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정오경 늦은 아침을 먹다가 한 텔레비전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 내 시선이 꽂혔다. 꼬질꼬질한 서민아파트 거실에서 고무다라이를 펼쳐놓고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화상들. 바로 장선우 감독과 깔끔미남 배우 김석훈이 아닌가! '화상'이라는 단어를 보면 절로 떠오르는 시인 함성호의 저 유명한 시구(詩句)가 있으니......
'서로 폐끼치며 사는 거다 이 화상아!'
신예 김수현 감독의 첫 영화 <귀여워>는 함성호의 저 인상적인 시구처럼 질펀하면서도 상큼발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김치를 직접 버무리고 있는 까치둥우리 머리의 두 남자. 다행히 막걸리 한 주전자가 옆에 있다.
장선우 감독은 올해 초 광화문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 집회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오방떡 수레 앞이었는데 그는 팔짱을 끼고 군중을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였다. 나는 남편과 동생 부부와 아이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도 엉겁결에 팔짱을 풀고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는 사람이야?" 남편이 물었다. "장선우 감독이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나쁜 영화>보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을 훨씬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연속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게 대한 관심이 조금은 남아 있다.
극중 그의 이름은 장수로로 박수무당이자 전직 사이비 교주이다. 황학동 뒷골목의 철거대상 아파트에 신방을 꾸며놓고 점을 쳐주며 배다른 두 아들형제랑 살고 있다. 장남은 퀵서비스맨으로 별명이 '후까시'(김석훈 역), 둘째아들은 견인차를 모는 기사로 '개코'(선우--가수 미스터 투의 멤버)이다. 아버지와 형이 쪼그리고 앉아 김치를 버무리는 모습을 불쌍히 본 개코는 막힌 도로 위에서 뻥과자를 파는 순이(예지원 역)를 집에 데리고 오는데......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명의 배다른 아들이 어느 날 이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꽃바구니를 들고 나타나니 철거깡패로 폭행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고 막 출소한 세째 뭐시기(정재영 역)인 것이다. 정재영이라는 배우는 이 역을 실감나게 소화하기 위해 진짜 건달들이랑 일주일을 먹고자고 합숙을 했다는데 그래 그런지 그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행동하는 건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어째 이 건달 행동하는 것이 빠릿빠릿 영악하지 못하고 한심하고 덜 떨어졌다.
신이 내려주지 않아(?) 어제도 오늘도 손만 잡고 자는 아버지 장수로와 순이. 처음 보자마자 반말을 찍찍하고 조신한 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순이를 이 네 부자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는데 그 사랑의 모습도 다 제각각이다.
추리닝에 산발, 보기만 해도 신산스러운 아버지 역 장선우 감독은 허물어지기 직전의 이 아파트와 그지없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어색하지만 묘하게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예지원은 이제까지 어느 영화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자유롭고 개성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뻥튀기를 파는 동료 아줌마랑 시비가 붙어 머리채를 잡고 뒹굴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맥주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 그뿐인가 가슴을 한번 만지게 해달라는 세째의 부탁에 웃통을 훌훌 벗는데도 더럽다거나 도무지 막 가는 인생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 말고 누가 그렇게 순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는가.
오토바이로 도시의 불빛을 가르며 달리는 의기소침한 청년 후까시 역의 김석훈도 괜찮았고 언뜻 불량스러워 보이나 인간적으로 보이는 개코 역 선우라는 배우도 적역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떠난 철거 직전의 아파트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는 이 오합지졸의 가족과, 하나도 멋질 것 없는 건달들이 괜시리 바쁘게 왔다리갔다리하는 이 영화가 내게는 유쾌한 판타지로 읽혔다. 순이가 "귀엽다!"고 하니까 정말 모두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여겨졌으니 한마디로 마술이 아니고 무엇인가!

배다른 아들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게 된 순이와 장수로 커플. 오늘밤은 부디 신이 좀 내려줘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