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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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한국현대사와 관련한 저작들을 내놓은 학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내부적 문제로 인한 갈등 폭발, 미소 등 외부적 세력에 의한 영향, 내부적/외부적 결과의 혼합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차적으로는 해방 후 5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서, 2차적으로는 남한에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구조가 뿌리내린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그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식민지에서 뿌리 내린 체제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의 문제(지주와 농민 간, 기업가와 노동자 간)는 내부의 갈등이 뿌리 깊었음을 인지하게 하며 통일 후 지향할 사회의 문제(이념)는 신탁 통치를 기점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군림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양반과 지주, 관료들을 포섭하여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자원을 동원하고 수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시기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농업이 상업화되고 일본은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의 조선 지주들은 토지 자본을 상업과 산업에 투자하며 배를 불렸고 일부 평민, 천민들은 사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한다. 산업의 중심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였고(제조업, 산업, 광업, 상업 중심의 공장이 많았던 북부 지방의 고용이 증가하여 남부의 농민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의 노동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제 동원이 시작되면서 만주나 일본 등 해외로 노동하러 가는 인구가 늘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 남으로, 만주나 일본에서 귀환한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의 기반인 토지를 잃었다.

해방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인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첫 주자인 송진우는 거절하였고 여운형이 수락하면서 과도적 행정기구 책임자로 국내 치안 임무를 맡게 된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군에 외국의 개입 없이 한국은 즉각 독립할 것과, 친일 세력은 배제해야 함을 전달하였다. 8월 16일 감옥에 있던 정치, 경제범이 석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들도 일본과의 협력는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요구는 설 길을 잃는다. 건국준위위원회(건준)은 전국적으로 지부가 만들어지며 산하 단체까지 조직되고 8월 20일 무렵이 되면 일본은 건준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미국이 9월 초까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일본은 남은 물품을 폐기하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마구 뿌려대는 등 남한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8월 28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 유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임을 선언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된다. 그 배경에는 조선의 자주성과 미국의 입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인공 지도부는 좌우익을 연합한 명단으로 구성되었다.
9월 16일 인공에 반대하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된다. 이들은 주로 대지주, 식민지 시기 각종 혜택을 받은 계층과 지도자급 인물들, 서구에서 유학한 엘리트 계층이 많았다. 한민당의 최대 목표는 식민지 시기 지주/농민 구조와 토지 지배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로 분화된 세력을 포용하고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1943~1946년에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다국적 신탁통치를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신탁 통치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이전의 식민 지배를 대체하고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식민지는 점진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와 한국으로 빠르게 남하하면서 미군의 상륙 날짜는 거듭 앞당겨졌고 소련에게 한국이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에서 국제협력주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과 한국까지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 아래 미국 제10군 24군단에 하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보낸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 침략의 희생자로 인정되었음에도 하지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패전국의 규정이 적용될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하지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 기구를 존속시키라 지시한다. 미군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새력을 차단할 방어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점령군은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기를 원했다.

1945년 미군정은 임정 관련 인물들이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지녔다 생각했다(미 국무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국인 단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미군정은 정치 단체 협의회를 군정 내 한국 정부를 구성하고 정무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기획하였다. 정무 위원회는 과도 정부로 기능하고 미군 사령관은 거부권, 미국인 감독 및 고문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생각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좌우익 결집을 시도한다. 그는 소련과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하였고 인공 참여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여운형과 박헌영 같은 좌익 계열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1일 인민당을 결성하고 이전의 인공보다 좀 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에서 임정 세력이 귀국하자 자체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에 인공 대표자들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인공대표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하지는 인공을 비판하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하지는 인공, 전평 등 좌익 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정은 기존 토지 관계가 유지되길 바라는 한국인과 결탁하여 미곡 경제 법령을 발표하고 미곡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이것은 미곡 유통 구조를 미군정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반발만 불러오며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렸다. 4대 강국이 한국에 5년 이내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신탁 통치 이전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우익의 반대, 이후 좌익이 찬성하며 극심한 대결 끝에 혼란을 불러온다. 송진우는 저격으로 암살되었고 김구는 파업과 시위를 이끌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이후 국내에서 핵심 입지를 잃음)하면서 반탁운동의 중심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간다. 또한 임정과 인공의 연합 노력은 좌익이 모스크바 협상 지지 입장으로 변화하자 중단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남북한 모두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고 대표민주위원을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내세운다.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해 다양한 한국 정치 단체들에게 주요 민주 개혁을 포함해 신정부가 추진할 정책을 합의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미군정은 우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실제로 28명의 정무위원 중 4명만 좌익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익이 차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임정의 좌익 계열을 아우른 민주주의민족전선이결성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미국은 정부 형태와 관계 없이 한국의 조속한 독립과 자치를 추진하고 소련과 협력해 미소양군 점령을 종결시키겠다 공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나 과도 정부 수립을 한국의 어떤 단체와 논의할 지 합의하지 못하여 무기한 중단된다. 미국은 대표민주의원을 남한의 유일한 자문기구로 사용 제안했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공위의 핵심 쟁점은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조직)가 남북한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을 공포하여 좌익 색출 단체를 해체하려 했고, 1946년 3월에는 군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으며, 1946년 5월이 되면 전국의 경찰을 이용하여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전권을 부여한다.

