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과 함께 정치학자들이 당면한 중대한 과제의 하나는 소련과국을 축으로 한 동서(東西) 이념대립과 남북한의 체제대결 속에서 반공주의‘ 를 근거로 하면서도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구성적 체제이념으로서 ‘민주주의‘를 형상화하여 제시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민주주의‘는 하나의 사 - P90
실이기보다는 개념이자 이념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합의된 단일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새롭게 개념화되는 가운데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 P91
요컨대, 한국전쟁의 발발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 세계적인 정치경제적 체제변동 속에서 자본주의는 "지양될 운명"이라고 평가하는가운데 이를 한국 경제 체제건설과 연관 짓던 한국 경제학계의 사상적 경향을 일변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양되어야 할 것이었던 자본주의 체제는 ‘객관적 필연으로 긍정되었고, 그 속에서 한국 경제의 후진성은 ‘전자본주의‘ 단계로 낙착되었다. 전쟁을 거치며 ‘필연‘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자본주의 선진과 후진의 역사적 거리는 더욱 현격하게 감각되었으며, 그러한 거리가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구도로 비춰지는 가운데 유럽 자본주의의 탄생 과정은 ‘부럽게 돌아봐야 할 근대화의 경전으로 초점화되었다. - P212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고, 국내 좌우 세력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1948년남북 분단이 공식화되고, 남한 사회에서 운동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폭은점차 협착되었으나,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조선‘에서 탈식민지적지향은 반공주의로 온전히 전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분단 이후에도 남한 사회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활동했던 중도파(중도좌파, 중도우파 성향의 지식인층 사이에는 미국 혹은 소련의 양자택일식 사고보다는 양대국에 의해 분단된 희생된 ‘민족‘, ‘한반도‘라는 관점이 퍼져 있었고, 이런 인식은 ‘조선‘ 또한 여전히 아시아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이해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263
파편적인 형태로 표출된 사례를 제외한다면,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승만·자유당정권은 ‘제3세계 국가들의 정치현상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독재적 통치양식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확장을정당화하지 않았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이승만에게 ‘세계적 반공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으로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정당 - P292
대의제도를 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내세웠다. 따라서 그들은 이승만의 집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를 장악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제3세계의 잦은 쿠데타와권위주의적 통치양식은 ‘정치적 후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층에 의해 정권의 권력구조와 통치행태를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활용되었다. - P293
1950년대 후반 제3세계 국가들의 동향을 다루는 텍스트들에서 제3세계 군부 세력의 집권이나집권자의 독재적 경향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민족혁명‘의 일환으로 우호적인 관점에서 다룬 글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경제 분야에서 ‘후진‘국가들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가(정부)와 시장(민간 자율)의 관계, 정부 정책의 위상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 정부의 역할이나경제개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논의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정치적 동력과 권력형태, 정치체제의 재편 등 ‘발전체제(developmental regime)‘를 상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P311
형식상의 민주주의 법질서를 파괴하고 나선 5·16혁명과 그 후의 사태 진전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는 한 그 의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5·16혁명이 초기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제국의 반대와 의혹을 무릅쓰고 성공하였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이익은 한국이 스스로 결정하려는 민족적인 자주독립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 한국민을 수천년간에 걸쳐 지배하여온 사대주의적인 사상이 정면으로 부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5·16혁명의 그 사상적 연원을 멀리 3·1운동의 정신에서 구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에 반대했던 미국의 초기 대응을 공개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적 자주독립의 정신의 표현이었으며, 따라서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주의 세력임을 주장하고 있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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