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당구치기 현상이 서쪽 초원과 오아시스, 사막에서 일어나고있었다. 카라한이 카를루크를 날려 버린 뒤, 이번에는 여진족인 금나라에게 쫓겨난 카라 키타이(서요)가 야율대석의 지휘 아래 카라한을 삼켜버렸다. 거기에 또 칭기즈 칸에게 쫓긴 나이만 왕자 쿠추르크가 서요를빼앗은 것이다. 이 쿠추르크도 머지않아 칭기즈 칸에게 패해서 죽고 만다.
야율대석의 서정(西征)은 그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한 커다란 역사적의미를 지닌다. 그때까지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오아시스에 나타난 사람들은 투르크계가 아니면 이란계, 아니면 아랍계 정권이었다. 이 방면의 - P22

큰 정권 중에 몽골계 정권은 사실 망명 집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야율대석의 서요가 최초이다.
이후 칭기즈 칸이라는 거대한 몽골계 군국 정권이 이 지방을 뒤엎는데, 야율대석의 서요가 그 기선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카라한, 셀주크, 위구루, 호라즘 등 이 시기의 투르크계 여러 민족은대개 이슬람화했는데, 몽골계의 서요 카라 키타이는 마지막까지 이슬람화하지 않고 동방 시대부터의 불교신앙을 지켜나갔다. - P23

문화에 면역성이 없는 여진족은 곧바로 한문화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민족 고유의 야성적인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의 한족(漢族化)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요나라의 경우는 ‘한(漢)의 분위기가 연운 16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 P76

가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이원제(二元制, 二院制) 정치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을 취하고, 나아가 하남으로 진출한 금나라는 ‘한‘의 것이 주류였다. 이원제의 정체(政體)를 폐지한 것은 그것으로는 이제 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한적(漢的)인 중원 국가로 변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황제는 여진족의수장이라는 성격보다 한적 중원 국가의 천자라는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