 함께 《보스턴 가제트》를 발간했던 인쇄공 벤저민 이데스도 일원이었다.
로열 나인은 하노버 광장에 있는 체이스와 스피크먼 증류소에서 자주 만났고, 거기에서 8월 14일의 폭동을 계획한 듯했다. - P181

이들은 '영국의 어리석음'이 '미국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구호를 내걸고 세관 관리의 집들을 파괴하며 인지세법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보스턴 이외에도 각지에서 인지세법에 대한 반대 논쟁이 벌어지고 폭력 저항이 일어난다. 결국 영국 의회는 1766년 3월 18일 법안을 철회한다.


인지세법은 폐지되었으나 영국인들은 여전히 아메리카에 과세하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윌리엄 피트가 또 등장한다. 그는 정부 수반이 되자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여 채텀 백작 호칭을 수여받는다.

채텀이 구성한 내각은 능력은 훌륭하지만 기질이나 야망이 서로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 P285

채텀 내각에 참여한 인물 중 찰스 톤젠드가 있다.

톤젠드는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아메리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소신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아메리카에 나가 있는 영국 관리는 그곳 인민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되고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287

톤젠드는 토지세를 낮춘 대신에 다른 곳에서 추가로 세수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아메리카에서 거두어들이기로 한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 관세법, 세입법, 정지법을 추진한다.

첫째, 숙영법을 준수하기로 동의할 때까지 뉴욕 식민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켜야 한다.
둘째, 납, 유리, 종이, 화가의 물감, 차 등의 품목이 식민지에 수입될 때는 관세를 납부해야 한다.
셋째, 각 식민지에 본부를 둔 아메리카 관세 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

이 제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 P293

이 세 가지 법은 식민지에 대한 영국 의회의 묵은 태도를 보여준다.
아메리카인은 영국 의회에 철저히 종속적이어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톤젠드가 추진한 법에 식민지인들은 자유 침해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고 시작은 보스턴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새뮤얼 애덤스다.
애덤스는 시청 하급직 자리에서 일하다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정치 단체인 코커스 클럽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장인, 상인, 직인, 변호사, 의사 등으로 구성된 이 곳은 시청회의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결성된 곳이었다.
이곳에 새뮤얼 애덤스가 속해 있었다. 코커스 클럽은 인지세법 위기 때 자유의 아들들로 활동했고, 톤젠드 법으로 저항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새뮤얼 애덤스는 '데테르미나투스'라는 필명으로 1768년 여름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맹세하거니와 총독 각하와 마찬가지로 '폭동, 소요, 불법 집회'의 친구가 아니다.
그러나 인민이 억압당하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되며 그들의 재산이 침탈되고 그들의 머리 위에 감독자가 배치될 때, 해군력이 눈앞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를 때,
그리고 그들이 날마다 군부대의 주둔으로 위협을 당하고 의회가 해산될 때,
그리하여 남아 있는 정부라는 것이 밀실 회의처럼 은밀하고 고위 공부원과 하급자들이 주위에서 우글거리고 연금 수령자들이 무례하게 등장할 때,
이럴 때 인민은 불만족을 느끼는데, 결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 P329

애덤스는 대중의 불안과 우려를 한 편의 글로 잘 표현했다.
대중의 열망을 진작시키기 위해 언론에는 이와 같은 지속적인 규탄의 글이 올라왔다.

보스턴에 영국군이 파견되었고 이는 아메리카인의 불만을 더 키우게 되었다.
군대 주둔을 위한 숙영 장소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힐즈버러 식민지 장관의 태도는 아메리카인들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는 영국 상품의 수입을 거부하자는 운동으로 확산된다.

수입 거부 운동의 전략들은 다양한 집단이 협조해서 가능했다.
여성들은 옷감을 직접 짜거나 가내 생산에 몰두했고, 학생들은 수입 와인이나 차를 마시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장인들과 직인들은 헌법적 원칙을 옹호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려 했고, 상인들은 자신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대해 발언권을 얻기를 바랐다. - P362

톤젠드 법은 인지세 법보다 더 후폭풍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폭퐁 기간이 더 길었고 의견 불일치로 논쟁이 많았으며 많은 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극대화된 사건이 보스턴 학살이었다.
보스턴 부두 노동자들과 영국 주둔군 사이 유혈 사태로 번진 사건이다.

