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여성 작가들의 소설책을 내 돈 주고 사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원칙이다. 하성란, 조경란, 한 강 등의 신작 소설을 이동하는 시민도서관에서 몇 권인가 빌려 읽긴 했다. 어떤 책은 무지 재미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인 일일까? 고독과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는 그 매력적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더이상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들은 참 우아하게도 허우적댄다. 절망할 때조차 포즈를 취한다는 느낌이랄까. 어떤 소설은 분명 재밌게 읽히는데 지갑을 열게 되지는 않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신경숙과 전경린의 소설은 아예 읽을 수조차 없다. (전경린의 소설을 가지고 변영주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나는 참 의외였고 분했다.)

그런데 며칠 전 오랜만에 읽은 정미경의 소설은 달랐다. 엄살과 과장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남다른 면모를 주인공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허영도 없었다.

"씨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잖아. 안 그래요?"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 나오는 조폭 똘마니 '컬러 문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주인공은 이제 개인병원 엑스레이 기사로 취직하여 자신이 찍은 애인 사진 필름을 사진관에 맡길 정도로 돈을 번다.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보고 그녀가 생각나 모처럼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의 약혼자가 이를 오해하여 깜장양복 덩치들을 매일 병원으로 보낸다. 그녀의 누드 필름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미 가위로 잘라 쓰레기통에 넣었는데......그를 협박하기 위해 파견된 컬러문신이 제안한다. 새로 누드 사진을 찍어 필름을 가져다주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결혼이라는 확실하고 공고한(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제도 속으로의 편입을 앞둔 커플의 오만과 불안, 그리고 사랑은커녕 제 목숨 부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 없는 한 청년이 처한 답답한 현실이 가슴을 조여온다.

나는 아직 하기 싫은 일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미꾸라지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컬러 문신'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라고? 나도 알지, 그 정도는. 그런데 용케 이때까지는 하기 싫은 일은 피하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무섭고 답답하다.)

호텔 유로 1203  부엌에서 언제나 자신을 위해 정체불명의 약초들을 커다란 냄비에 끓이는 일이 유일한 취미인 엄마가 나온다. 나도 요즘 삼백초 물을 끓여먹기 시작했다.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고 해서.(오죽하면 내가 이러겠는가!)  그건 그렇고 파산지경임에도 명품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말에 일면 공감이 간다. '생이 이토록 누추한데 거기다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피투성이 연인  남편의 느닷없는 죽음과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다니!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 않는데도 주인공의 아픔과 환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건 멋을 부리는 것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격'이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라는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성스러운 봄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 불이 켜지는 야광운동화를 신어보지 못하고 먼길을 떠난 이 작품 속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작년 봄,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라이온 킹 오리지널 야광운동화를 딸아이에게 사주었는데 5만 원 돈을 주고 아이 운동화를 샀다는 죄의식을 일거에 날려 주었다.

비소 여인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조차 띤 채 사람들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여주인공이 섬뜩하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마음의 심연(深淵)'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났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장석조네를 능가하는 허름한 골목 풍경이라고 한마디로 말하고 싶다.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단편소설에 불과하지만......그 중에서도 분식집 여자 미옥, 아아 미옥. "사는 것도 지랄맞은데 동화마저 아파야 해? 무조건 해피엔딩이라야 해. 난 우울한 동화 싫어!"라는 그녀의 말은 평소 나의 생각과 좀 다르지만 이 글 속에서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다. 미옥은 나를 전율케 했다. 누군가 그녀의 분식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을 만난 듯 깜짝 반가워했다는 정 많은 여인이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모든 삶이 가짜일 때는 가짜를 견디는 것이 진짜라는 것이다'라는 멋진 말로 이 한 권의 소설집을  정리해 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실린 사진을 보니 소설가 서영은과 강석경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의 소설가 정미경. 어둡고 깊은 그의 눈매가 부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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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1-1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를 누르고 싶지만 이 책을 이미 사버렸으니 추천만 하지요.

