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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느 날 대화 중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누군가의 대사가
이상하게 홍상수 감독의 머리에 껌처럼 들러붙어 떠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의 아홉번째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몇 해 전 임어당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했던
<생활의 발견> 이후 가장 유니크하고 코믹한 제목이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영화제 심사위원, 그리고 영상위원회의 세미나 초청 강사 등
꽤 그럴듯한 명목으로 제천과 제주를 찾은 예술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 역).
그는 이름처럼 현실과 밀착하지 못하고 어느 영화 속의 까만 비닐봉지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인물이다.
제천이고 제주고 간에 일은 뒷전이고 술이나 퍼마시고,
함께 술마시는 여자들을 빤한 눈으로 구경한다.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선배 둘을 그곳에서 차례로 만나는데
영화에 대한 꿈을 접고 식당을 하는 제천 선배(공형진)나
제주도에 왔다가 그냥 눌러앉았다는 화가 선배(문창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똑같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 짝을 만나지 못해 그토록 괴로운 거란다.
다른 이유는 모두 황이란다.
언뜻 듣기에 그럴싸하다.
짝을 만남으로써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하는 두 선배는
술에 떡이 된 구씨을 납치하듯 자신의 집으로 이끄는데......
오래 전의 영화 <오! 수정>에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짝 타령이 하도 수상해서 <씨네21>을 뒤졌더니 떠억하니 관련기사가 있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과연 그럴까?
그런데 일생의 짝을 만났다는 그들은 왜 그 모양 그 꼴일까?
개봉 첫날 조조로 이 영화를 봤는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홍상수 영화의 한 대목으로 끼워넣어도 전혀 손색없을 장면이 떠올랐다.
오오래 전 한달에 닷새쯤, 모 잡지사에 나가 교열교정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모 대학의 영문과 교수인 발행인의 딸이 수업이 없는 날이면 나와 일을 도왔는데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근처의 백화점에 가자고 내 팔을 이끌었다.
그녀가 산 것은 18만 원짜리 머리핀.
내 이틀치 수고비였다.
예쁘다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서 속으로는 궁시렁거렸던 나.
그 잡지에 짧은 에세이를 연재하는 독신의 여성 시인이 있었는데
발행인의 딸과 나이가 비슷해 평소에는 친구처럼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받는 원고료는 15만 원.
많다면 많고(내 일당에 비하면) 적다면 적은(핀 값에 비하면) 금액이었다.
어느 날 가난한(스스로 늘 그렇게 말했다) 시인이 편집장에게 부탁했다.
원고료를 5만 원 올려주면 안 되느냐고.
편집장이 발행인의 딸에게 말하니 그녀는 정색을 했다.
그렇게 짧은 글에 15만 원이면 후한 편이 아니냐고.
전화통화로 불가(不可)의 뜻을 전하기가 미안했는지 편집장은 시인을 점심에 초대했고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편집부에 나타났다.
잡지 마감일, 우리는 근처 중국집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떠들며
깐풍기와 사천짬뽕을 안주로 빼갈을 마셨다.
구경남 역의 김태우는 물론이고, 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의 음전한 듯하면서도
생뚱하게 히스테리컬한 엄지원, 제천 선배의 여자 정유미, 제주 선배의 아내 고현정,
그리고 아주 짧게 나오지만 "억울하고 분하다!"고 절규하는 제주 청년 하정우,
역할 속에 잘 녹아든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는 질문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옷깃을 여미고 경청해도 부족할 질문이나 대답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처리하는
홍상수 감독의 여유와 능청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