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킨 #5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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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하고 묵직한 원두는 내가 떨어지지 않게 구비해두는 상비 아이템 같은 것이다. 이전 원두인 브라질 산타 루시아가 고소한 맛과 향에 주목적을 두었다면 이 아이는 정직하게 묵직함을 안긴다. 쓴 맛이 강하기 때문에 빈 속에는 마시지 않는 게 좋고 늦은 오전이나 점심 먹고 졸음 깨기용으로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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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2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브라질 원두를 제외하고 과테말라 콜롬비아산 원두는 현지에서 마시면 그야 말로 48시간 동안 눈꺼풀이 감기지 않을 정도로 진합니다 ㅎㅎ미쿡인들이 물 왕창 부어서 슝늉 사이즈로 마시게 된 걸 이해 ^^

거리의화가 2022-12-22 15:38   좋아요 2 | URL
ㅋㅋㅋ 벤티 사이즈 이상으로 물을 부어서 먹겠네요?ㅎㅎㅎ 진한 원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위를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전보다는 물을 더 부어서 먹고 있습니다^^;
 
[eBook]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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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건 너무나 우습다. 결론이 있고 그것에 사실들을 꿰맞추어나간다. 시류에 편승하여 발을 빼는 사람들. 대중 언론에만 눈과 귀가 열려 있는 사람들. 소수 언론은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들.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보도를 내보내는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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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2-19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시무시한 소설이죠!!

거리의화가 2022-12-20 09:15   좋아요 1 | URL
괭님도 읽어보신 책이군요. 최근 저자의 책을 찾아보다가 이 책이 대표작이기에 읽어보았는데... 여러 모로 한국근현대사에서 치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억울하게 끌려간 이들이 생각나더군요. 그냥 죄를 뒤집어씌우고 사람 하나 잡아 가두는 건 일도 아니었겠다 싶은 것이.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었습니다!

레삭매냐 2022-12-19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론이 사실 보도에 집중해야 하는데
아예 뉴스를 만드는 플레이어가 된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시절이 하 수상하기만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2-20 09:18   좋아요 0 | URL
요즘은 SNS 뉴스가 근거 없는 유포를 만들어내는 온상이 되기도 하죠. 자극적인 제목과 선정적인 사진 선택으로 이목을 끌어서 돈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겠지만 대표 언론들이 정권 나팔수처럼 흘러가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심훈 전집 2
심훈 지음, 김종욱.박정희 엮음 / 글누림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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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다지 굶주리고 헐벗었느냐??"
전 세계의 무산대중이 짓밟히는 계급이 모두 이 문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치 못하고는 결정적 답안이 풀려나올 수가 없다 하였다. 따라서 이대로만 지내면 조선의 장래는 더욱 암담할 뿐이라 하였다.
(...)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학적으로 설명은 되지 못하여 대단히 간단하나마 그럭저럭하여 그 당시 그 곳에 재류하던 일부의 지도자들과 또 그들을 따르는 청년들은 앞으로 나아갈 목표를 바꾸고 의식을 전환하였던 것이다.
그 새로운 길로 매진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굳은 단결과 의식을 전환하였던 것이다.(P81~82)

심훈의 대표작은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 정도일 것이다. 심훈 사후 80주년이 되는 2016년 심훈 전집 시리즈가 기획되었는데 이 책에 실린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 는 각각 1930년, 1931년에서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그러다 중단) 소설이었다.


「동방의 애인」은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으나 1920년대 상해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인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다.

박진은 인삼 장수 행세를 하면서 상해와 조선을 오가는데 정열과 모험심이 투철한 이다(그는 나중에 추천으로 군관학교에 들어가기도 한다). 배영숙은 기독교 장로의 무남 독녀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여인이다. 김동렬은 이지적이고 침착하며 치밀한 성격으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강세정은 학당의 학생으로 시위운동에 앞장을 서서 지휘하며 감옥을 오간다.

김동렬과 박진은 기미년 독립 운동으로 감옥에서 1년이 넘는 형기를 마치고 나온다. 그들은 조선이 아닌 해외로 눈을 돌리며 상해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넓은 무대를 찾자! 우리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힘껏 뛰어볼 곳으로 나가자!"
하고 부르짖은 것은 서대문 감옥 문을 나서자 무학재를 넘는 시뻘건 태양 밑에서 두 동지가 굳은 악수로 맹세한 말이었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정의의 심장이 뛰놀고 새로운 희망은 그들의 혈관 속에서 청춘의 피를 끓였다. (P36)

강세정은 둘이 상해로 훌쩍 떠난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 그 곳으로 갈 것을 예고한다.

