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요나라 짜이젠
황춘명 지음, 이호철 옮김 / 창비 / 1983년 7월
평점 :
절판


 

50대의 일본남자들이 떼를 지어 타이완에 엽색관광을 온다. 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을 거쳐 군대에까지 함께 몰려갔던 친구 사이로 ‘천인참(千人斬) 구락부’의 회원이며 멤버는 그들 7인뿐.


옛 일본의 무사들이 지향한 것이 일생 동안 1천 명 적군의 머리를 베는 것. 그런데 이 구락부의 천인참이란 1천 명의 여성과 동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각자 붉은색 빌로드 소책자를 하나씩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때까지 관계한 여성들의 기록이 음모 한 가닥씩과 함께 투명비닐에 들어 있다.


그들의 여행 첫 목적지가 온천이 있는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전화를 받고 ‘바쇼 씨 일행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공항으로 나가는 ‘나’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과거 일본의 침략과 대학살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아무리 회사 차원의 접대라지만 가는 곳마다 통역과 동포 여성을 그들의 품에 안겨주고 화대 따위를 중간에서 계산해 주어야 하는 게 그의 역할이니.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이 불쾌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경험을 독자에게 전하는 사람은 ‘미스터 황’이다.( 참고로 저자 황춘명은 <사요나라 짜이젠>으로 이 책이 나온 1970년대 초중반 자유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독자들은 미스터 황과 저자를 동일시했음에 틀림없다.) 이따위 뚜쟁이 일도 일이랍시고 강제로 던져주는 회사라니, 더구나 평소 황은 회사에서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반골기질 강한 사람으로 호가 났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만이나 한국이나, 소시민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도 없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일본인 엽색관광단을 골탕 먹였을까?

온천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술을 따르려고 나온 여성들을 주무르는 그들의 행각이야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로서는 이왕 피할 수 없는 일,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어 동포 여성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가씨들과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장난을 좀 친다. 그의 주 무기인 통역으로. 가령 아가씨가 짓궂게 구는 자기의 짝을 향해 “병신 같은 녀석!”하고 욕을 하면 “당신 색마라는데요?” 하는 식이다.  이 일본인 관광객들은 정력이 딸리는 연령대라 그런지 ‘색마’라는 말을 들으면 칭찬 받은 아이처럼 입이 헤벌레 벌어지는 것이다.


그 징그러운 인간들을 인솔하고 다음 엽색 장소로 이동하던 기차에서  일본 유학을 꿈꾸고 있는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을 우연히 만나는데(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인간이 일본에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한술 더 뜬다. 중국인 대학생과 일본인 관광객들 간의 통역을 자처, 일본인 관광객들로부터는 과거 일본의 침략과 당시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고백하게 함과 동시에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 얼빠진 대학생 녀석 또한  혼찌검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통역으로 장난을 쳐서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어내고 마는 그가 나는 참 유능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기 자신은 능히 자기가 대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는 그의 대사를 보라! 아아, 정치든 경제든 독도 문제든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는 모름지기 미스터 황 같은 사람이 하나 꼭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을 나는 1983년 창비판 이호철 선생의 번역으로 먼저 읽고 열광하였다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기획출판  김데스크’에서 1975년도에 나온 것을 발견하고 구입했다. 육전소설 같은 책 표지가 아주 재미있다. 일본말 안녕(‘사요나라’)과 중국말 안녕(‘짜이젠’)을 갖다붙인 제목도 절묘하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뭐요?”하고 누가 물으면 아주 오랫동안 내 입에서는 “사요나라 짜이젠!”이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대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매듭짓는 소설로 이만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 작품 외에도 어느 바닷가 유곽이 배경인 <항구의 꽃>과, 미국인 차에 치어 다리가 부러진 한 노동자와 그의 가난한 가족이 몇 푼의 보상금과 호텔 같은 병원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종내에는 그 사고를 횡재로 생각하고 병실에서 쌀 네 근 값인 사과를 하나씩 입에 베어 물고 희희낙락하는 이야기 <사과의 맛>, <주머니칼>이라는 작가의 섬세한 초창기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항구의 꽃>의 다음 구절이 뭐가 그리 좋았던지  당시 20대 청춘이던 나는 검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았다.  --운명은 거친 것이어서  우리 같은 여자가 어리광 피우기에는 어림도 없다구요.

 

 


1975년 企劃出版 김데스크 刊(권용철 譯)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5-06-05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소위 섹스관광이군요. 그런 시절을 겪은 우리가 지금은 동남아로 섹스관광을 나가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으니, 과거의 경험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일생동안 천명이라..으음.... 일년에 50명씩 해도 20년이 걸리는...아니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로드무비 2005-06-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일생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 이상의 축복이 어딨겠습니까!
인간들이 자신의 유능함을 이상한 방식으로 입증할려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리뷰가 좀 이상한가요?
답글을 다는 님이 없군요.;;;


히피드림~ 2005-06-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5년 치고는 책디자인이 그럴듯 한데요. 촌스러운 느낌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서는 절판이네요.
그래도 도서관에 가면 있겠죠?

로드무비 2005-06-06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ㅎㅎ 그렇죠?
촌스럽긴커녕 뭔가 파워풀한 표지입니다.
이 책은 창비에서 나온 것도 절판되었는데 아마 오래 된 도서관에 가면 있을 겁니다.^^

날개 2005-06-0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책이군요. 표지도 특이하고..
주인공이 참 맘에 드네요.. 로드무비님이 좋아하시는 책이라니까 웬지 색달라 보인다는..^^;;

로드무비 2005-06-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오옷, 며칠 동안의 리뷰와 페이퍼를 모두 읽어주시는 세심함과
부지런함이라니!
이 책 리뷰를 제가 잘 못 썼어요. 전달이 잘 안되었습니다.
무척 좋은 책인데......^^

플레져 2005-06-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멋진 책이 있었다니요!
그래서 제가 요즘...어리광을 피우지 않아요. 아주 근엄해졌다구요 ^^

로드무비 2005-06-0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섭섭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