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어린이와 한국의 근현대 - 이미지와 담론, 현실

‘언니’의 곡절 - 한국의 근대 가족과 여자 어린이 노동

1930년대 무렵부터 조선에는 언니/누나가 아이를 돌보는 그림과 사진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어머니의 노동 현장과 아이를 돌보는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옆에 돌보아줄 어른들도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체로 아이를 키우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1930년 이후가 되면 이것이 통하지 않게 된다. 쌀의 반출량이 많아지면서 농가의 소득으로 다른 것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부가 수입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엄마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 도생의 길로 뛰어들어야 했고 여기에 언니 또는 누나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사진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아이를 업은 어린 소녀였다. 부모를 잃거나 헤어져서 떠도는 아이들이 무수히 많았다고 하는데 이 와중에 동생을 돌보아야만 하는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몇 십년동안 이 시스템은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회화에서는 아이가 아이를 업고 돌보는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다. 김홍도나 신윤복, 김득신의 풍속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많은 경우 어머니나 할머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머니나 할머니가 계속 돌보고 있는 아이들은 누군가 그들의 생리적 요구에 즉각 반영해야 하는 유아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들은 생업과 노동의 현장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 P13

조선총독부는 농촌진흥 운동을 추진하면서 농촌 빈곤의 원인을 조선인의 민족성이나 전통적인 습관과 가치관으로 지목하고 이를 개조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부인이 야외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활에 자각이 없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조선의 부인들을 교양시켜 노동하게 함으로써 전가근로를 달성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과제였다.
1930년대 가족 노동력 동원의 극대화는 학교교육과 정책 홍보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실제 가마니 짜기나 농촌 수공업 제품 제조 등 부업은 물론이고 농업 생산 현장에도 여성 노동력 투입이 증가했다. - P17

여자 어린이들의 가사와 돌봄노동은 당시 농촌 가장들의 시각에서 ;일하지 않는것‘으로 규정되었다. 동생을 돌보고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뒷받침하는 것은 ’언니‘ 혹은 ’누이‘인 여성 가족 구성원의 당연한 의무로 ’노동‘이 아니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들이 가사사용인으로 고용된 사례들은, 어린이들의 노동이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간접적인 수준을 넘어서 이들의 노동 자체가 실질적인 임노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집안에서 소녀들의 가사와 돌봄노동은 실질적인 여성 임노동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 P29

1930~32년의 조선농회의 농가조사에서 나타난 학령아동의 취학 상황을 살펴보면 아들은 집안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취학 비율이 달라지지만(자작농 30.4%, 자소작 28.6%, 소작농 23.5%), 딸의 경우 소작농은 물론 자소작이나 자작농이더라도 대부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 P30

결국 육아와 가사노동이 여자 형제들에게 집중되는 동안, 어머니들은 농업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이것은 남자 형제들의 취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 ‘언니’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확립된 농촌 가족의 생존 전략은 이후 한국 근대 가족 이야기의 기본 구도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약화되지 않고 더욱 확대되었다. 게다가 이런 일하는 ‘언니’들의 모습은 담론과 이미지 속의 여자 어린이상에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실제 가족 전략이 강요한 희생, 또는 헌신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각 다르게 기억되었던 것이다. - P31

해방 이후에도 어머니들이 생산노동에서 벗어나 가사와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은 마련되지 않았고, 어린이가 어린이를 돌보는 풍경도 여전했다. 초등교육 기관이 많이 설립고 여자 어린이의 취학이 급격히 늘어났어도, 언니들이 동생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손위 여자 형제가 나이 차이 나는 동생들의 양육과 가사의 일부를 담당하는 양상은 한국전쟁 중 더 확대되었다. 1950~1951년 겨울 피난길에는 동생들을 업은 수많은 ‘언니’들이 등장했고, 피난 생활 중에 부모들이 식량을 구하려 떠난 뒤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소녀들의 몫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장면들이 한국의 소녀, 혹은 언니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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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1-12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체로 아이를 키우는 공동육아가 농촌사회에서는 흔했던 것 같아요. 핵가족화, 도시화 되면서 부모와 아이 사이가 더 가까워지기는 했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여성의 육아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보거든요.

근데, 거리의 화가님 이런 책도 읽으시네요! 완전 멋져요!!! @@

거리의화가 2023-01-12 09:20   좋아요 2 | URL
이 예시는 농촌 현장을 들었지만 산업화로 인한 구조적 변화가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때문에 여성은 부담만 더 늘어났죠. 이 구조적인 문제가 여전히 가부장제 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산업화와 맞물려 여전하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역사 잡지인데 구독한지는 꽤 되었어요. 한 3년쯤 되었나봅니다^^;

그레이스 2023-01-12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ㅠ
근현대사 속 여성들의 삶이군요
전 공장에서 일해서 오빠, 남동생 공부시킨 여동생, 누나들의 애환이 생각나네요

거리의화가 2023-01-12 09:21   좋아요 2 | URL
예전에 1960년대 가발공장, 섬유공장 등에서 여성들이 참 많은 국가 산업화에 기여를 했고 그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죠.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작업 환경은 엄청 열악했구요. 고생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희선 2023-01-13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가 아이를 업은 사진이라 하니 바로 《몽실 언니》가 생각나네요 아마 이건 1930년대 뒤 이야기일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3 09:3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안 그래도 이 칼럼의 도입 부분에 <몽실 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독 아이를 업은 소녀가 많은 사진이나 이미지가 왜 익숙한걸까 그 기원을 쫓는다고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