하지는 레너드 버치 중위에게 온건파를 포함하되 극좌, 극우 세력을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 형성을 목표로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운형과 박헌영이 좌익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였고 과도입법의원이 대표기구로 수립되었으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이었고, 다양한 계급 구성원(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의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이었기 때문에 지역 마다 정치 참여 수준과 토지 상황, 지리적 위치, 인구 이동, 근대화 정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거기에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기간도 그 결과를 다르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조직 구조가 알려진 지방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중앙의 건준과 인공과 비슷한 부서로 이루어졌고 조직부, 선전부, 치안부, 식량부, 재정부가 있었다.

1946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전국에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경상도에 집중되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강력하거나 지배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강원도 군에서도 발생했다. 봉기가 경상도에 집중된 것은 해방 뒤 이 곳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토지를 잃고 불만에 찬 농민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났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남한 전체의 철도 수송이 멈춘다. 나중에는 인쇄공, 전기 노동자, 전보국, 우체국 직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진다. 여기에 학생들도 참여하여 파급력이 커졌다. 이들은 쌀 배급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와 피난민들에게 집과 쌀을 배급할 것,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환경을 개선할 것,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였다. 군정청은 북한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부추긴다며 비판하였고 현재 한국인은 자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시위자 검거를 실시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부하면 즉시 해고하고 쌀 배급을 중단하겠다 엄포를 놓는다.

9월 말 대구에서 많은 공장과 기업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3천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격렬해진다. 이 과정에서 진압자는 발포를 하고 시위자는 지방의 공무원과 경찰을 살해,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는 등 과격해진다. 군정은 농민 봉기 진압에 경찰을 활용하였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과 봉기는 미군정의 곡가 정책으로 1946년 하반기 곡물가의 폭등, 통화 팽창, 실업이 불러온 결과였다.

소련은 1945년 9월 북한 내부를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기존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고위층인 친일 인사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피신하는 등 지주, 식민지 시대 관료, 경찰의 활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혁명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중앙과 지방의 요구를 결합, 중앙집권적 통제 방식과 대중 노선을 혼합한 방식을 추구하려 했다. 김일성은 지도자, 조직, 대중 노선을 내세우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움으로써 중앙적 조직의 기반을 마련한다.

북한은 빈농과 노동자들 중심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중앙에서 마을 밑바닥까지 하나의 유기적 명령 체제를 완성하였고 무엇보다 토지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이전의 지주는 소규모 토지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지주 제도를 뿌리 뽑고 하층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함으로써 정권에 호응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8시간 노동제, 사회 보험 제도 실시, 노동 조건 개선, 성별에 상관 없이 같은 노동에는 같은 임금을 지급, 남녀 평등법을 제정, 일본인 소유의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 관할 아래 투자와 생산활동을 하도록 장려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이루어낸다.
1946년 8월 29일 북로당이 결성되면서 북한의 내부 당파를 통합하게 됨으로써 북한은 남한과 명확히 다른 노선의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해방 뒤 첫해 한국의 북반부에서는 대부분의 한국인과 여러 서구 관찰자가 일제 지배가 끝난 뒤 필연적으로 나타날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달성했다.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 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다시 분배됐으며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완전히 왜곡되었던 식민지식 공장 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해방 뒤 1년 만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을 아우른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 없었던 통일성을 부여했다. 1946년 말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 19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된 대부분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그리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유한 수단이 된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모두 가차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달리 말하면 북한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영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반적" 경로를 따랐다. - P489

