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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되찾은 시간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되찾은 시간 1⌟에 해당하는 12권은 잃시찾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마음이 가장 편안했다. 그동안은 문장들을 붙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무기력했던 내게 그나마도 내용의 재미(!)도 알려준 권이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의 통일은 19세기 말에 비로소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비록 궁정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1세기 이전 시민 혁명을 경험한 국가였다. ‘귀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내려오고 ‘개인’, 다시 말해 ‘시민’이란 존재가 부각되고 그런 구성원들’의 국가’라는 개념이 부상한 것은 ‘근대’라는 개념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주로 책에서는 프랑스 대 독일이라는 대립적 관계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1차 대전은 자칭 민족국가 삼국 vs 연합군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사회적 가치들이 충돌한다.
동물의 몸이나 인간의 몸, 다시 말해 그 각각이 단 하나의 세포에 비해 몽블랑처럼 거대한 세포의 집합체가 존재하듯이, 개인으로 조직된 거대한 집합체인 국가가 존재한다. 국가의 삶도 개인으로 조직된 집합체를 확대하면서 그 구성 요소인 세포들의 삶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포의 신비와 반응과 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국가 간의 갈등을 얘기할 때에도 의미 없는 말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 심리의 대가라면 그의 눈에는 서로 대립하는 개인들의 응집된 거대한 덩어리가 단지 두 성격의 갈등에서 비롯된 분쟁보다 훨씬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비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거대한 덩어리를 키 큰 남자의 몸이 적충류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비율로, 다시 말해 1밀리미터의 입방체를 채우는 데 1만 마리 이상을 요구하는 비율로 볼 것이다. 이처럼 얼마 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작은 다각형들로 그 주변까지 채워진 프랑스라는 거대한 형상과, 최근에 통합되어 예전보다 더 많은 다각형들로 채워진 독일이라는 형상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 P160
화자는 공쿠르의 미발표 일기를 읽으며 글쓰기에 대한 생각, 자신의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돌아본다.
어떻게 기록 문학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관찰하는 작은 사물들 아래 그 실재가(멀리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나 생틸레르 성당 종탑이 그리는 선 안에 담긴 위대함, 마들렌의 맛에 담긴 과거 등) 들어 있으며, 또 사물들로부터 실재를 끌어내기 전까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
삶처럼 단순하며 어떤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예술은 우리 눈이 보고 우리 지성이 확인한 것의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중 사용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그런 예술에 전념하는 자가 어디서 자신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인 기쁨의 불꽃을 발견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 P73
나는 기록 문학이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록 문학, 일명 르포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분명 있다. 문학이 반드시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오히려 기록 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상황 자체가 개인과 관련 없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일까. 프루스트가 생각하는 기록 문학과 내가 생각하는 기록 문학의 차이가 크구나 생각했다.
12권은 전쟁이 발생하면서 생기는 개인과 사회적 변화가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프루스트다운 그림 같은 묘사의 기법이 들어가 있을 뿐이지 사실적 상황에 기반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게으름 때문에 할 일을 매일 다음 날로 미루는 습관이 있는데 어쩌면 죽음도 같을 거라고 상상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날 내가 맞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대포를 어떻게 무서워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따로 형성된 폭탄 투하와 가능한 죽음의 관념은 독일 비행체의 횡단에 대해 내가 그려보던 이미지에, 흔들리는 하늘의 안개 물결로 내 시선에 조각난 모양으로 대롱거리는 그 비행체 중 하나에서, 비록 그것이 살상 무기임을 알았지만 별과 같은 천상의 존재로만 상상하던 비행기에서 어느 날 저녁 우리를 향해 폭탄이 떨어지는 움직임을 목격할 때까지는 어떤 비극적인 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 P218
전쟁은 개인에게는 벼락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갑작스런 전쟁에 개인들은 당황하기 마련이고 내 앞에서 폭탄이 날아올 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1950년에 살아 있었다면 전쟁을 겪었을테지만 지금은 기록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 당시의 나였다면 전쟁은 불행한 벼락 같은,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의 이미지(또는 기록으로 그리던 이미지)가 실제가 되는 일은 그렇게 찰나일지 모른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명철한 의식은 우리 시대에만 존재하지 않고 시대마다 존재했네. 베수비오 화산 근처 도시들의 운명을 우리도 내일 겪게 되리라고 생각하네만, 그 도시의 주민들은 성경에 나오는 저주받은 도시와 같은 운명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네. 누군가가 폼페이의 집 벽에서 ‘소도마, 고모라’라고 쓰인 계시적인 비문을 발견했으니까.” - P226~227
전쟁은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애국심과 충성을 불러일으키기도,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광기로 발현되기도 한다. 샤를뤼스 씨가 보여준 병적인 공포는 마치 어떤 죽음의 선고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두려움의 기준이 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의 기준에 상응한다고 믿는 것은 부정확하다. (…)
몇 명의 고객들은 정신적 자유를 되찾는 것 이상으로 갑자기 어둠이 덮친 거리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렸다. 하늘의 불길이 쏟아지는 이들 폼페이 주민들 중 이미 몇몇은 지하 묘지처럼 컴컴한 지하철 복도 속으로 내려갔다. 사실 거기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원소처럼 모든 것을 적시는 어둠이 그 효과로서 몇몇 사람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자아내어 평소에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르게 되는 그런 애무의 영역으로, 쾌락의 처음 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들어가게 한다. - P274
100여 년 전 배경의 전쟁을 떠올리며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떠올랐다. 누가 그런 고통을 마주하고 싶겠는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일상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