저도 떠나겠어요! 당신네들이 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실 때면 붕대 한 조각이나마 감아드릴 사람도 필요하겠지요! 지난날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당신의 뒤를 따른다는 것보다도 저는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마땅히 밟아야 할 길을 찾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P49)

강세정은 참으로 강단이 있는 여성이지 않을 수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결심을 이행하는 모습이다. 아무튼 세 사람은 그렇게 상해에서 조우한다.
"지금 우리들은 지내는 게 말씀 아닙니다. 한 달이 넘도록 외상 밥만 무쪽같이 먹고···." (P64)
의기와 혈기로 호기롭게 떠난 청년들의 상해에서의 생활이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게다가 상해 임시정부는 내부 분열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여기 형편이 그렇도록 한심한 줄은 몰랐어요. 무슨 파 무슨 파를 갈라 가지고 싸움질을 하는 심사도 알 수 없지만, 북도 사람이고 남도 사람이고 간에 우리의 목표는 꼭 한 가지가 아니에요? 왜들 그럴까요?" (P66)

배영숙은 야학에서 강세정을 만나게 된다. 강세정은 조선에서 학당 지휘로 동무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했기에 영숙이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숙이는 세정이와 다르게 고생을 모르고 자라기도 했고 밝은 성격에 말이 많은 편이었다. 둘은 그렇게 연을 맺는다.

동렬이는 혁명이 우선이므로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하여 세정이에 대한 연모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더는 그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고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영숙이는 진이와 애정이 싹튼 상태였다. 하지만 둘은 환경이 너무도 달랐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자리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진이는 군관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둘은 헤어진다.

사진 속의 사관은 억지로 아내를 뿌리쳤다. 그때에 그의 인형과 같은 딸이 달려들어 아버지 무릎을 얼싸안고 앵두를 똑똑 따더니 (당신도 나와 같은 조그만 다른 계집애들의 아버지를 죽이러 가십니까?) 라고 쓴 자막이 비친다. 영숙이는 두 번 세 번 읽어보더니 진이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박진 씨도 군인이 되시면 수많은 젊은 여자의 사랑하는 남편을 죽이시겠지요?" 진이는 소매를 뿌리치고 화를 더럭 내며 "그 따위 하나님 냄새 나는 인도주의는 걷어치우시오. 우리는 눈은 눈을 빼서 갚으면 그만이지요!" (P97)

동렬이는 국제당 청년대회에 참여할 조선인 대표로 뽑혀서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대회는 사흘 후 크렘린궁전 안에서 열렸다. 장내는 모두 새빨간 포장을 두르고 중앙에는 레닌과 마르크스의 사진을 건 것을 위시하여 각국 말로 쓴 슬로건이 빽빽하게 가로세로 붙었다. 모여든 대표는 일백오십명 가량인데 방청자는 세 갑절이나 되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로 혹은 제 나라 말로 그 나라 그 지방의 정세를 보고하고 장래의 방침과 전술에 관한 토론을 하느라고 사흘이나 보냈다. 나흘 되는 날 동렬이는 조선말로 간단명료히 보고와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동양대학의 교수가 통역을 하자 만장은 박수로써 알아들은 표시를 하였다. (P130~131)

박헌영과 주세죽은 실제 연인이었는데 소설에서 김동렬과 강세정에 해당한다.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착하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심훈은 박헌영의 경성보고 동창생으로 4년 동안 같이 생활했고 상하이 시절 혁명운동에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았을 것이다. 세정은 소설 속에서 총명하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주세죽은 용모가 빼어났고 3.1 운동에도 참가했으며 상하이로 망명,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조직회에 가담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소설 속 박진은 김단야일 것이다. 동렬이의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묘사된 박진의 모델 김단야도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 망명 이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와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실제의 삶은 실제 역사를 통해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불사조」는 함께 들어 있지 않았다면 솔직히 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 친일파와 조선의 가부장제를 꽤나 잘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계훈은 조선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린다. 그의 아비는 장관이고 집안은 윤택하니 남부러울 것이 없다. 김계훈은 이미 정희라는 처와 아들인 영호가 있었으나 독일에서 유학을 하며 반주자로 줄리아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후로 조선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을 한다. 허나 스투핀이라는 연적이 나타나며 호시탐탐 줄리아를 노려대는 대는 통에 겸사 겸사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돌아온 뒤에 귀국 연주회를 하면서도 김계훈은 처와 자식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줄리아와 함께 지낸다. 정희의 오빠인 정혁은 김계훈에게 분노하고 그를 손보기로 결심한다.

'이제까지 우리의 목표는 너무나 컸다. 눈앞에 닥치는 조그만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엄청나게 큰 것만 바라보고 대들었다. 그 결과 상한 것은 내 몸뿐이다. 이를테면 사람 없는 벌판에서 맹수의 떼를 만났다고 하자. 우리는 눈앞에 달려드는 조그만 새끼 짐승은 업신여겨 내버려두고 큰 짐승이 웅거하고 있는 굴을 향해서 돌을 던졌다. 활의 시위를 당겼다. 그동안에 조그만 짐승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눈은 아직도 먼 곳을 바라다보나 손발이 어느 틈에 꼼짝도 못하게 된 바에야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어리석었다! 과연 어리석었다!' 혁이는 저 혼자 흥분이 되어 지난 일을 뉘우쳤다.
'발등 위의 불부터 끄는 것이 순서다. 내 신변에 달려드는 놈은 크나 작으나 닥치는 대로 물어박질러야 한다. 큰 것만 바라다보고 주저하다가는 나 자신이 먼저 거꾸러진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이상은 컸을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해야한다는 열망, 결의. 그러나 친일파들은 부를 늘리며 법 위에 잘만 살아가고 민중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압박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렇게 정혁은 먼 이상을 내려놓고 자신의 분노를 돌릴 대상을 찾게 된다.

