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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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reportage) 선집을 편집하기 위해서는 르포르타주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또 좋은 르포르타주를 선정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 P12
과거에 관한 모든 지식, 추측이 아닌 확실한 지식이란 "내 눈으로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모아놓은 구경꾼, 여행가, 전사, 살인자, 희생자, 그리고 직업기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다음 장점은 문체의 힘이다. 목격자의 기록은 숨이 빠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 정교하지만 생명이 없는, '객관적'으로 재현된 역사 서술과 다르다. - P12

르포르타주의 현장성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현장 기록만으로 제한하는 것은 너무 답답한 노릇이다. 황급한 기록은 예리한 위기감을 전해줄 수 있지만 역시 너무 황급한 것이기 쉽다. 그래서 사건으로부터 한참 지나 작성된 자서전이나 여행기 등에서도 많이 선별해 실었다. - P13

현실로부터 후퇴하려 하는 언어의 타고난 속성에 저항하는 노력이 훌륭한 르포르타주의 요건이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르포르타주라 하더라도 언어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날 수는 없다. 르포르타주 역시 언어의 한 부분이다. '텍스트'만이 서로 뒤얽혀 있을 뿐, 접근할 수 있는 별도의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리가 현대 비평론에 횡행하고 있다. 설령 이 공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훌륭한 기록자는 이 공리에 대항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 자기 기록을 독자들이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건의 특징을 잘 뽑아냄으로써 기록의 전달을 넘어 목격의 전달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 P15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현장을 보고 겪은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기록자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투키디데스, 플라톤, 아메리고 베스푸치,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렉상드르 뒤마, 폴 고갱, 조지 버나드 쇼, 로자 룩셈부르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들의 글도 담겨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한 목격자의 기록', '정부 첩자의 보고', '어느 독일 사병', '《타임》 특파원'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2500년의 역사를 하나의 책에 담았다니 이를 모으고 편집한 것이 놀라웠다. 총 181개의 글이 담겨 있고 각 글들의 분량은 짧은데 사건을 훓어보기에는 충분하다. 하나의 기록을 읽고 사건에 관심이 생겼다면 관련 책이나 동영상, 자료 등을 이용해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이 책의 목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대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중 중세와 근세의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1800년 이후의 역사가 챕터의 2/3 정도를 차지한다. 원서의 꼭지 수로 60%, 분량 중 70% 정도만 책에 담겼는데 한국 일반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기 어렵거나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제외해서라고 한다.

책의 장점이라면 사료 소개에 그치지 않고 사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자의 해설이 각 기사 뒤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원 저자의 주석은 기사의 앞머리에 편저자주로 담겨져 있지만 거의 없거나 짧은 경우가 많아서 만약 역자의 해설이 뒷 부분에 없었다면 기사를 이해하고 배경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책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추가 자료를 찾으면서 공부도 되었다.

네로는 안티움에 있었다. 그는 집 잃은 이재민들을 위해 마르스 광장을 개방했다. 아그리파의 공공 건물과 자기 정원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많은 난민들을 위해 긴급 수용시설도 만들었다. 오스티아와 인근 도시들로부터 식량을 운송해 왔고 곡식 가격은 1파운드에 4분의 1 세르테르스 이하로 묶였다. 그러나 이렇게 서민 위주의 정책을 취해도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하나의 풍문 때문이었다. 도시가 불타는 동안 네로가 자기 개인 무대에 올라가 현재의 재앙과 과거의 재앙을 비교하면서 트로이 멸망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풍문이었다. - P44~45

'네로=폭군' 으로 단순 치환하여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 날은 로마에 화재가 발생하여 숲과 각종 집들을 태우는 등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타키투스의 네로에 대한 설명을 보면 네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과장되거나 조작된 기록으로 피해를 입은 측면이 있어 보인다. 기록의 말미에는 로마의 열네 구역 중 다치지 않은 것은 넷뿐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얼마나 큰 화재였는지 알 수 있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모든 물가가 낮아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나 어떤 재산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에 40실링 값을 부르던 말 한 마리를 반 마크(6실링 8펜스)에 살 수 있었고, 살찐 황소 한 마리에 4실링, 암소 한 마리에 12펜스, 암송아지는 6펜스, 살찐 숫양은 4펜스, 암양은 3펜스, 새끼양은 2펜스, 큰 돼지 한 마리를 5펜스에 살 수 있었으며, 한 스톤(약 10킬로그램)의 양털은 값이 9펜스였다. - P100

