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오랜 옛적부터
아, 몇백 년 몇천 년 옛적부터
호미와 가래에게 등심살을 벗기우고
감자와 기장에게 속기름을 빼앗긴
산촌의 뼈만 남은 땅바닥 위에서
아직도 사람은 수확을 바라고 있다
게으름을 빚어내는 이 늦은 봄날
'나는 이렇게도 시달렸노라......'
돌멩이를 내보이는 논과 밭
거기에서 조으는 듯 호미질하는
농사 짓는 사람의 목숨을 나는 본다.
마음도 입도 없는 흙인 줄 알면서
얼마라도 더 달라고 정성껏 뒤지는
그들의 가슴엔 저주를 받을
숙명이 주는 자족(自足)이 아직도 있다.
자족이 시킨 굴종이 아직도 있다.
하늘에는 게으른 흰 구름이 돌고
땅에서도 고달픈 침묵이 깔아진
오-- 이런 날 이런 때에는
이 땅과 내 마음의 우울을 부술
동해에서 폭풍우나 쏟아져라--빈다.
--이상화 詩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한국대표노동시집>37~38쪽)
지난주 박영근 시인의 부음을 접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책을 검색해 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윤태, 맹문재, 박영근, 조기조 공편의 <한국대표노동시집>이 눈에 띄었는데
810쪽 분량의 아주 두툼한 책이었다.
1920년대 근대 자유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무렵의 시들부터 시작해 1950년까지가 1부,
1951년부터 1980년까지의 2부, 그리고 1981년부터 지금까지 3부로 잡혀 있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편집위원회를 구성한 것도 신뢰감이 갔다.
책을 받아 읽다보니 팔봉 김기진의 '백수의 탄식' 같은 겉멋 잔뜩 부린 시들도 섞여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목이 '한국대표노동시집' 아닌가!
두툼한 책을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쓰다듬고 있자니, 가슴이 설렌다.
앞쪽에 실린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읽다보니 이상하게
평택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떠올랐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두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그동안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이상하게 나의 시선도 끌지 못하고 대접을 잘 못 받았는데,
이 책을 통해 만난 이상화의 시는 논물처럼 자연스레 스며든다.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도 처음엔 관심을 가지고 읽었는데
언제부턴지 내 기억 속에 잊혀졌다.
아무튼 내가 모르는 좋은 노동시들을 만나게 되면 한 편 한 편 페이퍼로 소개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