어느 날 김계훈은 협박 편지를 받고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아버지에게 SOS! 김장관은 집안의 뒷배를 봐주는 삼정 경부에게 은밀히 사정을 알아보게 한다.

강흥룡은 인쇄직공으로 일하며 인쇄직공동맹에서 열성적으로 일하는 조직원이다. 그는 정희 유모의 아들이었다. 덕순은 여직공 대표인데 흥룡과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이다.

협박범이 알려온 장소에 삼정 경부가 나갔으나 놓치고 만다. 얼마 후 계훈의 음악회에서 정혁이 사회를 보던 날 일이 벌어진다. 갑작스레 바이올린 줄이 끊어졌고 공연이 중단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아까부터 제일 큰 목소리로 재훈이를 꾸짖던 젊은 사람은 돌아서며 선동연설이나 하는 어조로
"여러분! 저 따위 부르주아의 자식을···." 하다가 금세 말이 끊겼다. (P242)
삼정 경부는 부하와 함께 범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짐작 하에 대기 중이었고 붙잡힌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줄리아는 김계훈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에 대해서도, 그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실증이 난 상태였다. 김계훈은 그녀에게 빌어보았으나 어림없는 수작이었는데 그가 하는 넋두리라는게 어찌나 한심한지.
"내가 잘못된 것은 조선 놈으로 태어난 것뿐이요! 비극의 씨는 이십여년 전에 우리 부모라는 사람들이 뿌려 놓은 것이지 내야 무슨 잘못이 있고 죄가 있겠소?"
계훈이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아 조선! 조선 놈!"
하고 부르르 떨며 제 나라를 저주하였다.
줄리아는 수건으로 더러운 것이나 묻은 듯이 얼굴을 닦으며 '흥 남은 제 고국이 그리워 죽겠다는데 조선이 싫으면 제가 어디로 갈 텐고' 하고 속으로 코웃음 쳤다. (P252)
참으로 너무 찌질해서 보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줄리아가 떠나간 뒤 계훈은 스투핀과 같이 있을 거라는 질투에 사로잡혀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 질투가 방아쇠가 되어 결국 둘이 함께 있는 현장을 급습하게 되고 몸싸움을 벌이다 자신의 방아쇠에 팔을 맞고 만다. 피아니스트에게 그것은 치명상이었고 회복된다고 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친일파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고소는 하였으나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생각하니 또 씁쓸해졌다.

감옥에서 취조 및 고문을 당하고 한참을 지나 강흥룡은 다리 병신이 된 채 출옥한다. 덕순은 그를 기다려왔고 그렇게 둘은 재회한다. 김계훈을 노린 것은 정혁이었지만 강흥룡은 음악회에서의 발언으로 괜히 고문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한 셈이었다. 억울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정혁이란 인물은 우리 운동 선상에서는 벌써 과거의 인물인걸. 소 '부르'의 근성이 골수까지 밴 사람이라면 더 평할 여지가 없겠지요." (P403)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상론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기는 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그도 같은 부류의 인물로 취급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아이를 낳고 홀로 키우던 정희가 계훈이가 자신에게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집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대로 격이 난 채로 지나다가는 앞으로 무슨 욕을 당할는지 모른다. 도둑질을 했다고 모함을 할 수도 있겠고 나중에는 무슨 음행이나 있는 듯이 뒤잡을 것 같으면 지금보다 몇 갑절 되는 치욕을 당할는지도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다. '이 놈의 집에서 뭘 바라구 있었나? 본 건 다 보았다. 그러면 애매한 누명을 쓰구 쫓겨나기 전에 내 발로 걸어 나가면 고만이 아닌가' (P424)

불사조는 막장 소설 같아서 재미를 보장한다.

두 소설 다 연재가 중단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대표작 만큼의 흥행이 보장되었을 것이고 또 현재의 우리에게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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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이 된 조선청년 -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이학래 지음, 김종익 옮김 / 민족문제연구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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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래 씨는 오스트레일리아 법정의 재판에서 전쟁 범죄인이 되었다. 양칠성은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가해 인도네시아를 재침략한 네덜란드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리고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이상문 씨는 항일 비밀 결사인 고려독립청년당 당원으로 옥고를 겪었고, 2011년 11월 17일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전후의 행보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1942년 6울 포로 감시를 위해 모집되어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받은 군무원 3,016명의 일원이었다(P251).