14세기 흑사병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1/3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이 기록을 통해 발견한 재밌는 지점은 흑사병 이후의 경제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염병의 결과는 경제의 충격이었다. 사람이 줄어드니 생산량도 줄었을 것이고 이는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생산은 해야 하는데 사람이 줄어들어 인건비는 상대적으로 상승하고 임금노동은 발전하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이를 기록한 인물은 헨리 나이튼이다. 13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사병 발생 한참 이후이기 때문에 직접 겪은 일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록이나 구술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잔인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 싸움터에 살아남은 자들은 자기편 사람들의 시체는 모두 매장하지만 적의 시체는 잘라서 먹는다. 포로로 잡은 자들은 집으로 데려와 노예로 삼는다. 어떤 때는 악마 같은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떤 의식을 행하며 그들을 활로 쏘아 죽이고 잡아먹어 버린다. 그들은 이런 짓을 앞에 말한 노예, 그리고 노예가 낳은 아이들에게 행한다. 그들을 수없이 훈계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그런 습속을 고쳤는지는 알 수 없다. - P144

기록의 주체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다. 1502년 남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의 기록인데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아시아의 동쪽으로 인식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유럽인들은 처음 만난 이들을 자신들처럼 문명인으로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은 문명인이고 이들은 미개인이라는 발상, 그것은 후에 수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우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손에 촛불을 들고 밧줄을 타고 내려가자 시체들을 밟고 돌아다녔다. 온갖 종류와 크기의 시체들이 있었고, 작은 토기 항아리 안에 처리되어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항아리들은 큰 시체들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인간의 신체가 어떻게 그런 물질로 변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온갖 부위를 다 부러뜨려 보았고,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여러 개의 머리와 손, 팔, 그리고 발을 집에 가져왔다. - P208

1625년 존 샌더슨이라는 런던 상인이 이집트 카이로에 방문했다가 피라미드 등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충격적인 만행과 약탈. 남의 나라 물건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헤쳐도 되는 건지도 의문이고 막 가져간다니... 이것을 보면서 문화재 개념이 없던 한국의 과거도 떠올랐다. 신라 왕릉, 백제 무령왕릉 발굴 등에서 보인 진지하지 못했던 발굴 모습 말이다.

나는 그들이 위협했던 대로 다시 데려가 고문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병사의 연약함을 알아보시고, 행여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짧은 투쟁만을 내려 주셨던가보다. 나보다 굳센 분들, 월폴 신부님이나 사우스웰 신부님 같은 이들에게는 그분들이 승리를 거둘 정말 힘든 싸움을 내려주셨다. 그분들은 '짧은 동안에 먼 길을 갔다.' 더 긴 세월을 살아가며 내 부족한 점을 채우고 내 피로 일거에 씻어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하나의 영혼을 수많은 눈물로 씻어내도록 남겨졌다. 이것은 주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니, 그분의 눈에 좋으신 것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P237

16세기 초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톨릭교회는 대응을 필요로 하였다. 예수회는 가톨릭 개혁 중요 주체 중 하나로(우리 나라 천주교에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1534년 세워져 1540년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1570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교황청의 사이 갈등이 벌어지면서 잉글랜드에 가톨릭교회를 부활시키려고 할 때 예수회에도 이 일에 관여하게 된다. 이 글은 헨리 가네트라고 예수회의 가담 인물 중 하나였다. 16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고문은 줄어드는 추세였다고 하지만 이 글에서 보는 대로 종교 갈등으로 인해 추세가 잘 지켜졌을 것 같지는 않다.

