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 혹은 처세학 책들을 어쩌다 읽게 되면 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책들에 의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절대 성공 못할 유형의 인간이고 실패할 확률 99프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에게 꼭 가야 할 길은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 할 일은 없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인생을 시분초로 쪼개어 뭔가 생산적인 일에 매진하라는 그 책들의 충고는 나에겐 하나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과잉의욕은 소망한 바를 불가능하게 한다!

웃기게도 나는 20대 초반에 수첩 맨 앞장에 과잉의욕에 대한 경구를 적어가지고 다녔다. 책이나 영화, 맛난 음식 외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관심 없었으면서......

얼마 전 읽은 화가 노은님의 <내 짐은 내 날개다>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나서는 거라면 쥐약인 화가가 어쩌다 교수가 되고보니 세미나 같은 데도 나가 청중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꼼짝없이 주최자에게 잡혀 세미나장에 끌려갔는데 청중석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 기자가 수첩을 펴놓은 채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기는커녕 저렇게 엎어져 자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쫄 것 없잖아!' 그 깨달음 이후 화가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도 떨지 않게 되었다고.

깨달음은 천둥번개 소리를 동반하고 요란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방금 예를 든 화가 노은님의 경우처럼 슬그머니 소리소문도 없이 올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누추한 일상 속에 매복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짠~하고 나타난다.

--깨달음의 세계는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세계가 아니라, 본래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줄 깨친 까닭에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는 세계입니다.(114, 115쪽)

진지한 인간들이 흔히 자부심으로 삼는  분별력이나 노력, 의지도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정토회 설립자인 법륜 스님의 법문집으로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갖가지  질문을 즉석에서 대답하신 것이다. 수행에 관련된 심오한 질문들도 있지만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질문답게 가령  "이 남자랑 헤어질까요, 말까요?"하는 식의 원초적인 인생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스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이 얼마나 선선하고 심상한지 귀를 기울이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문제가 스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생이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서로 따뜻하게 해주다 보면 정이 들고 고맙고 눈물이 나고 이래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뭐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면 거기서 정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25쪽)

마흔여덟 살에 장애가 있고 장가도 안 간 시동생이 자꾸 부아를 돋워서 괴롭다는 어느 여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참아서는 안 됩니다.보살님은 뭐든 참고 억누르고 그러지요? 잘해야겠다고, 참아야겠다고 결심하는데 결심하거나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그는 잘못이 없어요. 그는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내 이해 관계나 내 편리에 사로잡혀서 상대를 문제 삼는 거란 말이지요. 문제를 삼아 놓고는 참는다고, 빈다고, 운다고, 결심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47쪽)

정말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구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어두워지고 경계에 끄달리는 사람들은 이런 법문집을 머리맡에 두고 가끔 꺼내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선물해주신  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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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6-10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신있게 살기를, 늘 바라는데... 늘 어렵네요.
그 무한한 空의 세계에 들어가야지 하면서도 들어가는게 또 두렵다지요.
이래저래 어려운 수행의 길입니다 ^^

로드무비 2005-06-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소신이 없으면 또 그대로 살라는 것이 스님의 말씀입니다.
못난 대로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고......님도 이미 아시는 이야기잖아요.
아무튼 법문집은 처음 읽었는데 참 좋네요.^^

히피드림~ 2005-06-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은 다른 알라디너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하긴 이벤트를 통해 님도 그만큼 다른 분들에게 베푸니까요^^
님의 리뷰보니까 생각나는데요,예전에 성철스님 돌아가셨을때 몸에서 사리가 많이 나왔잖아요. 근데 소소한 차이를 두고 돌아가신 어떤 이름없는 할머니 보살님의 몸 속에서 성철 스님 것 보다 더 많은 사리가 나왔데요. 거의 한가마니가 나왔다는... 그 할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유명한 분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불을 한거죠.

서연사랑 2005-06-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네요.
까닭없이 세상을 향해 부아가 치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서 '내 탓은 아닐까' 걱정하는 저같은 사람.

야클 2005-06-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에는 가끔 가면서 불경이나 스님들이 쓴 책은 거의 안 읽어본 것 같아요. 기껏해야 법정스님책 정도... 기억해뒀다가 한번 읽어보렵니다. ^^

로드무비 2005-06-1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법문집은 저도 처음인데 옆에 두고 자주 읽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서연사랑님, 저같은 이를 위한 거죠.
세상 이치를 짐작할 것 같은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혼란스러운.
가끔 부아가 치미는 건 저도 같네요.^^
펑크님, 사실 따져보면 책이든 마음이든 주는 만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정한 세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래서, 사리에 대한 신화는 이미 깨지지 않았나요?^^
새벽별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인데 낯이 익습니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