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후배가 자꾸 내 허리를 감으며 안겨왔다.

'언니, 나 오늘 언니 집에 가서 밤새워 술마시며 얘기 나누고 싶어."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럴 기분 아니거든. 다음에......"

그녀는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의 약혼녀였고 그 남자는 독일에 공부를 하러 가고 없었다.

어쩌다 그녀와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詩'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1993년 봄, 우리는 마로니에공원 벤치에서 만나 근처의 영화관에 갔다.

공중곡예를 하는 소녀에게 반한 천사 다니엘이 천사직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탄력성'이라는 대사가 지금까지 생각난다. 나도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극장에서 나오니 밤이었다.

우리는 어느 건물 꼭대기의 호프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 아이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어느 극단에서 공연 기획 쪽 일을 배우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나보다 15센티미터쯤 컸다. 젊음과 미모로 보면 비교도 할 수 없는......

맥주를 피쳐로 시켜 세 통째인가 먹고 일어나려는데 웨이터가 맥주 500cc 두 개를 가져왔다.

그날 그 꼭대기 맥주집엔 손님이 거의 없었는데  맞은편  끝 테이블의 남자손님이 가져다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 먹을게요!" 하는 눈인사를 보내는데 그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곤 그만이었다.

참 쿨한 남자들도 다 있지.

상기된 얼굴로 공짜술을 마시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언니, 나는 저 남자들이 맥주 한잔 사줬답시고 우리를 따라와 치근치근거릴까봐 걱정했다. 언니는?"

"나는 저 남자들이 우리를 따라나오지 않으니 섭섭해 죽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테이블로 갈 수도 없고.

싱거운 자슥들......"

내 말은 진심이었다.

아마 그들은 영화 얘기 책 얘기를 신나게 나누는 저쪽 테이블의 여성들에게 맥주 500cc만큼의 호의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도 상쾌한 기억이다.

그녀는 이후 독일에서 돌아온 그 남자와 파혼했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 지금은 가수가 되었다고 들었다.

두어 달 전 그녀의 이름을 느림님이 올려놓으신 노래들 중에서 발견했다.

제기랄 서른 살이라니, 하는 노래였다.

1993년 봄, 나는 그날  감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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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04-11-0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를린 천사의 시에 대한 독특한 추억이 계시네요^^;;

로드무비 2004-11-09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님, 조금 전 님의 방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 CE를 구경하고

문득 생각나서 썼어요. 잘했죠?^^

그런데 날려버릴까봐 서둘러 썼더니 글이 엉망이네요.^^;;

물만두 2004-11-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 저는 검정 땡땡이 원피스를 입었었지요. 아주 짧은... 속에 땡땡이 반바지도 있었답니다^^

oldhand 2004-11-09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쓰신 영화를 보고 나서 포장마차에서 잔으로 사서 마신 소주이야기도 그렇고(영화가 아니었나? -_-a), 영화와 술에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네요. ^_^

진/우맘 2004-11-0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기억 속 그 사람들은.....로드무비님이 부여한 독특한 향기가 있습니다.

나도 일이십년 후, 누군가에게 이런식으로 추억되고 싶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그런 거 말고, 그냥 글 좋은 이의 기억 한자락으로.

로드무비 2004-11-0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땡땡이 원피스 한 벌 없었던 사람은 없겠죠?

그런데 속에 땡땡이 반바지도 입으셨다니 강적이십니다.

올드핸드님, 좋은 영화 보고 나오면 호프 집으로 직행하는 건 저의 버릇인데요?

(음, 앞으론 술 이야길 좀 자제해야겠군요^^;;)

진우맘님, 제 추억 속 사람들을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10년 뒤 진우맘님에 대한 글을 제가 쓸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요?^^

깍두기 2004-11-0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라디오에서 서른살 어쩌구 하는 노래를 들었는데.....그게 그 노래일까요?^^

파란여우 2004-11-0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땡이 원피스는 이제 작아져서 더 이상 못입습니다. 예? 제 몸이 비대해진것이 아니냐구요? 그렇게 아픈데 찌르시면 안됩니다...흑.. 영화에 대한 수채화 같은 추억이십니다.^^

로드무비 2004-11-0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그 노래 첫 소절이 제기랄~이던가요?

그러면 맞습니다.^^

파란여우님, 아니 님같이 새초롬한 미인이 엄살을 떠시면 어떡합니까요!


릴케 현상 2004-11-1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기억은 사진집으로 만들어야겠네요. 죽기 전에 많이 써놓으세요^^

로드무비 2004-11-10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기 전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