일제강점기 지배층과 통치 구조를 남한이 이식되지 않았다면, 하지가 버치 중위를 끌어들여 주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곱씹어볼수록 해방 이전의 식민지 지배층이 통치권력으로 이양되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군정의 헛다리와 판단 미스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생적인 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잘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1945년 8월부터 12월의 5개월이 역시 뼈아픈 듯 싶다. 이 때 이식된 결정들이 향후 바꾸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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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11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거리의화가님 이번 리뷰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심있는 이웃들을 두 갈래 길로 이끌듯 합니다. 리뷰를 읽고 지도처럼 활용하여 글의 큰 흐름을 잡는 이들과, 아니면 리뷰만 읽고 책을 ‘읽는 셈치고‘ 건너뛰는 독자로... ㅋㅋ

거리의화가 2023-06-11 17:51   좋아요 1 | URL
앗! 정리하다보니 너무 길어지긴 했네요. 어떤 분들이든 제 리뷰에서 도움을 얻으시면 감사하겠죠^^ 그래도 제 리뷰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직접 읽어보셔야!ㅎㅎㅎ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15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의 기원이군요 외국 사람이 이걸 쓰다니... 다른 나라 사람이 그때가 어땠는지 쓴 걸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테니... 그런 거 본다고 알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5 09:11   좋아요 1 | URL
워낙 유명한 저자입니다. 한국현대사, 그리고 한국전쟁사 관련하면 이분이 바로 생각날 정도로요!^^;

NamGiKim 2023-09-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좋은 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8 09:07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죠. 한국전쟁사를 다룬 책들 중 분기점이 된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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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식민지 시기에서 얻은 구조적 문제와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사건들이 영향을 준 결과 발생했다. 1권은 식민지 시기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산업 구조의 분화와 동원, 해방 이후 1946년 말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가 확고하게 분화된 배경과 사건들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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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앤 전집 세트 - 전8권 (완역본) 빨간 머리 앤 전집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유보라 그림,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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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만화 속 여성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버림받고 처참한 모습이어서 불만이었다. 그러다 앤을 만났을 때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긍정적이며 누구에게도 당당한 주체적인 여성이어서 좋았다. 위로받고 싶을 때 늘 앤을 떠올린다. 디자인&구성 마음에 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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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조성우 옮김 / 너머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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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의 이 시기의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안되고 어째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약 4~5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왕조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인데 그런 만큼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삼국지를 읽으며 ';왜 이리 복잡해!' 했는데 '이건 약과였구나' 싶다. 동시에 중국인들은 과연 이 때의 역사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슬며시 일었다.

후한 말 중국은 혼란기에 접어든다. 황건적의 반란을 시작으로 위, 촉, 오 삼국이 분열했다가 서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은 오호십육국 시기가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1세기 가까이 이어진다. 남쪽은 두 세기 동안 유송, 제, 양, 진의 남조가 이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2권은 흔히 우리가 '위진남북조'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조'로 통칭한다.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왕조별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에 따라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고 부르는 반면 서구 학자들은 ‘분열의 시대(the Age of Disunion)‘ 혹은 ‘초기 중세(the Early Medieval period)‘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분열의 시대'는 어디 갖다 써도 분열의 시기에 통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위진남북조'라고 하기에는 중국이 어느 한 왕조로 통일되었다는 관점을 강요하는 것이라 불편하다. 그래서 저자는 중국 정치세계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반영하여 '남북조'라고 통칭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북조'라고만 하기에도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전한대에는 황하 상류 황토 고원과 황하 하류 범람원 사이의 지리적 구분이 아주 중요하였다. 한대 역사 전체가 이 두 지역 사이 균형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서술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쳐 자발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점차 많은 중국인이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이에 따라 황하 유역 내 구분보다 다른 구분, 즉 황하 유역과 양자강 유역 사이의 구분이 중요해졌다. - P29

이전까지만 해도 양자강 이남 지역은 중국에서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략과 잦은 홍수로 후한 시대를 시작으로 4세기 초까지 북중국에 있던 많은 인구가 남방으로 이주한다. 이들(한족)은 강남 지방을 농업에 적합한 자연 환경으로 만들고 토착민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 나거나 한족에 흡수되었다.