로드무비님의 글발에 주인공들이 더 살아나는 것 같구려. 나도 미옥이가 제일 좋았어요. 하지만 정미경은 무조건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해놓고 자기 주인공들을 그렇게 어정쩡한 시점에서 정지시켜 버린답니까? 주인공들이 투명의자 자세(애들 벌줄 때 쓰는 자세의 하나로 마치 투명의자에 앉은 것처럼 엉거주춤 앉아서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를 하고 정지해 버린 것 같아서 저는 너무 불편했단 말입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냉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위로받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펼쳐 보여주는 것이 좋아요.

미옥에 관해서라면 나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깍두기님, 추천 고마워요.

반딧불,, 2004-11-1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줄에 동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최근에 산 책은 거의 없고, 전경린과 신경숙을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봄에 보시니 참 좋았다를 급한 마음에 사서 읽은 것 빼고는

제 돈으로 소설책을 사서 읽지 않는군요.

소설을 그리 좋아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사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보니, 제 책은 거의 없고, 아이들 책만 있습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자신을 위해서도 뭘 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이 남들 눈에는 아무리 쓰잘데기없는 것이라도.

그런데 이 리뷰에 내가 읽지 않는 작가들 이름을 밝힌 것이 좀 찝찝하네요.

이니셜로 처리할까요?

반딧불,, 2004-11-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가끔 객관적 글쓰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텀 리뷰도 페이퍼도 못올리게 되었지요ㅠㅠ

stella.K 2004-11-1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렇찮아도, 어제 오프 모임에 갔다가 저 깍두기님으로부터 말씀하신 책 선물 받았어요. 제가 베르나르의 <나무>를 드렸거든요. 물론 결국 책 바꿔 보기가 됐지만 기분 좋더라구요. 로드무비님에 재미있다니 솔깃해집니다. 빨리 읽어봐야 할텐데, 책은 쌓여만가고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난감합니다.^^

로드무비 2004-11-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나의 피투성이 연인부터 읽으세요.^^

kleinsusun 2004-11-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 때 부턴가 로드무비님과 같은 증세를 갖게 되었어요.

신경숙, 전경린 같은 여자 소설가 책을 돈 주고 사기 싫더라구요.

더 솔직히 말하면 돈주고 읽으라 해도, 누가 저를 감금하고 읽으라고 해도 읽기 싫은 기분이예요. '취재' 없이 쓴, 주인공들의 직업은 맨날 출판사 직원, 잡지사 기자, 방송국 작가 등등(모두 자전적인 부분).울고 짜고 감상적이고 상한 감정을 주저리 주저리...

오랜만에 여자 작가의 소설을 돈주고 샀어요.

정이현의 소설.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니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읽고 싶군요.

저랑 같은 증상을 앓고 있다니....반갑습니다.ㅋㅋ

에레혼 2004-11-1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물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콕콕 찌르는 글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리뷰네요. 마치 바로 옆에 앉아서 방금 막 읽고 난 책을 조분조분 얘기해 주는 듯한 느낌...... 잘 읽었고, 추천 드립니다!

로드무비 2004-11-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여성작가들을 모두 싸잡아 얘기한 것이 조금 걸리네요.

좋아하는 작가도 몇 있거든요.

정이현 씨가 맡고 있는 한겨레신문 영화 코너 재밌게 읽고 있어요.

신경숙도 씨네21에 한동안 글 참 재밌게 썼잖아요.

그런데 소설은 왜 읽히지가 않는지......

수선님은 젊은 분이어서 그런지 확실하고 명쾌하시군요.^^

새벽별님, 제 의견 참고하다 좋은 책 놓치면 어떡한답니까? 헤헤

라일락와인님, 저의 리뷰는 평이 아니고 순전히 저의 느낌입니다.

저는 누군가의 글을 평할 만한 주변머리가 없거든요.

추천 고맙습니다.^^

하이드 2004-11-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던 책인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하이드 2004-11-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경린 책은 두권밖에 안 읽어봤지만, 변영주 감독의 '밀애' 였던가요 ? 영화는 참 잘 봤었는데, 이 영화에 대해서는 참 호오가 극단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