함께 가는 브라만들은 여인에게 결단과 용기를 보이도록 권면하는데, 많은 유럽인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무슨 약을 마시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약을 마시면 신경이 마비되어 죽음의 준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두려움과 걱정을 막아 준다는 것이다. 불행한 여인들이 불에 타 죽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느냐 여부는 브라만들의 이해 관계에 직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팔과 다리에 끼고 있던 팔찌와 발찌, 귀걸이와 반지 등은 화장 후 재를 뒤질 브라만들에게 소유의 권한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여인의 신분과 재산 수준에 따라 이런 장신구들은 금제가 아니면 은제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구리나 주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걸친다. - P258

1650년 경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쓴 글이다. 인도 브라만 여인들은 남편이 죽으면 애도를 하고 며칠 후 삭발을 한 뒤 몸을 꾸미던 장신구를 없애버리고 홀로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싫어 대부분의 여자들이 장례 시 남편과 함께 불에 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과거의 순장이 생각나기도 해서 씁쓸했다. 실제 브라만들은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을 장려했다고 하지만 그 여인의 삶은 대체 무엇인지 곱씹게 되고 이내 착잡해진다.

군중의 열광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죄수들이 달아나고 애커먼 씨 집이 벽돌 벽의 껍데기만 남은 뒤, 폭도들은 집 안의 불길을 다른 용도에 쓰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가 빨갛게 달아올라서 문과 창문이 마치 화산 분화구처럼 보였다. 폭도들은 얼마간 애를 쓴 끝에 채권자 감옥에도 불을 지르고 문을 부숴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탈주시켰다. - P323

영국의 조지 폭동에 대한 글이다. 7년 전쟁(1756~63)을 통해 식민지 싸움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대영제국이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억압과 제한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가톨릭 구호법을 1778년 이후 취하게 되었다. 당시 의회 내 힘이 없던 조지 고든이 대중의 반 가톨릭 정서에 기대 가톨릭 구호법 철폐를 주장하며 소동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영국의 가톨릭교에 대한 탄압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특히 아일랜드와의 갈등은 종교로 인한 것이 크다. 뿌리 깊은 종교 갈등의 시작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당신의 몸에 상당한 기형이 생긴 것은 이 노동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요?
열세 살 때 생기기 시작했고 그 후로 심해졌습니다.
공장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체격과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었나요?
네,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 중 누구 못지않게 바른 체형이었습니다. - P390

1815년 영국 의회 조사단에 제출된 한 여공의 증언 기록이다. 당시 공장의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했고 기형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보고 있자니 한국의 과거의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열악함이 오버랩되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그나마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함이 생긴다.

버지니아주 피터스버그 부근에서 토지와 기타 재산의 매각장에 갔다가 뜻밖에 노예를 파는 공개 경매를 구경했다. (...) 이제 자기들이 팔려가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영원히 떨어지게 된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보인 반응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여자들은 갓난아기를 낚아채듯 안고 소리를 지르며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오두막과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남자들은 절망감에 싸여 말없이 서 있었다. - P417

1846년 미 버지니아에서 엘우드 하비는 노예 매매 현장에 와 있었다. 아메리카 노예는 그야말로 상품이었다. 그들은 주체로서 기능할 수 없어서 사고 파는 매매의 객체로서 취급받았다. 특히 아메리카 지역의 노예는 학대 피해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 인격적인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노예제 자체는 사라졌다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노예는 여전히 존재하기에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옷과 옷깃, 애들 양말, 부인용 둥근 모자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피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나무기둥의 칼자국에는 칼날에 묻어 옮겨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너펄거리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너무나 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 P456

세포이 항쟁은 1857~58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조직한 인도인 군대가 일으킨 봉기를 영국인들이 '세포이 항명사태Sepoy Mutiny'라 부른 사건이다. 당시 벵골에 13만명의 세포이 병력이 있었는데 인도 전체 영국군 주둔 병력은 불과 2만 3천명이었다고 한다. 탄창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재료로 한 윤활유가 발라져 있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수령을 거부하자 이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세포이 병사들이 감옥에 쳐들어가 이들을 구해 오면서 항쟁이 시작되었다. 종래 영국의 인도 지배가 얼마나 문화적 이해와 종교적 이해가 무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빗물에 흠뻑 젖은 천 조각 아래 동료들 틈에 끼어 찢어진 그물침대에 누워 있던 내 눈에 로턴 장군의 키 큰 모습이 들어왔다. 장군은 잿빛 여명을 배경으로 진흙탕 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페인군이 참호와 요새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산티아고 데 쿠바를 향해 미국군이 밤새 행군해 온 길이었다. 4세기간의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스페인의 서반구 지배를 종결시킬 전투가 이제 시작할 참이었다. - P503

1898년 스페인과 미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선전포고에서 강화조약까지 6개월도 걸리지 않은 전쟁이지만 이 전쟁 이후 스페인의 힘은 약화되고 미국이 열강 세력에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7월 1일 쿠바의 엘 카네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가 벌어진다. 약 6천 명의 미군과 3천 명의 스페인 군과 쿠바 동맹군이 맞붙었다고 한다. 왜 쿠바에서 전투가 벌어졌을까. 미국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당시 경제 개발이 활발하던 스페인령 쿠바를 빼앗아 오기 위함이었다.