전투 대형의 끝에 서 있던 사병 휴 몽고메리에게 얼음덩어리가 날아와 얼굴을 때리자 그는 그 타격으로 쓰러졌거나 혹은 뒤로 움찔 물러나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일어서더니 그만 그대로 총을 발사해 버렸다. 이 최초의 총성 직후 짧은 정적이 흘렀고, 곧 나머지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이 불규칙한 총격은 열한 명을 맞추었다.
세 명이 즉사했고 한 명은 몇 시간 뒤에 사망했으며 다섯 번째 사람은 며칠 뒤에 사망했다. 여섯 명의 부상자는 목숨을 건졌다.
그 뒤 24시간 동안 공공질서는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적어도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군중이 총격 직후에 사방으로 달아났다.
분노한 군중은 프레스턴, 초병 소대, 영국군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
허친슨은 부대에게 도시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았으나 몇 시간 더 관찰하고 다음 날 도시의 여론을 살펴본 뒤 철수를 명령했다. - P393


학살은 영국의 권력이 아메리카에서 무슨 일을 행하는지 의문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권력의 기울기가 명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갈등은 경제적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고 사람을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2권에서는 영국군과 아메리카 연합군 간의 전쟁의 서막이 시작된다.


읽어보니 이 책은 이야기체라 한 번에 몰아서 읽는 것이 더 좋겠다 판단된다.
끊어 읽으면 흐름이 중단되어 재미가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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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3-21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드디어 1권 완독! 추카!추카!ㅎㅎ 2권은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져서 넓혀지는 전선에 정신이 ㅎㅎ없지만 3권은 폭풍 완독하고 재독하면서 밑줄 왕창 치게 됩니다. 4권 5권 6권 어서 빨리 나와야 하는뎅 ^ㅅ^

거리의화가 2022-03-21 08:32   좋아요 1 | URL
2권 읽으면서 어질어질 왜 이리 얽힌 인물과 전투가 많은지. 완독은 했는데 주중에 리뷰 적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3권 더 재밌을 것 같아 기대중입니다!ㅎㅎ 다 읽고 스콧님 리뷰 읽으면 책 내용 정리될 것 같습니다^^*
 
[eBook]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 미조의 시대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서수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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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참 많은 문학상이 있다.
몇년전부터 꾸준히 나오는 젊은작가상 을 포함해
대작가의 타이틀을 단 문학상도 다수 존재한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의 경우 매년 단행본으로 나올 때 읽어본 적이 몇 번 있다.
작년은 건너뛰었던 것 같고^^;
그래도 이런 단행본의 장점은 대부분 단편이라 부담이 없고
이야기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몰아서 읽거나 나눠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내겐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처음이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알게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2014년 등단하여 6년 정도 공백기를 거쳐 첫 소설집을 냈다고 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얼마 전에 또 하나의 소설집이 나왔다.
작가의 글을 보니 소설이 아닌 현실을 잘 담고 있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시선이 차갑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5천만원으로 전셋집을 찾아다니는 모녀. 우울증을 겪는 엄마. 집을 나간 뒤 알바를 전전하는 오빠. 잦은 이직과 퇴사로 취업문을 자주 두드려야 하는 나.
성인 웹툰 보조로 원형탈모증까지 겪게 된 수영.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오빠라곤 있지만 집을 나가버려서
사실상 가장은 나(미조) 이다.
미조는 경영 악화 등으로 회사를 이직해야 해서 본의 아니게 취업문을 여러 번 두드리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면접관의 싸늘한 질문 뿐이다.

우울증을 겪는 엄마에게 시를 쓰라고 권했고 그런 시를 딸에게 읽어줄 때만큼은 엄마는 시인이자 연극배우가 된다.
엄마는 미조에게 버팀목이자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 대한 몰이해의 장벽에 시를 세우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첫째 딸은 나이지만 둘째 딸은 시인 것이고,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둘째 딸에게 내 역할의 일부를 떠넘기고 있는 건지도,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럴 줄 알았으면 딸 하나 더 낳을걸 그랬다는 후회를 시로 해결해보라고 등 떠미는 건지도. - P18

IT 회사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수영은 회사 오너의 요구에 따라 성인 웹툰을 그리고 있다.
점점 더 가학적인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원형탈모증까지 겪어가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그런 수영은 시대의 요구라며 다 그런 거라며 자위하고

나는 저 여자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야. 시대가 가발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가발을 만드는 거고,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 거야. 그렇게 단순한 거야. 마찬가지인 거야. - P30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 P31

