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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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주의가 촉발한 가정과 공적 경제의 분열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열등함을 확고하게 굳혔다. 지배적인 선전물에서 '여자'는 '어머니'와 '주부'의 동의어가 되었고, '어머니'와 '주부' 모두에는 치명적인 열등함의 표시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흑인 여성 노예들 사이에서 이 어휘는 어디에도 확인할 수 없었다. - P41

흑인 여성 운동, 그리고 흑인에게 해방이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전미여성협회의 주요 멤버들은 백인 중간계층의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여성 참정권을 부르짖으면서도 계급 불평등(노동자)과 인종 불평등(흑인 등)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성평등과 인종평등과 계급평등은 함께 가지 못했고 1890년대 미 남부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면서 흑인들의 투쟁은 더 험난해질 수 밖에 없었다.

흑인 여성의 일자리는 대부분 가사 노동이고 일부는 노동자로 일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밑바닥층이어서 저임금 등 낮은 환경에 시달렸다.
그들이 매달린 것은 교육이었다. 백인 여성들이 설립한 학교에 입학하여 백인 학부모들로부터 질타를 받거나 고발당하는 등 불평등을 감내해야 했으나 그들의 교육열은 계속되었다. 한국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 난리통에서도 가르칠 공간을 만들어 교육을 진행했던 대한민국을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아이다 B. 웰스와 메리 처치 테럴은 둘 다 흑인 여성 운동의 지도자들로 각자의 입장은 달랐으나 그들이 있지 않았다면 흑인 여성들의 투쟁은 힘겨웠을 것이다.
아이다 B. 웰스는 철도에 탔다가 불평등을 목도하고 철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친구들이 린치 사건에 연루되면서 린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인물이다. 메리 처치 테럴은 노예 소유주 아버지 밑에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한 환경에 있었기에 오히려 이런 운동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었을 인물이기에 놀라웠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흑인 여성 운동을 대부분 지지하지 않았던 시기에 남성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프레더릭 더글러스, 20세기 W. E. B. 듀보이스 같은 인물이 있었다.

여성 권익 찾기 운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권리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상태였다.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온 이후 1900년에 사회당이 창당될 무렵에서야 여성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사회당은 흑인의 근본적인 억압에 대한 것은 외면한 채 프롤레타리아 투쟁만을 외쳤기에 한계가 있었다. 이후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이 구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흑인의 특수 위치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가며 흑인 강간범에 대한 신화가 어떻게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지 궁금했다. 11장이 되어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이 책을 읽기 잘했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순간이었다.
노예제 시스템에서 매질과 더불어 강간은 흑인 여성과 남성을 모두 제어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인 장치였고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억압 무기였다. 남북전쟁 이전과 직후만 해도 흑인 강간범 신화의 사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1872년 KKK 같은 인종주의 자경집단들이 득세하면서 린치는 백인의 우월함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조치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린치는 남부의 백인 여성들을 성폭행한 흑인 남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방법으로 설명되고 합리화되었다.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자기 여자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동이라도 용인되었고 그 동기는 숭고함으로 포장되어 백인 여성을 강간한 흑인 남자들에게는 린치를 가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이는 그야말로 야만적인 억지 논리의 끝판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가 결합하며 흑인 강간범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몇 십년간 우생학의 선풍적인 인기도 이를 고착화시키는 데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쉽게도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끈덕지게 달라붙어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게다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지배 체계인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효과적인 장치로 작동하는 탓에 성차별은 이어지고 폭력과 강간은 사라지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노동에 몸담은 여성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하위에 있으면서 지배 당하고 가정에서는 주부로 착취 당한다.

앤절라 Y. 데이비스가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이유도 결국 여성들의 불평등을 목도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혁파되어야 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공산주의는 이제 더는 주요 체제가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책은 흑인 여성 운동의 역사를 살펴 보고 그 과정에서 인종과 성별, 계급이 어떻게 엮이면서 진행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쓰였음은 감안해야겠지만(이 때만 해도 공산주의는 유효했으니까) 아주 유용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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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2-11 2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바마가 집권 했을때 미국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트럼프의 극우, 인종주의가 가능했던걸 보며 의문이 많았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해소된것 같습니다. 화가님 수고하셨어요!^^

거리의화가 2023-02-12 08:55   좋아요 2 | URL
현 바이든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한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자본과 권력, 힘의 논리는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이전의 여성 운동의 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어요. 저도 상당 부분 궁금증이 해소된 것 같아요. 미미님도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락방 2023-02-13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유용한 읽기 였다니 다행입니다. 리뷰중에 언급하신 흑인의 강간신화 부분은 저도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어느 페미니스트(기억이 잘 안나요)의 에세이에서 <앵무새 죽이기>에 대해 유감을 표현한 걸 읽었었거든요. 왜 굳이 그 흑인이 누명쓴 것을 백인 여성에 대한 강간으로 골랐을까, 그래서 왜 ‘강간당했다고 거짓말한 여자‘를 만든걸까 하는거였죠. 저는 그 말이 꽤 설득력 있다고 느꼈거든요. 왜 하필 여자가 강간당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흑인에게 누명을 씌울까, 하고요. 그런데 오늘 거리의화가 님 이 리뷰를 읽다 보니 그게 흑인의 강간신화를 말하고자 했던 거였겠구나 싶어요.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2-13 14:26   좋아요 0 | URL
저는 흑인의 강간 신화라는 것을 책을 읽으며 알게 됐어요. 초반에 그걸 언급하길래 읭? 해서 궁금했는데 다행히 11장에서 완벽한 이해는 아니지만 기원을 알 수 있어서 도움이 됐습니다.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종과 성별에 대한 차별은 어느 정도 인지했었지만 계급과의 연결 고리까지 거론해주어 앞으로 페미니즘 책 읽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락방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