한반도의 역사에도 시기 별로 지배층의 명칭이 다른데 중국의 이 시기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시대'라는 명칭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귀족'을 쓰지 않고 '유력 가문'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 특이하다. 내 생각에 너무 일반적인 용어를 쓴 것 같기는 하지만(유력 가문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단어인 것 같아서) 일부 가문의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쓴 듯하다.

귀족의 시대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 동안 황제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덕분에 일부 가문이 조정과 지방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 어떤 가문도 몇 세대 이상 조정을 지배할 수는 없었지만, 일부 가문은 수세기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사회 지배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가문이 중국에서의 높은 지위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고, 그리하여 사회 지배층과 조정 간의 관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 P69

이 시기 유력 가문은 여러 문화 및 문학 활동을 추구(시 짓기, 서예, 글쓰기, 사상)하며 이전의 지배층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활동이 새로운 관료 선발 방법에 녹아들며 국가의 중앙 집단을 재구성했다. 또 가족 묘지를 만들고 한식(청명절)에 가계의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족보를 작성하면서 가문을 친족 집단으로 규정 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친족 집단이 점차로 확대된 현상은 가훈과 족보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구두로 남기거나 혹은 짧게 글로 적어 남긴 유훈은 이전 시기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대의 문헌 일부는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자신의 가문을 차별화하며 가문의 번영에 요체가 되는 행동 방식을 명기하고 후손에게 주지시키는 장편의 글 중 현존하는 최초의 사례가 등장한다. - P342

한나라는 징병제를 폐지한 이후 비한족 기병과 죄수, 지원자로 군대를 꾸려 나갔다. 후한 말에는 소작인, 유목 군대, 투항한 반란 세력들로 군사를 충원했다. 이후에는 소작인과 비한족 기병으로 그 대상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지주와 친족 집단의 군사 역량은 위축되었다(소작인들이 차출되니). 5세기 이후에는 군사력의 중심이 지배층 중심에서 다시 조정 기반으로 되면서 황제의 권력도 강화된다.

중국에 중앙아시아 및 인도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불교는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도교는 기존의 전통 신앙과 맞물리면서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터였다. 불교가 흥기하고 도교가 상호작용하면서 중국의 종교세계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첫째로 한대인들의 모호한 사후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각 층위가 겹겹이 쌓여 생생한 모습의 지리적 관념을 갖춘 사후세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귀를 비롯해 새로운 귀신의 존재를 도입하면서 불교는 중국의 사후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불교는 영혼의 세계를 윤리적인 성격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한대인들이 저승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믿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장 보편적 원리는 올바르게 매장되면 죽은 사람은 저승에서도 이승의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행위가 아니라 매장 의례가 사후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그 이후 중국의 사후세계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생전의 행위에 따라 보다 좋거나 나쁜 존재로의 환생, 혹은 천당이나 지옥으로의 전생이 결정된다는 식의 단순화된 업의 교리였다. 세 번째 변화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상장 의례와 망자를 구원하기 위한 명절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불교 의례는 조상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불교의 낙원인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와 승려의 영적인 힘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P412~413

위진남북조 시대의 글쓰기와 문학은 같은 시대의 중국 문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율적 영역의 개창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가 생겨나고, 아울러 교단 종교, 도시 내 사원과 원림, 산지에 자리한 별장과 은자의 동굴 등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문인들은 고전, 철학, 역사가 제시하는 윤리적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율적인 미적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글쓰기와 문학적 관념의 이러한 새로운 영역은 ‘현학玄學’의 등장으로 지적인 토대를 얻게 되었다. - P427