일제 식민사학 총서인 『남양과 식민주의』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남방까지 뻗치게 되었을 때 피해는 현지인만 입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 등으로 이 곳에 왔기 때문이다. 실은 4월에 읽었던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루다가 8개월이 지나서야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희생자에 대한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여러 모로 복잡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고 1923년생 최영우와 자신의 의지로, 반강제로 또는 강제로 남방에 끌려간 많은 식민지 청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면사무소에서 남방에서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대. 월급 50엔에 2년 계약이래. 나도 갈 생각인데 너도 가지 않을란가?"라고 두 살 위의 선배가 권유했어요. 1942년 5월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열일곱 살이었어요. 이미 청년단과 소방단에 호출되었으니 어차피 어딘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시절이 시절인 만큼 집에서 한가하게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소방단은 단순히 '불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경단' 비슷한 단체로, 일정 나이가 되면 자동적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청년단과 소방단은 예전부터 조선에 있었던 조직이 아니라 전시 체제로 돌입한 뒤에 만들어졌다고 기억해요.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호출도 하고 나가지 않으면 왜 나오지 않았냐고 추궁했어요. 집합 장소인 학교나 면사무소 광장에서는 호출된 인원이 모여서 경찰서장으로부터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했어요. 그런 경우 군가는 으레 따르기 마련이었고요(P44~45).

일본이 전시 체제를 확장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은 이런 식으로 차출되었다. 모집을 하였다고 하지만 인원이 채워지지 않자 면사무소에서 반강제로 인원을 꾸려 강요로 보내기도 했다. 조선에 있다가는 어떤 형태로든 끌려갈 것이 보이는 상황에서 선택지가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그렇게 부산의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이 되어 타이로 향한다.

1944년 6월도 지나고, 당초 계약한 2년 기한이 지났지만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조선인 군무원 사이에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어요. 타이 어딘가에서 포로와 도망한 조선인 군무원이 나왔다는 소문도 돌았어요. 타이무앙에 있을 때, 1945년 1월 자바에서 발생한 고려독립당 사건을 듣고 놀랐어요. 조선인 군무원들이 일본군 상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총격을 가했다는 겁니다. 각 부대에 헌병대가 배치되고, 우리 군무원이 소지한 총도 회수했어요. 수용소 안을 순회하는 위병도 그때까지는 우리 군무원이 하고 있었는데, 다른 부대의 일본인을 불러서 하게 했어요. 우리 군무원은 한자리에 서서 감시하는 보초 근무만 서게 했어요. 일본인 상관과도 왠지 뜨악하게 되었고, "조선인 군무원 주제에"라며 모멸하고는 했어요(P57).
간신히 홍콩까지 와서 '이제는 됐다'고 생각하던 참에 체포된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된 제 경우는 전범 동료들이 겪은 경험 중에서도 최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체포되어 기소장을 받고, 기소장이 각하되어 귀환하는 배를 타고 홍콩까지 오고, 다시 체포되어 창이 형무소로 끌려 가고, 그 후 겪은 최악의 시련... 저는 약 3주 후인 1947년 2월 18일, 영국 군함에 실려 창이 형무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콘크리트 담을 다시 쳐다보며 전보다 훨씬 심한 중압감에 짓눌려 숨이 막힐 듯했어요(P77).

계약 기간이 지났지만 전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는 결국 종전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전쟁 재판으로 그는 1차 무죄를 선고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다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아무리 전쟁 범죄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변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1심이 최종심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잘못되었을지 모를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대부분의 수용소 관련 재판은 시내에 설치된 열 군데의, 방청객도 거의 없는 법정에서 진행되었어요. 재판을 위해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독방에 감금되는 동료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독방으로 옮겨진 동료에 대한 경비병의 폭행은 점점 심해졌어요.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취조를 받고, 자신의 증언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의 서류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은 백지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고요.
우리에게는 법정에서의 유일한 자기 변론마저도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기소 사실에 대한 반증마저 거의 허용되지 않았어요. 영어로 진행된 재판이라 애당초 언어라는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항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요. 재판은 그야말로 졸속 재판으로 1심이 곧 최종심인 군사 재판이었어요(P67).
이시이 대좌의 "대본영이 서두르라는 명령을 자신은 받지 않았다"라는 발언은 책임 회피일 뿐이지요. 소장이 대본영 명령을 모를 리 없어요. 왜 "수용소에 관한 문제는 내 책임이며, 군무원에게 책임이 없다"는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을까, 증언을 서 준 것은 고마웠지만 납득할 수 없었어요. 제 재판은 고소인은 단 한 명도 법정에 나오지 않은 서류상의 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소 사실에 반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스기마쓰 변호사는 피고는 가장 말단인 군무원으로 권한이 없었다, 중형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며 정상 참작을 요구하는 변론을 했어요.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측 검사의 논고는 낱낱이 통역되는 것도 아니어서,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났어요.
재판관은 기소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같았어요. 휴정하고 옆에 딸린 별실에 들어갔다 몇 분 후에 나와서 판결 이유는 달지 않고 '"death by hanging!(교수형)"이라고 선고했어요(P87).

