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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평점 :
광복절 80주년 즈음에 맞춰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당시 시대상과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주변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역시 중요한 것 같다. 단순한 시 감상에서 나아가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에 이제 윤동주 시인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의 시도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시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고 당시 시대상은 어떠했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생각으로 그 시를 썼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평전으로 증언과 증거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확보하며 최대한 담백하게 씌여 있다고 보여진다.
평전을 통해서 그간 잘 몰랐거나 대강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동주는 1917년 집안에서 8년 만에 얻은 큰 아들이었으며 아명은 해환으로 ‘해처럼 빛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인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인 윤영석은 1913년 북경으로, 1923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였을 정도로 언어 감각이 출중하였고 시적 기질이 남달랐다고 하니 윤동주 시인의 재능은 아버지를 통해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인 김용은 몸이 약했으나 손재주가 좋았고 성정이 강인한 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길까지 함께 했던 송몽규는 이 책의 내용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송몽규는 아버지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의 아들로 고종사촌 형이었지만 출생일도 3개월밖에 차이나지 않았던데다 학창시절을 함께 하고 일본 유학을 하다 같이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으니 윤동주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윤동주 가문은 북간도 용정촌에 이주했다가 나중에 명동촌으로 이사한다. 명동촌은 조선의 유학자 집안들이 많이 넘어가 초기에는 유학적인 풍토였다가 1909년 무렵 기독교가 확산된 것이라고 한다(1929년에는 공산주의 유입). 명동촌이라는 이름은 명동서숙(후에 명동학교가 됨)이 개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29년 9월 북간도의 사립학교가 모두 중국 당국의 연길 교육국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다니던 명동학교도 인민학교가 되었다. 윤동주 가문은 이때 용정으로 이사를 간다.
용정이란 지명은 마을에 있던 용두레 우물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현재도 불리는 유명한 가곡인 선구자 가곡의 배경도 용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캐나다 선교부가 자리한 동산 일대로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일본 측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곳이었다 한다.
1935년 무렵 송몽규는 중국 측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윤동주와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 송몽규가 중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이 책은 밝히고 있다. 그는 임정 낙양군관학교에 있었다가 제남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이웅 일파의 산하에서 활동했다가 산동성의 제남에서 일본 영사 경찰에게 붙잡혀 요시찰인으로 낙인찍혔다고 한다(이것이 일본 재판 기록에 소상히 나온다).
윤동주가 쓴 동시들은 정지용의 동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 전까지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시상의 흐름을 보였다면 1935년 10월 이후부터는 구체적이고 진솔한 표현을 담은 동시를 여러 편 써냈다.
숭실중학교에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대가로 교장이 파면되자 재학생들은(윤동주 포함) 동맹퇴학을 감행했다. 윤동주는 부득이하게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는데 이곳은 그곳에서 고등취업이 가능한 유일한 5년제 학교였으나 친일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있을 때 윤동주는 어린이 잡지에 동시를 투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음이 어지러울 법한데 동시가 가능하다니…
대표적으로 ‘조개껍질’을 보자. 이 시는 현재 남아있는 윤동주 작품 가운데 최초의 동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아버지가 시적 기질이 풍부한 분이었음에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가 문학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의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다행히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 입학시험에 통과했다. 놀라웠던 사실을 알았는데 시 ‘자화상’의 배경이 된 곳이 명동의 우물이 아니라 2학년 재학중 하숙하던 곳 근처에 있었던 우물이었다는 것이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11월까지 윤동주가 쓴 단 한 편의 시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1939년 11월 창씨개명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를 비롯하여 1940년은 특히 암울한 결정들이 이어졌던 시기다. 그 시기 유일하게 윤동주에게 기쁨이 된 일이 있다면 평생지기 정병욱을 만났던 일 뿐일 것이다. 모태신앙이었던 그가 기독교에 회의를 가졌을 정도였다면 그 힘든 심경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1941년에 쓴 ‘看板 없는 거리’는 당시의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듯했다.
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른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慈愛로운 헌 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그는 ‘참회록’을 쓸 무렵 히라무라 도오쥬우’라는 창씨개명을 한 뒤 일본 동경 입교(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이때는 전과 달리 아버지가 적극 밀어주셨다고(!). 일본은 본과와 구분하기 위해 선과라는 명칭을 붙여 일부러 학생들 간의 경쟁 및 파벌을 중요시하고 위계를 강화시켰다. 그는 학교에 들어간지 한학기만에 경도의 동지사(도시샤) 대학으로 전학을 하는데 육군대좌 반도신지라는 군사교련 담당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군국주의 사상을 강요하며 엄격한 지도라는 미명 하에 학생들을 못살게 했다고 한다. 그시대 졸업생들에게도 (악질로?) 유명인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만할 것 같다. 이곳에서 박춘혜라는 여성을 만나 호감을 가졌다는 증언은 진짜 놀라웠다.
동지사 대학에서는 두 학기를 다니고 ‘경도에 있는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사건’으로 1943년 7월 14일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의 특고경찰 기록을 보면 송몽규를 비롯한 사건 가담 인물들을 1년간 미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지독한 놈들). 송몽규가 하숙하던 곳에 함께 하숙하던 고희욱도 체포자 중 하나였으나 그는 1944년 1월 19일 6개월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1944년 2월 송몽규와 윤동주는 기소되었고 징역 3년이 구형되어 출감예정일은 윤동주가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가 1946년 4월 12일이었다. 일본 형무소 중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복강(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을 한 두 사람은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매일 육체 노동을 했다. 가족 간 편지는 가능했으나 매달 엽서 한통, 그것도 일본어로만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편지 내용이 검열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다 드러내고 쓸 수 없었다.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5년 2월 16일, 1945년 3월 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역 땅에서 옥사했고 우여곡절 끝에 두 분의 묘는 용정 동산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동시 이외에는 정식 시집을 출간해보지 못했던 윤동주는 특히 정병욱, 강처중, 정지용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그의 시도 빛을 보게 되었다. 강처중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 원고를 보관하고 있었고 강처중은 일본 유학 가기 전 서울에 두고 간 원고 등 윤동주의 유품과 일본에서 쓴 5편의 시(편지에 적혀 있었음)를 고이 보관했다. 누이동생 윤혜원은 중학생 시절 쓴 시와 동시의 원고들을 보탰다.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유고시집의 서문을 쓸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 해방 후 시인의 시가 최초 실린 것이 경향신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였고, 정지용은 주간의 자격으로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주 시인 대부분의 시는 담백하며 난해하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울림을 주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그의 민족 정신도 한몫을 하겠지만). 나 또한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하는데 평전을 읽고 그와 그의 시가 더 좋아졌다. 광복절 80주년이 되는 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