오빠는 남보다 못한 존재이다.
전셋집 문제로 전화를 했더니 전국 맛집 탐방을 하고 공장 건물을 사진 찍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미조는 수영이 힘들게 돈을 벌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안에 들어가 본 적 있어?
없는데?
그냥 구경만 하려고 간다는 거야?
충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왜라니. 멋지니까.
이런 공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좋아하라고. 그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힘들 거 아니야.
오빠보다 훨씬 힘들게 일할 거 아니야. 멋지다니. 그냥 멋져서 구경만 하고 온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오빠는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 그 쇳물 쓰지 마라. - P35

5천만원으로 서울 안에서 전세 구하기는 애시당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부동산에 가서 여러 집을 구하기는 하지만 사진과는 다르게 실상은 집들은 과대포장되었다.
볕도 잘 안드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남의 발이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그들의 시대는 어떻게 흘러갈까?
미조와 엄마는 집을 어떻게든 구할 것이고, 미조는 일기를 쓰고 엄마는 시를 쓰고, 수영은 산책을 할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문장을 쓰고, 언니는 아마도 걷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멀고, 우리의 집은 더 멀고,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 우리 머리 위에 내려앉는 꿈은 가까운 그런 밤이었다. - P40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조금 더 그들에게 안온한 볕이 드는 세상이길 소망했다.


《미조의 시대》 뿐 아니라 최진영 작가의 《차고 뜨거운》 도 좋았다.
시대마다 각기 달라왔던 여성들의 모습을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그려볼 수가 있다.
임신과 출산, 육아.
엄마는 엄마의 시대를 살았고 나는 나의 시대를 살고 싶은데,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여성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들이 많다.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쉬운 것이 아닌데 엄마는 예전 자기가 키웠던 방식을 고집하는 것처럼.
가부장제는 여전히 여성들을 곤란하게 한다.
그러니 연대라는 서사가 머릿 속에서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은 오랫만이었다.
중견 작가의 글을 수상작에서 보는 것도 어쩌면 생경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수상작들이 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전체적으로 잘 읽혔다.
장애인, 동성의 사랑 등 한 번쯤 고민해볼 일이 담긴 주제들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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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8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 읽고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님 작품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거리의화가 2022-03-18 10:0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은희경 작가 작품을 아주 오랫만에 읽었네요. 반갑기도 하고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필력은 여전하신듯요

그레이스 2022-03-18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은희경 작가 반갑기도 하고 이 리스트에서 보는게 어색하기도 하네요^^
저도 <새의선물> 좋았어요!

거리의화가 2022-03-18 13:39   좋아요 2 | URL
그쵸. 저도 수상작품에서 은작가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새의선물 좋았다고 하시니 궁금해지네요^^

페넬로페 2022-03-18 1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에는 문학상에 관심도 많고 자주 챙겨 읽었는데 요즘은 잘 보지 않아요.
그래서 한국 작가들의 이름이 생소한 경우가 많아요. 관심 갖고 읽어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8 13:41   좋아요 4 | URL
요즘 작가들 중 박상영, 김초엽, 천선란 등 아주 이름난 작가 아니면 사실 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만큼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저도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지만 이런 단편들을 읽으면 당시의 흐름도 알 수 있고 필진들도 얻어가는 맛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대한계년사 9
소명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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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10년까지의 3년 간의 역사를 다뤘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운 스토리였다.
아는 내용인데도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1. 전명운과 장인환의 미국인 스티븐스 암살

정부 고문관 스티븐스가 휴가로 제 나라에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지역 신문기자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뒤 샌프란시스코의 우리나라 인민들은 분노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3월 22일 샌프란시스코 공립관에서 공동회가 열렸고 대표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 네 명을 보내 스티븐스를 방문토록 했다. 네 사람은 스티븐스에게 우리나라 정세를 묻고 신문 기사에 대해 따져 물었으나 스티븐스는 잘못을 바로잡을 게 없다 말했다. 네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하고 스티븐스를 폭행했으나 주변 이들이 말려 겨우 진정하고 사태 수습 후 돌아갔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과 장인환이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스티븐스는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사망하고 장인환은 전명운이 쏜 총에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12월 23일 두 사람의 판결은 장인환 25년 징역, 전명운 95개월 징역에 처해졌다. 애국심에서 한 행동이 인정되어 정상 참작된 것이다.

