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30년 만의 대형 태풍'이라는 기상 예보관의 말을 흘려듣고 고향집에서 나와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몰던 잡지사 기자 고사카.
차창을 뚫고 들이닥칠 듯한 폭풍우의 위세에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잠시 갓길에 차를 대려는 중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자전거를 끌고 씨름하는 소년을 만난다.

마치 영화로 그 장면을 보는 듯 요란한 빗소리와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되는데.
두 사람은 고속도로의 열려진 맨홀 뚜껑과 그 주변에 굴러다니는 아동용 노란우산을 발견한다.
이렇게 가슴 철렁한 도입부가 또 있을까!
거기다 소년 신지는 알고봤더니 남의 마음을 읽는 사이킥(Psychic)이다.
16, 17세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 사람들의 과거와 숨겨진 마음을 읽는다니,
이건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고속도로보다 더 무시무시한 설정이다.

--나처럼 어리고 아직 세상물정도 잘 모르는데,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면 어떻게 할 거죠? 보이잖아요? 들리잖아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고사카 씨라면 어떻게 할까요?(103쪽)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몇 달 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아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리뷰 쓸 생각은 못했다.
게임에 이긴 상대방이 최대한 힘을 모아 내려친 뿅망치에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아무리 정교한 장치가 있든 놀랄만한 반전이 있든  추리소설은 내게 "이래도? 이래도?"하고
충격과 재미를 강요하는 뿅망치 같았던 것.

그런데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일반적인 추리물과는 좀 달라 보인다.

폭풍우 치는 날, 도로의 맨홀 뚜껑을 아무 생각 없이 열어놓고 가버린 차의 운전자들처럼,
아내와 다투고 난 후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워물다가 무심코 눈에 띈 화분을
아래로 던져 지나가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인간의 무신경한 얼굴이 있다.
내가 바로 그 무심한 행동의 주인일 수 있고,  어느 순간 그 앞을 지나다
화분을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어 사람의 무시무시하고 추악한 면들을
보고 듣지 않을 수 없는 두 소년의 고뇌와 갈등에 이르면......
내가 봐버린  것들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얼마만큼 행동할 것인가.

폭풍우 치는 밤에 시작된 사건과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열쇠들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그런 심리적인 측면과 인간의 선택 부문이었으니, 이 소설은 내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미있는 추리소설로 기억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건 고사쿠와 결혼할 뻔했던 사에코라는 여성이다.
아니, 그 여성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펼쳐보였던 확신이 가득찬 인생의 청사진.
그러한 것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아서일까?
그림으로 치면 '맨홀'과 '청사진'이라는 두 개의 오브제가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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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6-0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인가요, 납량특집 공포소설인가요? 독서폭이 정말 넓은시네요... 그리고 무슨 영화 예고편처럼, 내용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호기심 유발시키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로드무비 2006-06-0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제 독서 폭은 사실 무지 좁고요,
리뷰 쓰겠다고 자원해서 얻어 읽은 책이에요.
며칠 전에 읽었는데 이제야 씁니다.
어떤 부분 관심 가는 데도 있고 재미있었어요.^^

플레져 2006-06-03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홀과 청사진, 절묘하게 어울리는데요? ^^
섬뜩한 느낌이 먼저...

로드무비 2006-06-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추리소설을 많이 안 읽어봤지만 추리소설로는
좀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초능력보다도 그걸 가진 소년들의 고뇌가 제겐 섬뜩했고요.
제목을 생각하니 적당한 게 안 떠올라 그냥 주워섬긴 거랍니다. 헤헤~

sudan 2006-06-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주워섬기신 제목이라기엔 너무나 그럴 듯해요. 오옷. 공포 영화 예고편 마냥 섬뜩한 분위기를 잔뜩 느끼게 해주시는데요?

로드무비 2006-06-0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제가 좀 호객행위에 재조가 있습니다.ㅎㅎ
그건 이미 아시죠?^,.~

mong 2006-06-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추리쪽도 좋아요~~
(꼬시는 중...ㅎㅎ)

로드무비 2006-06-04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너무 깊이 빠질까봐 걱정이예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