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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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무렵 즈음 어느 주택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파트가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서민들이 익숙하게 사는 그 곳이다. 응팔 시리즈를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지만 주변에서 들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 무렵의 동네를 생각나게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만화가 있는데 '우주소년 토토'다. 1983년에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무렵이 시간적 배경일 것 같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만은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분노가 쌓이니 뻔뻔해지고 감정적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이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다가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도 녹록치 않은 것이 보여서 마음이 불편했다.

폭력을 보고 자라는 아이의 미래의 내면은 상처와 얼룩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내가 미쳐!"라는 소리를 항시로 듣고 "내 명대로 못 살고 죽을 거야"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나는 왜...'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집에 온 여자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나는 이 말을 하는 여자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듣는 아이들은 어쩌라는 걸까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팽겨쳤다. 남자는 열등감과 열패감을 분노로 포장해 여자들을 때리고 아이들을 내던졌다.

안방의 아랫목 쪽 벽 중간쯤에, 두 짝의 미닫이로 된 벽장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섯 개의 계단, 그 계단의 끝에 어슴푸레 떠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묵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찬 다락의 어둑신함과 그 안에 서린 매캐하고 몽롱한 냄새, 모든 오래된 것의 안도감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어둠과 먼지, 오래된 시간, 이제는 쓰일 일 없이 버려지고 잊힌 물건들 사이에서, 그 슬픔과 아늑함 속에서 우리는 둥지 속의 알처럼 안전했다. - P27

아이들이 그 속에서 스스로를 안전하게 생각하는 공간이란 다락방이라는 공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이것 저것 열어보며 닫힌 것을 열어 제꼈다. 하늘을 날고 싶었던 동생도 그 곳에서는 잠시 자유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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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4-09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한 언어폭력인데요. 가끔 아니 너무 자주 부모들은 진짜 생각없이 아이들에게 언어폭력을 휘둘러요. 그게 폭력이라는 생각도 없이 말이죠. 갈수록 주변에서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는 거 같아서 정말 안타까워요.

거리의화가 2023-04-10 09:36   좋아요 2 | URL
지금하고는 시대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폭력은 사라지질 않고 있어서 읽을수록 씁쓸함이...ㅠㅠ 바람돌이님은 아이들을 많이 만나니 더 많은 걸 느끼시겠네요.
저 말을 하는 어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 언어폭력이라는 걸 인지조차 못햇을 거라고 봅니다. 그냥 자신의 한탄이자 신세 타령인데 그게 아이들에게는 내면을 갉아먹는 소리였겠죠. 이런 것들이 쌓이면 분노 조절 장애나 폭력을 가하는 아이로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악순환이네요ㅜㅜ

건수하 2023-04-10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에 읽었던 두 단편도 화자가 여자 어린이예요.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라니 단편에선 그렇게 직접적이진 않았는데.
장편은 아무래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네요.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냥 넘기고 싶기도 하고...

거리의화가 2023-04-10 09:42   좋아요 1 | URL
단편은 좀 소프트한 표현이었나보네요^^; 아무래도 단편은 짧은 이야기로 작가의 메시지를 보여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까.
읽기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에 무뎌지지는 않아야 하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어떤 것이 폭력적인 표현임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하님께 감사 인사 전해요^^

건수하 2023-04-10 09:45   좋아요 1 | URL
감사는요… 거리의화가님이 관심가지셔서 저도 기뻤어요.
단편에서는 어른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주로 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했던 것 같아요.

위에 신세한탄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하고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게 조심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애초에 상황이 그리고 성격이 긍정적이어야 될 것 같네요.. 🥲

거리의화가 2023-04-10 09:50   좋아요 1 | URL
이 책도 아이의 시선입니다. 다만 어른들의 대화들도 등장하는데 뼈아픈 말들이 좀 많았어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폭력에 더 무딘 시대였으니... 좀 더 나아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