스티븐스는 말했다.

"한국에는 충신 이완용이 있으며 또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있으니 한국과 동양의 행복입니다. 내가 한국의 형편을 보건대, 태황제의 허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고집 센 무리들은 백성의 재산을 도둑질했으며, 인민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빼앗아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찍이 러시아가 강제로 합쳤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 P24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대장 대신은 극동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와 만나 만주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걸어서 각국의 외교관들, 인민들 앞으로 와서, 악수를 하고 일본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러시아 군대가 있는 쪽에서 총탄이 발사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었다.
11월 3일 안중근 및 이 사건에 관련된 8명이 여순에 도착했다. 한 대의 마차에 나누어 싣고 시가지를 거치지 않은 채 산길을 돌아 곧바로 여순의 감옥서로 향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사형장에서 동양의 평화에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그 시신을 귀국시켜 그의 고향에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일본인이 허락하지 않아 여순의 공동묘지에 장사지냈다. 

여러 사람들은 아내나 자식 일에 이르게 되면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독 안중근만은,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내나 자식은 생각하지 않으며, 암살 사건은 달리 관계된 사람은 없고 오직 자기 한 사람의 뜻이었다고 했다. - P53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은 가득찬데, 오히려 또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정책에 한국의 인민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른다'며 각국에 발표하여 세계를 속여넘겼다. 이제야 한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잔인한 행위와 한국인들의 복종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널리 드러내어 알리기 위해 많은 수가 외국으로 나아갔다." - P130

"나는 사천 년의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백성과 나라의 권리를 짓밟고 우리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간악한 도적을 죽이는 하나의 거사, 이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바르고 옳으니, 나는 국민의 커다란 의무로서 살신성인하려고 한 것이다." - P136


3. 이재명 등의 이완용 암살 시도

1909년 12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벨기에국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회 참석 후 돌아가기 위해 나섰다. 이재명이 길 옆에서 나와 단도를 휘두르며 인력거 앞으로 달려들었다. 인력거꾼을 찌르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수레가 뒤집히고 이완용이 허리와 어깨가 찔리자 순사들이 이재명에 맞서며 상처를 입혀 이재명은 결국 붙잡혔다.
1910년 5월 13일 이재명 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방청인들이 1천여 명이었는데, 방청권을 얻은 사람은 1백 여명을 넘지 않았다. 변호사 안병찬, 이면우, 오사키 유노쇼, 이와타 센소, 기오가 줄지어 앉았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기자 수십 명도 자리했다. 독일 통신사의 사원 보리안(정확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도 있었다. 이재명의 아내 오인성과 백 소사 등 부인 다섯이 있었다. 사법청 관리 10여 명과 독일의 총영사도 자리했다.
최종 선고로 이재명은 사형, 김정익 김병록 이동수 조명호는 징역 15년, 오복원 전태선은 징역 10년, 김용문 박태현은 징역 7년, 이응삼 김병현 김이걸 이학필은 징역 5년에 처해졌다.

"이완용이 죽어 마땅한 죄는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낱낱이 지적할 겨를도 없다. 5조약의 이전과 7조약 이후의 드러나지 않은 죄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으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 P218

"이재명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의 이재명이지만, 죽은 뒤에는 수천 수백의 이재명으로 바뀌어져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빨리 통감을 없애버리고 당장 5조약과 7조약을 폐기하며, 그밖에 옮겨지거나 빼앗긴 모든 우리 나라의 권리나 물품을 일일이 돌려 받아, 뒷날의 두려워할 만한 일을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24


국민들에게는 그 어떤 시도들보다 통쾌한 소식이었겠지만 이들이 암살 또는 기도 이후 법정에서 하는 이야기와 암살 배경 스토리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안병찬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변호인으로써 최선의 변론을 하는 모습은 정말 뭉클했다. 안병찬 선생은 안중근, 이재명 재판에 변호를 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이 아니면 변호 자체가 거부되어서 달려갔음에도 변호를 할 수 없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명 변호는 진행은 되었으나 1심의 결과 그대로 사형이 내려졌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셨을 것이다.