이학래는 전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개월간 사형수로 수용되었다.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1년 가량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10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국 전쟁 범죄자의 형 집행 대상자로 일본은 (자신들을 위해) 전쟁에 뛰어든 조선인들도 포함시켰다. 형刑은 일본인이어서 살게 하면서, 보상은 일본인만 대상으로 했다. 필요할 때는 써 놓고 뒤통수치는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한국에서는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 군인, 정치인 등 상부 조직의 지도자들이 친일 부역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조선인 전범 재판자들에 대하여 '부일 협력자'라는 딱지를 붙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들은 조국에서 버림받고 사형을 받거나 포로들에게 가했던 행위로 고통받는 세월을 타지에서 보내며 자살하거나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거나 밑바닥부터 경제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1965년 12월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이 발효된 이후 '대일 민간 청구권'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피해로 한정되어 전범 재판에 의해 사형된 경우처럼, 전후 사망은 청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이들은 그야 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보상이 한국 국내 문제로 되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그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기에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때의 한일 협정은 여전히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주며 발목을 잡는 계기로 작용한다.

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후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등이 수면 위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12일 도쿄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P178). 저는 전범으로 고발된 인과 관계 및 일본 정부의 부조리한 처사에 주안점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① '모집'이라고는 하지만, 반은 강제적인 압력의 결과였다는 점
② 2년 계약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
③ 군무에 관한 책임을 전가했을 뿐만 아니라, 포츠담 선언 제10조,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제11조에 따라 '포로 학대 죄'를 조선인 감시원에게 덮어씌우는 포로 정책을 구사한 점
④ 청춘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고 전후 처리에서도 희생을 강요하면서, 국적 조항을 이유로 '외국인'으로 취급해 원호에서 배제시키는 등의 차별 대우를 한 점(P179~180)

2003년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다음 해 발효되어,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피해자 구제 움직임이 본격화었다.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받은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를 본인·유족 등의 신청을 기초로 한 조사를 통해 피해 인정 여부를 판단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저는 곧바로 신청 서류를 작성했어요. 본인 또는 유족이 직접 신청하지 않은 동진회 회원, 그리고 사형자·자살자는 동진회 명의로 제가 신청 서류를 작성해 모두 육십팔 명의 피해 인정을 신청했어요. 그리고 2006년 6월 먼저 서른한 명에 대한 강제 동원 피해 인정이, 그 후 나머지 전원에 대한 피해 인정이 이루어졌습니다(P215).

가해자와 피해자, 희생자의 구분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노동을 강요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타지에서 망령으로 떠돈 세월을 생각하면 가해자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잔혹했던 시간들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그 시간을 지나간 평범한 민중들에게 잔혹하지 않았던 일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저는 신년 수첩을 구입하면 우선 동진회 운동의 경과 등을 수첩의 맨 끝에 적어 넣습니다. 따로 유골 송환의 경과와 자살자에 관한 내용도 적어 넣지요. 매년 거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 베껴 쓰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해의 동진회 운동 방침, 또 가족의 연간 계획 등도 적어 넣습니다
2016년의 운동 방침의 첫 번째 내용은 "법안 재제출. 실현의 중대 고비"라고 적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는 한 그 실현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제 머리 속에는 항상 죽어간 동료, 그 중에서도 사형당한 동료들이 있어요(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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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2-19 0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한국 사람이어서 모르는 척하고 한국은 한국대로 모르는 척한 것 같네요 강제로 간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피해자 가해자 나누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그걸 생각하지 않았군요 친일문제는 제대로 정리도 안 했으면서...


희선

거리의화가 2022-12-19 09:25   좋아요 1 | URL
네. 일본도, 조선에서도 버림받았다고나 할까~ 오랜 세월 속을 끓이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윗선들은 친일파로 고위 공직에 있으면서 잘만 먹고 살았는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어쨌든 그분들도 그리 살길 원했던 것은 아니니까.
 
남양과 식민주의 - 일본 제국주의의 남진과 대동아공영권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7
허영란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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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갈래의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 또는 상상된 지리 공간에 대해 붙는 동양이라는 개념은 홀로 스스로를 표상할 수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기본적으로는 서양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자기를 구성한다. 한국에서 동양 담론은 혼종적이며, 전통적으로 형성된 중국과 일본의 시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성된 서구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동양이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행적 인식을 성찰적으로 돌아보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본 식민주의 역사인식의 한 축을 이루는 제국주의적 동양 개념을 역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한 실제로 등장했던 역사적 사례로서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아시아 각지를 떠돌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학의 망령과 대면하는 일이다 (P21~22).


남양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주로 통용되던 명칭으로, 중국 대륙 남부를 가리키는 중국의 남양과는 다른 것이다. 그 범위는 아시아 대륙 남쪽 태평양 일대의 남양군도와 도서부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범위다. 1919년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를 위임통치하게 된다. 조선과 남만주를 이미 차지하고 있던 일본은 동양은 이미 자신의 세력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양이 일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면서 이 지역 역시 일본이 관할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양자가 모두 세력 범위에 들어오게 되면서 일본은 남진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남양군도는 서태평양의 적도 부근에 넓게 퍼져 있는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가운데 오늘날의 북마리아제도 · 필라우 · 마셜제도 · 미크로네시아연방을 가리킨다.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은 18세기 초부터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다가 이어서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1914년 일본은 영국의 조력으로 독일이 지배하고 있던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1921년부터 1933년까지 국제연맹의 위임에 따라 일본은 이 지역을 신탁통치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지배했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후 위임통치의 법적 유효성이 소멸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1945년까지 위임통치를 지속하다가, 패전 후에 미국에 넘겼다(P56).