6월 28일은 모든 세르비아 사람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특별한 날이다. '비도프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다. 1389년 옛 세르비아 왕국이 터키에 정복당한 암셀펠데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 또한 2차 발칸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터키군에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와 오랜 예속의 빚을 갚은 날이기도 하다. 새 압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바로 그 날짜에 세르비아의 턱밑에 와서 우리를 짓밟는 수단인 군사력을 시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 - P551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침공의 구실을 얻으면서 1차 대전의 발발로 이어진다. 암살 범인은 19살 프린치프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전쟁, 프랑스 전쟁 승리를 이끌며 근대 독일의 문을 열었다. 그가 사임할 때까지 독일은 일류 강국의 대열에 섰고 과거의 지역 맹주였던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주도권 하에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이끈 철혈 정책은 민주적 요구를 무시하거나 압제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자들의 불만과 요구는 커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을 것이다.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는 극심한 전쟁 피해를 겪었고 이후 경제 대공황까지 이르게 하는 기원이 된다.

매일 오후 독일의 과자가게와 찻집에 프랑스 손님들이 몰려드는 것은 볼 만한 풍경이었다. 독일인들은 아주 좋은 과자, 사실 기막히게 좋은 과자를 만들었는데, 지금처럼 마르크 값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인들이 제일 작은 프랑스 동전, 1스우짜리로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독일 과자집에 몰려든 프랑스 젊은이들이 크림을 채운 보드라운 독일 케이크를 한 조각에 5마르크씩 배가 터지도록 꾸역꾸역 처먹고들 있는 돼지우리 같은 광경은 환율의 마술이 만들어낸 것이다. 문 열고 30분이 지나면 과자집 재고가 동나버린다. - P623

글의 표현력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2년 9월 19일 기록한 글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배상금 지불 문제로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락하였다. 기록의 장소는 독일 국경에 있는 스트라스부르다. 이곳은 1870년 전쟁으로 독일 땅이 되었는데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 땅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당시 《토론토 스타》 특파원으로 유럽에 체류 중이었다고 한다.

방송에서 펄 하버 근무자들은 모두 즉각 출근하라고 하고 있어, 하고 말했습니다. 포치로 나가보니 하늘 높이 대공포화의 폭발이 보였습니다. 내 입에서 "저런, 저런!" 소리가 튀어나왔죠. 우리 집은 4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집어타고 5분인지 10분인지 뒤에 기지에 도착했지요. 난장판이었습니다. - P677

하와이 오아후섬에 정박해 있던 미 태평양 함대는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이 글은 1941년 12월 7일 16살이던 진주만 해군 조선소에서 배관 견습공으로 일하던 존 가르시아라는 사람의 기록이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시아 침략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과의 대결은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이 항의하고 석유 금수조치를 가하자 대결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기습 공격이 감행된 것이다.

문이 열릴 때 시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근육이 매우 수축되어 있어서 서로 떼어내기가 몹시 힘들었지요. 죽음을 앞두고 몸부림을 심하게 쳤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가스실에 시체가 1미터 반 높이로 꽉 채워져 있는 광경을 본 사람은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 모두 악마의 졸개들이 되어 있습니다. 살로니카에서 온 계리사고, 부다페스트에서 온 전기 기술자고, 다 똑같아집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일하는 동안에도 몽둥이와 고무봉 세례가 계속 쏟아집니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자들은 구덩이 앞에서 사람들을 쏘아죽이고 있습니다. 가스실이 꽉 차 있어서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한 시간 반이면 모든 작업이 끝납니다. - P747

1944년 8월 유대계 루마니아인 의사의 증언 기록이다. 이 곳은 악명높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아우슈비츠 주임 의사로 임명받아 수감자에 대해 각종 의학 실험을 감독한 요제프 멩겔레(1911년 생)는 전쟁 후 남아메리카로 탈출했단다.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 당시의 상황이 그려져서 힘들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피해를 당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가스 처형장에서 사라진 많은 이들. 그리고 그 전 수없이 많은 의학 실험들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는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일 것이다.