4. 일진회의 (끊임없는) 한일합방 상소

전 일진회 부회장 홍긍섭이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일진회 총재 송병준과 한일합방의 문제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귀국해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이 일에 대해 은밀히 논의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연합한다는 ‘한일연방’의 이야기와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로 합친다는 ‘한일합방’의 이야기, 일진회 회원들이 화계사에 모여 ‘합방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이야기 등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인심이 떠들썩했다.
1909년 12월 2일 밤 이용구는 일진회 본부 앞에서 총회를 열었다. 참석한 회원은 수백 명이었다. 한 회원에게 성명서를 낭독시키게 한 뒤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발표했다.(이때 여러 회원은 갑자기 이 말을 듣고 까닭을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회원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고 생각해 만장일치 가결이라 했다.) 우편으로 성명서를 내각과 부 원 청 및 13도 관찰사와 군수, 서울과 지방의 각 사회단체, 학교와 신사들에게 발송했다.
12월 3일 밤 대회에서 한일합방의 문제를 결의하여 황제에게 상소했다. 또 한 통의 상소를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보내 일본 황제에게 아뢰어 달라고 부탁했다. 또 이완용과 소네 아라스케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었다가 일진회로 개칭된 후 9월에 동학 잔존 세력이던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최종 통합된 조직이다.
따라서 천도교 세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일진회 회원 중 많은 이들이 탈퇴하고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도 이 때 일진회와 결별하게 된다. (손병희 등이 일진회에 몸담았다는 것이 사실 그들의 인생의 오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이후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이전부터 일진회라는 세력 자체의 기원과 이후 조직이 전개되는 과정이 매끄럽고 깔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이 그렇기도 했고 조직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던 과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껄끄럽고 찜찜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한일합방 청원 상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마치 일본인의 입장 같은 발언을 일삼는 그들을 보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법률에서 '정치적으로 나라를 합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합병'은 나라의 영토를 큰 나라에 딸려 붙이는 것이라느니 갖가지 다른 잘못된 말로 선동하면서, 인심을 의혹시키고 나라의 방침을 어지럽게 하여 갈수록 헛갈리게 합니다. 앞길을 아득하게 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와 의분에 찬 뜻 있는 선비들은 이 일에 대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할지를 알지 못하여 애써 속을 태웁니다. 일본의 황실과 정부의 여론이 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은 우리 이천만 국민 모든 사람이 진실로 호소하고 요청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P68

근대 세계의 대세가 크게 바뀌고 국제 경쟁이 더욱더 격심해져 이긴 자는 흥하고 패한 자는 망하는데 이것은 진화의 법칙으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인도 미얀마 자바 필리핀이 멸망한 것이나 베트남 타이가 거꾸러진 것, 중국이 쇠퇴해진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P80


이들의 논리의 기저에는 진화론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약하고 일본은 강하다라는 논리, 그 흐름 속에 대한제국은 사직과 백성을 위해 일본에 합쳐져야 보전될 수 있다라는 흐름으로 가게 만든다. 당시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8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방 청원 상소 이후 채응언 등 의병들은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용구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용구는 합방 청원이 거절당했으나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 이후 연이어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상소, 국민대연설회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이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잘 울지는 않지만 도무지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그랬는데 한 번은 안중근의 변론과 사후 과정.
다른 한 번은 이재명의 변론 후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한일강제병합 소식이다.

두 분 모두 재판 과정에서 결코 굽힌 적이 없고 시종일관 기개가 있었고 당당했다.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을 생각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분들이다. 남에게 손벌리거나 아첨하거나 그러기 쉬웠을텐데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이들이다.

비록 1910년 대한제국은 망했으나 그 과정이 진행되기까지 선택의 순간들은 많았다.
국가의 선택의 순간들.
개개인의 선택의 순간들.
당시의 선택들이 그 당시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현재는 그 선택에 따른 평가를 각기 받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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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2 2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국가는 망했지만 국민들은 망하지 않았단 생각들어요. 그 용기와 기개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거리의화가 2022-03-13 11:58   좋아요 1 | URL
대다수의 백성들의 행동이 권력자들의 오만이나 잘못을 참고 두고 보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요. 지금도 계속 이 전통(!)은 이어지는 것 같아서 뿌듯함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보고 들을 때마다 존경스러워요.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고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scott 2022-03-15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고통스러웠던 한반도


화가님 읽는 동안 흘러 내리는 눈물 ㅠ.ㅠ

역사의 과오, 독립 운동가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3-15 17:41   좋아요 2 | URL
눈물 훔치며 읽었어요.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는.

역사에서 배울 수만 있다면 지금 이렇지 않을텐데... 왜 늘 반복되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전진할 수 있기를 희망할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