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망치 하나에 쓰러져

모든 진정한 삶에 활기로 넘친다


날카로운 속눈썹만이 남고


시인은

종잇장에 그 선연한 핏물로 배어

고독했던 자신의 퇴색한 초상과 만난다.

 

                      -- <아흐레 민박집>  박흥식 시집, 창비, 1999년 刊

 

 

저녁 무렵 동주 손을 잡고 슈퍼에 다녀오는데 간신히 한쪽 다리에 의지해
굳은 한 팔과 반쪽 몸통과  다리를 끌며 걷고 있는 장년의 남자를 지나쳤다.
그를 앞선 것이 미안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더니 나를 쏘아보는 도전적인 눈빛.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가운데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보고 말았다.
연보랏빛 추리닝의 왼쪽 바짓가랑이가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짙은 보랏빛으로 젖어 있는 것을......

십몇 년 전, 시청앞의 번듯한 사무실에 근무할 때 첫눈이 내리면 무조건 뛰어나가
시청과 분수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2층 창가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셨다.
어느 해더라?
그렇게 우쭐우쭐 첫눈을 감상하고 있는데 눈앞에서 믿을 수 없게시리
신나게 달리던 중국집 오토바이가 나뒹굴었다. 
다행히 차량이 많지 않은 시간대여서 청년도 오토바이도 무사했다.
무사하지 않았던 건 철가방 속에서 튀어나와 엎질러진 짬뽕과 자장면.
멈춘 차량들 속에서 청년은 어쩔 줄 모르며 그 처참한 잔해를 끌어담아 수습하고.......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보며 첫눈을 혼자 축하하고 있던 나는
난데없이 뺨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도로 위에 엎질러진 면 가닥을 황급히 그릇에 쓸어담던 청년.

조금 전 박흥식 시인의 시집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아흐레 민박집>.
그 중에서도 이 시의, '날카로운 속눈썹만이 남고'라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든다.
어색한 시 제목도......
시인이 만약 '부드러운 속눈썹만이 남고' 라고 썼다면 오늘 이 시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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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2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미끄러운 길 님, 그래서 제가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니까요.

마법천자문 2006-09-20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어떤 못된 녀석이 로드무비님 뺨을 한 대 때렸습니까? 제가 두 대 때려주고 오겠습니다!!

2006-09-20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기억속에도 님, 짜안합니다.
그 속눈썹을 보시다니!
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할 듯해요.

소소너님, 아니 개명하셨군요.;;
뺨을 때린 손모가지는........ 저도 창졸간에 당하여 누군지.( '')

건우와 연우 2006-09-2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자리에서 뺨을 맞아주신 로드무비님이 있어 세상 모든 첫눈을 용서하겠습니다...

로드무비 2006-09-20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시를 쓰셨군요.^^

하루(春) 2006-09-2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쥑이네예. ^^;;;

로드무비 2006-09-2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호호호~~~

페일레스 2006-09-21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우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로군요. 아잉~ *-_-* '로드무비 현상'에 일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ㅅ-;;

2006-09-25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옛날 이바구를 하고 그러세요.ㅎㅎ
'아잉~'이라는 교성과 적절한 이모티콘의 사용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