어린아이였다. 거의 발가벗은 몸에 오물만이 잔뜩 덮여 있었다. 아이는 가마니 틈에 헤쳐 낸 보금자리 속에 자기가 배설한 오물 위에서 누워 있었다. 팔꿈치를 짚고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지만, 갈라진 입술을 말아 올리고 피 흐르는 잇몸을 드러내며 성난 고양이 새끼처럼 신부를 향해 으르렁대고 침을 뱉을 기운은 있었다. 목은 빗자루 손잡이보다 많이 굵지 않았고, 굶주린 아이들 특유의 엄청난 올챙이 배였다. 빈약한 목과 튀어나온 큰 눈을 보면 둥지 안의 새끼병아리가 겁먹은 모습과 같았다. 신부가 조심스레 팔에 안아 트럭으로 데려오는 동안 이 끔찍스러운 존재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할퀴고 깨물려는 미약한 시도를 계속했다. (...) 오전 11시에 신부가 고아원에 돌아올 때는 트럭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바로 전쟁의 진짜 희생자들입니다." - P804~805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의 기록이다. 르네 커트포스라는 사람의 기록인데 당시 블레델 신부는 서울 강변로 골목 곳곳에서 수없이 남겨진 고아를 발견한다. 부모를 잃고 정처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죽은 부모 위에서 울부짖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아이들을 목격한 신부님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 같다. 전쟁이 벌어지면 안되건만 여전히 이 세계는 전쟁을 멈출 줄 모른다. 과거는 말해주고 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근대 역사 기법에 익숙하다. 사료를 증명하려고 하고 의도를 해석하려는 행위 등 말이다. 이 책은 르포르타주의 다양한 글들을 통해 현장감을 드러낸다. 물론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목적을 가진 역사서에 비해서 의도성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의 경우 현대까지도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끌어안는 시도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념으로 선을 긋고 사료를 왜곡하여 구미에 억지로 맞추는 일이 많았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한계를 지나 대안적인 역사의 흐름이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역사의 연구와 교육만이 사회의 지원을 받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억압을 받았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겪어온 것이다. - P829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따지기에 앞서, 냉전의 논리가 더 이상 우리의 갈 길을 정해 주지 않는 새로운 상황을 다 함께 맞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역사학의 집단식중독에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 처방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의 원전』 같은 책이 치료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 P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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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1 1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현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료로서의 의미가 큰 책일것 같네요. 아까 페이퍼에서 이 책 소개 보고 관심이 갔는데 화가님의 이 글을 보니 확실하게 봐야겟다는 생각이 듭니다. ^^ 항상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6-01 16:04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이 책 생각 이상으로 좋았어요. 바람돌이님께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항상 저도 감사드려요.

새파랑 2022-06-01 17: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목차만 봐도 엄청나네요~!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 찾아보니 딱 있네요 ㅋ 르포르타주가 확실히 현실감이 있고 재미도 있는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2-06-01 21:34   좋아요 0 | URL
정말 다양한 기록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헤밍웨이, 조지 오웰 소설로는 익숙하겠지만 다른 양식의 글을 만나니 새롭더군요 비문학과 문학은 다르니까요 그럼에도 확실히 위트 있는 글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ㅋ 현장감 넘치는 글들이어서 저도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mini74 2022-06-01 17: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식인문화를 부각한 면도 있다고 읽었어요. 그들의 제례나 매장풍습을 과장하거나 오해를 내버려두는 식으로 ㅠㅠ 네로 이여기가 의외네요. 전쟁고아 이야기는 슬프고.ㅠㅠ 저도 이 책 찜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1 21:3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미니님 제국주의자들의 위계 질서를 드러내려고 의도한 부분도 클 것 같습니다 네로는 정말 의외였어요 그러고 보면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쟁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는데 특히 뒷부분 현대전은 아무래도 더 비극적입니다ㅜㅜ 무기가 탄탄해질수록 피해가 더 크니. 미니님도 요 책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