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적절한가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고 있다. 민족과 인종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과 보편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럴 때 세 권의 책을 만났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에서 오늘날 국가나 공동체의 연합 형태를 '민족'이라는 개념 하에 두고 이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상상된 공동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민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그가 말한 '상상된 공동체'가 인쇄 혁명, 언어, 글로벌 자본주의로 가능해졌다는 이유에는 납득이 간다. 

그러나 국가의 국경선은 그저 물리적으로 구분된 선일 따름 아니던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단일 민족으로 규정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의 문화권으로도 규정짓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다문화, 인종적 관점에서도).

오래전부터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포비아, 9.11 이후 확산된 이슬람 포비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 사회에서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뿌리 깊은 인종 혐오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문제가 결합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과연 다문화사회에서 보편적 관점이 가능한가. 


인류학적인 정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민족을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들조차도 같은 겨레를 이루는 이들 절대 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일조차도 거의 없으리라. 그럼에도 각자의 가슴속에는그들의 교감(communion)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 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 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 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상상된 공동체>, P25~P28


<나의 타자들>에서는 민족은 주도 문화를 확립하고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그 패권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 의견도 같다. 정상성에서 내쳐지고 타자화되는 상황에서 자기 밥그릇은 기필코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식민지 국가의 주권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제도 하에 묶여 난타당하던 여성들의 목소리 등등.


민족이라는 주도 문화의 확립은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패권이 없다면, 그리고 자기 주도권이 흔들린다면 패권을 위해 먼저 싸워야 한다.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 <나의 타자들> 2장 中


물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의 카르텔을 답습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기득권은 나라를 빼앗겼을 지언정 자신들의 이권을 기필코 놓지 않았다.  

식민지 인종주의는 왕조적 정당성과 민족적 공동체를 용접하고자 시도했던 ‘제국‘(Empire)이라는 관념의 주요 성분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선천적으로 유전되는 우월성의 원리를 일반화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그 국내적 지위는 해외 영토의 광대함에 (얼마나 불안정하든)기반을 두고 있었다.

식민지마다 목격되는 것은 드넓은 저택과 미모사와 부겐빌레아가 가득 피어난 정원, 급사들과 남자 하인들, 정원사들, 요리사들, 유모들, 하녀들, 세탁부들, 그리고 무엇보다 말들이라는 조연급의 대부대를 배경에 거느리고 시를 읊는 부르주아 귀족(bourgeois gentilhomme)"이라는, 으스스하게 우스운 활인화(tableau vivant)였다. 젊은 총각이라든가 하는 이런 식으로 살림을 꾸리지 않았던 이들조차 농민 반란 전야의 프랑스 귀족에 맞먹는 화려하게 의심스러운 지위를 누렸다. - <상상된 공동체>, P227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은 오늘날 다문화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그저 문화 문제만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인종주의, 여성 차별이 더해져 여성들의 주장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연결되었다고 말하지만 점점 더 유한한 자원에 자본주의에 따른 이익으로 자국중심주의는 강화되고 있다. 특히 미국, 중국, 유럽 등 강대국은 국경을 강화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결집하는 중이다. 여기에 개혁주의자들의 논리가 분산되어 모여지기 힘든 것도 그 배경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역차별 논리와도 싸워야 하고, 보편주의냐 다문화주의냐에 의한 선택을 두고도 고민해야 하는 지경이다. 예를 들어 히잡 논쟁이 대표적일 것이다. 히잡을 썼다고 강간을 당한 여성이 여성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이슬람 혐오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히잡을 착용한 이유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강요일 수도 있다. 선택에도 여성이 종교적 이유로 선택한 것이냐 아니면 강간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냐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강요한 경우는 문화적이나 종교적 이유, 가부장제에 의한 논리에 의한 경우가 있겠다. 이처럼 히잡을 착용한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를 다른 문화권 또는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제가 생긴다. 생각할수록 뚜렷한 해답은 없고 생각을 회전시키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P164


추가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일본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신 매매에 대한 언급이었다. 인신매매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신매매 모집 브로커는 현지에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 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사기로 유인하고 모집이 끝나면 서류를 준비해 일본에 입국시킨다. 여성들은 이 때 이미 빚을 지기 시작하여 브로커를 거칠 때마다 수수료가 붙어 거액의 빚을 안게 된다. 국내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생각날 수밖에 없고 이는 과거 몇 십년전 일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신매매 이민 여성에 대한 사회 담론은 일본에서 주로 인신매매의 강제성 여부를 둘러싸고 촉발되었다. 하나는 이민 여성의 자기 선택과 자발성을 강조하는 담론이다(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하는 주장). 이는 성 산업에 뛰어든 여성을 쉽게 비난하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작취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보는 젠더적 시각이다. 여기에서도 '성매매로 돈을 버는 일탈한 여성'이라는 전통 여성상 틀에서 본 관점과 자국 사회에서도 가난한 하층의 여성이라는 계급주의적 관점이 존재한다. 

이 중 어떠한 하나의 관점으로는 적절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결국 해결법도 세심해야 할 터.


질문에 대한 결론? 답을 얻지는 못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니 이렇게 읽으면서 정리해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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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그간 읽었던 책들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과도 맞닿아 있어서 깊이 있게 읽기가 더 가능했던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답이 답이 아닐 수 있는거구나!‘ 를 매 페이지를 넘기며 깨닫고 있습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앞으로도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듣고 세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곧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4-08-24 17:3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이 이 달에 제가 다른 이유로 읽어야 했던 책과 연결선상에 있어서 더 폭넓은 시선을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수학처럼 정답지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분야의 학문, 현실 세계의 일들은 정답을 요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죠.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실 사회에서 하나의 정답은 강요이자 폭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답은 없어도 정의로운 방향으로 모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