메이지 시기에 일본 대외관계에서 긴급한 현안은 북방에 인접해 있는 조선과 중국이었다. (...) 조선 및 중국의 문제는 일본의 존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을 지리적으로 영유해야 한다는 인식까지 나타났다. 그에 반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남양 지역은 긴급한 관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남양은 낭만적인 지사나 이탈자들이 흘러 들어가는 지역으로 인식되었기에 지리적 영유 개념 같은 것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P52).
다이쇼 시기의 남진론은 북진론과 더불어, 더 나아가 북진론을 보완하는 대외 팽창의 이데올로기로 재구성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 사이의 긴장이 소실되면서 남북을 가리지 않는 남북병진론에 가까워졌다. 심지어 남쪽으로의 발전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든지 발전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P61~62).
남진론은 1930년대 중반 '국책'의 형태로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국책의 기준」에서 외교와 국방을 통해 동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의 지분을 확보하는 동시에 남방 해양으로 진출하는 것이 '근본국책'임을 명시했다. 군사적 자원과 외교적 수단을 함께 사용하되 북방 소련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는 만주와 조선에 주둔하는 병력을 보강하는 등 국방 군비를 충실히 하고, 일만지(日滿支) 삼국의 제휴를 긴밀히 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며, 외교적 수단을 통해 영국 및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삼았다(P81).

남방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가운데 1940년 7월 22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출범했다. 곧이어 7월 26일 각의에서 「기본국책요강」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일본 · 만주 · 중국을 중심으로 하되 남양 · 남방까지 포함하여 자급적 블록경제를 확립한다는 '대동아 신경제질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근본방침으로 설정했다. 그에 따라 참모본부는 중일전쟁을 서둘러 해결하고 이어서 남방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시국처리요강」에 담았다. 독일 및 이탈리아와 결속을 강화하고 소련과는 협상을 통해 타협책을 모색하되, 전시 군비를 강화하여 전쟁 태세를 정비한다는 것이 기본구상이었다(P88~89).

일본군은 '자존과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했다. 나치 독일에 협력적이었던 비시 정권의 관할 아래 있던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과 무력 충돌은 없었다(P95).
일본은 프랑스의 친일 비시 정권의 비호 아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구미 경제 사이의 경제적 의존관계를 청산하게 만들고,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경제권으로 끌어들여 현지에서 풍부한 자원을 공급받는 것은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자원 종속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이 시기에 진행된 교섭에서 일본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경제협상이 결렬되는 것만은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측의 경계심이 고조되면서 1941년 6월 17일 제2차 '일란회상'은 일부 지역의 석유 채권을 일본에 제공하고 재교섭 의사를 서로 확인하는 수준에서 사실상 결렬 상태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달에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하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파기했다. 미국과 영국도 즉각적인 보복에 나섰다. 1941년 7월 25일에 미국은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그 이튿날에는 영국이 영국령 말라야 반도와 영국령 인도의 일본 자산을, 그 이튿날에는 네덜란드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8월 1일에 미국은 대일 석유 수출 금지조치까지 내렸다(P101).

일본은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난항을 겪는 상태에서 경제적 이익이 걸려 있는 네덜란드와의 통상협상이 결렬되고 미국이 석유 금수 조처까지 당하며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이것은 결국 일본이 태평양 전쟁까지 결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결국은 경제적 이득이 중요했다는 생각이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기 이전부터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는 이 땅에 매력을 느꼈고 나아가 경제적 이득을 노렸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는 부족해졌고 경제적 핵심 이권까지 뺏기자 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개시하게 되고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각지로 침공해 들어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요새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아시아 지배를 상징하는 거점으로 상징성이 있는 곳이었다.  싱가포르는 완강히 버텼으나 2월 15일 결국 점령되고 만다.
식민지 조선의 시인 노천명은 싱가포르 함락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2월 16일 밤에 「씽가폴 함락」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P106).

(...)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혹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
(P109)

일본군 동남아시아 지역 총사령부인 남방군은 1942년 5월 동남아시아 공략 작전 완료를 선언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독립국이던 타이를 제외하고 일본군의 점령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기존 통치자인 서구 제국이 밀려난 것이다.
일본군은 이 지역을 세 가지 유형 방식으로 통치했다. 첫째, 동남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이었던 타이와는 동맹 형태를 유지했다. 둘째,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종주국으로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이중 지배의 형태를 취했다. 셋째, 영국령 버마, 말라야, 싱가포르, 미국령 필리핀,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직접 군정을 실시했다(P120).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1920~1930년대에 민족주의운동과 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각국 사정에 따라 서구 제국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차이가 있었는데, 일본군이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동남아시아 각지로 침공해 들어옴으로써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일단 유럽 열강의 패배와 항복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민족주의적 각성과 자신감을 고양했다. 오래 기간 서양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이 지역 전역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군의 힘을 빌려 서구 제국을 몰아내는 것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P112)