이 시기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에 세운 왕조는 이후 수, 당 시기에 많은 유산을 남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한반도의 고대 국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의 북방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서 더욱 그렇다. 중국의 북방이 분열되었던 이 시기는 그래서 고구려에게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4세기에 걸친 분열기를 지나 수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뒤이어 당(618~906)이 들어서면서, 한의 멸망 이래 변모해왔던 중국 사회에 다시 단일한 황제 지배가 행해졌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 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 P481

하버드 중국사의 특징은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리, 제도, 가족(및 친족) 구조, 종교, 문화와 예술 등 주제 별로 사안을 다룬다. 시간 순의 역사를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읽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이 책으로 이 시기를 특징 지은 후에 세부적인 흐름의 역사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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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06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아 이 시리즈
를 한동안 사서 모으긴 했는데...

결국 완독한 책은 없네요.

기록을 찾아 보니 모두 3권을 샀
네요. 남북조는 무려 6년 전에 샀
다는 :>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은 <원명>
이구요. 한 번 살펴 보려고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7 10:11   좋아요 1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 시리즈 관심가지실 만합니다^^ 물론 서구 학자들의 관점이 중심이라 한반도나 주변 국가에 대한 서술은 아쉽지만 주제별로 다루어 시기를 정리하기 좋더군요^^
 
민중사의 지평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본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아시아민중사연구회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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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인식 관심의 하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주체 및 테마로 그 경계를 확장해야 할 때라는 인식이었다. (...)
다른 하나의 관점은 소수자 정치의 구체적 양상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에스닉적인 소수자 주체에 더 유의하였고, 둘째, 앞서 새로운 주체테마가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장에 시선을 두었다면, 소수자 정치는 소수자의 자기결정권과 그것의 다수자와의 관계성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
마지막 인식 관심은 과거의 경험 재현과 관련된 민주주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과거 자체가 확고한 진실로서 정립해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거나 기념하는 사업이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다. - P5

한국에서 민중사가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80 년대였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민중이 대두하면서 기득권에 입장에 쓰여진 역사를 넘어 민중(대중)의 역사로 나아갈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일단 작년에 역사문제연구 48호를 통해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제안을 통해 선행 학습한 것이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민중사는 간단하게 말해서, 마이너리티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한일 민중사 연구자들이 2017년 이후 2020년까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며 내놓은 결과물을 정리한 것으로 두 번째 결과물이다(첫 번째 결과물은 2015년 나왔다).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는 새로운 민중사의 '민주주의적 주체'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에 주목한 내용이다. 핵심 키워드는 여성의 몸(식민지 여성 신체에 대한 종속), 도쿄 고가네이 지역의 환경, 광주항쟁에서 빈민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2부는 민주주의와 소수자 정치로 말 그대로 '소수'에 주목한 내용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단절되고 분리된 채 생활을 한 오키나와(민족 내 차별), 나리타 공항을 둘러싼 갈등(환경 vs 개발), 일본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사회운동을 통한 재일조선인의 문제(민족 외 차별)를 다루고 있다.
3부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문제다. 광주미술인협회의 활동, 해방 이후 동학농민전쟁이 정치에 맞물리는 양상, 오키나와의 선거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항을 다루었다.

특히 재일 조선인 기독교 교회에 대한 사회 운동, 나리타 공항 문제의 역사,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미술운동은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새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던 챕터였다. 새로운 민중사가 나아갈 길과 관련한 주제만으로 따지면 1, 2부의 내용이 핵심을 파고든다는 생각을 했으나 3부는 특히 기억과 역사를 정치에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소수자 문제와 민중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이것을 확장시켜 나아가면 민주주의가 다수에 기반한 대의 정치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소수자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소수자 문제는 결국 불평등의 문제 아니겠는가. 젠더 불평등, 부의 불평등, 환경의 불평등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민중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공부할수록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를 찾아내고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국내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국가 간 연구자들의 네트워크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연구 결과물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물론 대중서도 꾸준히 나와주어야겠다. 이런 결과물들이 많아야 독자들의 선택지도 넓어질 것이다.

민중사의 전개로 보아 민주주의는 일국사적 경계 속 사건으로서의 운동이나 선거로 이룰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과 민중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나고 경합한 가치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역사적으로 보는 작업에서 민중사 관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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