일본은 아시아로 영향력을 뻗치며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겠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아시아는 열광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지긋지긋한 서구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비슷한 얼굴색의 아시아 문화권이나 이미 근대화로 앞서나가는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일본에 부러움을 보내는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에 대한 현지 주민의 기대는 높았다고 한다.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전쟁의 승기를 잃고 2차 대전 막바지까지도 남양군도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 오키나와를 비롯한 군인을 동원하여 보내고 위안부를 강제동원하여 이곳으로 보냈다는 명백한 사실을 통해 동남아시아인들과의 바람은 허망한 것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전쟁 수행과 긴밀하게 연결된 국익 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졌을 뿐, 막상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남방권은 지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복잡하다. 문화와 역사도 복잡하여 올바른 질서가 형성되지 못했다. 이런 남방권에 대한 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지배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고 남방권을 위한 100년 계획이 없었다. 그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려는 것이 대동아전쟁의 목적이다. 이 전쟁을 통해 남방권 주민은 황국의 새로운 지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동남아시아를 대하는 인식의 전제였다(P137).
일본의 군부와 정부는 전황에 따라 시책을 결정했으며, 예상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애초의 구상을 변화시켰다.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대응을 의미하는 '남방 작전'도 중일전쟁의 전개 및 유럽의 전황에 연동되면서 구체화되었다(P140).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상태에 있지 않았던 타이는 일본에 대해 협조적이었다. (...) 타이는 1938년부터 영국 프랑스와 거리를 두면서 일본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 결정적으로 가까워졌다. 타이으 피분(Phibun) 정권은 1940년 10월 일본군의 북부 베트남 진주를 인정했으며, 일본이 싱가포르를 공략할 때 타이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 대신 일본은 타이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의 국경분쟁을 타이에 유리한 형태로 중재하기로 약속했다(P114).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타이는 공수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942년 1월 25일에 타이는 일본 측에 서서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P115).

이 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은 부분 중 하나가 타이 피분 정권의 친일 행보였다. 게다가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할 때 그 편에 섰다니 놀라웠다. 타이 국민은 과연 이 역사를 알고 있을까, 아마도 이 시기 유일한 독립국이였는데 자랑스럽게 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시기 타이의 역사를 확인해봐야겠다라는 욕심이 생겼다.




'대동아공영권'을 지정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침략적 성격을 합리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대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영토 확장을 위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민족의 번영과 쇠퇴에 따라 영토가 확장되거나 축소된다는 민족 국경론이 결합되면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침략하여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일본지정학에는 아시아의 지리적 근접성과 동문동종, 황도사상이 내포되어 있다(P149).

5, 6장에서는 일본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학문 연구와 아시아학의 해외 교류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일본이 남진정책을 펴며 여러 문화단체를 세우고 식민지인 타이완, 남양 연구를 철저히 연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는 오래도록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앞선 정보들이 많았다. 일본은 이를 흡수하며 프랑스와 일본 관민단체는 긴밀히 교류하였다.이런 것들이 일본의 남진 정책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보론으로 이 지역으로 간 조선인들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남양군도로의 조선인 이주는 1910년대 후반 사이판에서 제당업을 시작했던 니시무라척식의 조선인 인부 채용이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당시 밀림으로 덮인 섬을 개간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제당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조선인 인부 400여명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1920년에 설탕 가격이 폭락하여 회사가 해산되자 조선인 인부들은 그대로 섬에 방치되어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P240). 1939년 이후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조직적 강제동원으로 조선인 이주 노동자의 수가 급증한다. 일본은 남양군도에 대한 척식사업에 힘쓰는 한편, 군사 목적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에 투입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오키나와인에 이어 조선인과 타이완인에 대한 조직적인 모집과 동원이 개시되었다(P242). 조선총독부가 알선을 의뢰하면 도 당국에서는 군에 통첩을 보내어 모집을 의뢰했다. 농업 노동자는 가족 단위로 모집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노무자는 거의 대부분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조선인 남자"가 모집 대상이었다. 그들은 품팔이 노동을 하더라도 조선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복지를 찾아 멀리 남양으로 품팔이를" 선택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해서 활동하는 조선인들이 있긴 하였으나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다고 한다. 남아 있는 자료는 일본 정부의 조사 자료인데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고 수치도 제각각이라는 한계도 지닌다.
동남아시아에서 이 시기에도 고려인삼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고려인삼은 조선 후기에도 이 지역으로 공급되었고, 20세기에도 각지에서 인삼 행상을 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의 한 조선인 인삼 상인이 1930년 말에 조선의 신문사로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당시 남양일대 즉 필리핀, 인도, 중국, 타이, 말레이반도, 네덜란드령 군도 등에는 조선인 동포가 약 500~600명 있으며, 그들의 직업은 교원과 학생, 관공리, 잡화상과 약종상 등에 종사하는 10여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려인삼 상인이었다(P246).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일본인의 이주는 늘었으나 조선인 이주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다만 현지의 화교들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접해 있어 반일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싱가포르는 중국과 가까워 중국 혁명파의 중요 거점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싱가포르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다(247). 1914년 10월 홍명희 등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 확보 기반을 마련하고자 싱가포르를 방문하였고 현지의 한인들과 중국의 혁명가들과 접촉하였다. 또 1920년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필리핀으로 이전하고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을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려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1931년 1월 흥사단의 양우조를 시찰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고민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양기탁과 김규식은 보르네오 섬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기도 했다. 거리상 가까운 중국인 화교들이 싱가포르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그리 놀랍지 않으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당시를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다양한 계획을 수립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에 놀랐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우리가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조선을 넘어서는 러시아 정도로 독립 운동 범위를 좁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고 1943년에는 학도병을 모집, 1944년부터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검사 및 강제 징집이 시작되었다. 1944년과 1945년 2년에 징집된 조선인만 약 10만 명에 달했다. 조선인 장병은 조선군에 배속되었고 분산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원래 북방을 겨냥하였으나 1942년 이후 남동태평양 방면으로, 동부 뉴기니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으로 전출되어 패전 때까지 그곳에 배치되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보과에서 1942년 포로감시원 모집을 시작한다. 모집 지원자가 적자 강제 모집을 이용하여 차출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일본군의 탈을 쓰고 동남아시아 전선 각지에 배치된다. 이들은 전후 전범재판에 서며 사형을 당하거나 형량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고통에 내몰렸다.

일반적으로 '동남아시아'라는 말은 영어 'South East Asia'로 번역된다. 1943년 8월에 열린 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이 '동남아시아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를 설치하기로 합의할 때 등장한 용어이다. 당시에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대륙부 및 도서부 동남아시아 전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P257). 이 동남아시아라는 용어를 일본도 그렇고 우리도 사용 중이다.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연구는 1990년이 되어서야 동남아시아 전문가 주도 하에 시작되었다. 서구에서는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지역 연구가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여기에 경제학에 대한 연구 조사도 이루어졌으나 한국은 정치학의 범위에서만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동남아시아 역사 전공자가 많지 않고 전공한 이들도 서구에서 공부를 하다 들어온 이들로 그곳에 축적된 학문에 의존하는 측면이 많았던 탓이다.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화된 동양은 스스로를 표상할 수 없었기에 서구라는 타자에 의해 표상되었다. 그리고 탈식민지 시대로 접어든 이후에도 구(舊) 식민지의 학문 연구에 미치는 식민지 종주국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식민지학의 전통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P260).

한국에서 동아시아는 오래도록 한국, 중국, 일본의 삼국과 베트남 정도에 한정하여 좁은 범위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의 연구도 식민지학의 구도 하에서 구축되어 있었던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모두 미래 탈식민주의 역사학을 위해 동남아시아 역사의 연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남진 정책과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동남아시아에서 행했던 정책들을 살피며 그들의 근대 역사를 간접적으로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의 근대 역사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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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2-12-16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2 서재의 달인 그리고 북플 마니아에 선정되신 것,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주말 내내 많이 춥다고 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거리의화가 2022-12-17 16:29   좋아요 0 | URL
하나님도 축하드립니다^^ 날이 많이 추운데 건강 유의하세요.

2022-12-17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7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7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12-19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일본군의 주적인 소련군이었죠.

러일전쟁 이래, 일본군의 주력이자
최강의 군대라 자평하던 관동군이
노몬한 전투에서 주코프의 소련군에
게 박살이 나면서 손쉬운 상대로 평
가된 남방작전으로 돌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초전의 승리에
도취된 일본군이 너무 무리하게
전선을 확대하다가 미군의 반격에
호되게 당하면서 남양군도 정복
이라는 신화가 부숴졌지요.

아무 의미 없는 살륙전에 대해
가장 핵심 주동자가 처벌받지 않
으면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의 장
애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2-20 09:24   좋아요 1 | URL
네. 전쟁 초기 아예 박살이 났다면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진 못했죠.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당시 서양에서도 매우 큰 충격이었구요.
그렇다 해도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열을 올리고 식민지민들을 이리 저리 차출하여 전쟁 도구로 만든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은 저도 아주 동감하는 부분이에요!

레삭매냐 2022-12-20 10:20   좋아요 1 | URL
러일전쟁은 당시 러시아와
1백여년 동안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이 일본을 극
동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
기 위한 파트너로 정하고 전폭
지지하면서 일본이 거저 먹은
셈이라는 분석도 있더군요.

러시아의 전비 마련을 위한
전시채권이 런던 금융시장에
서 영국 정부의 조종에 의해
기피되었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 통과 거
부 및 영국 식민지 항국에서
보급 거부를 당하면서 쓰시마
해전 무렵에는 거의 기진맥진
하였다지요.

일본 역사에서 가장 자랑이라
는 쓰시마 해전 승리의 배후에
는 그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