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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감독처럼 일관성을 가지고 우직하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뿌리를 뽑힌, 혹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의 꾀죄죄한 모습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줄 모른다.
1998년에 본 <소무>에서 지난해의 <세계>, 그리고 <스틸 라이프>까지
세 편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난본 견해로는 그렇다.
인디영화나 조촐한 처녀작으로 독특한 세계관이나 개성을 인정 받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흥행성을 겨냥하거나 혹은 블록버스터 영화도 만들 수 있다고
깝치는, 가벼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 참으로 소중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16년 전 딸아이를 데리고 가출한 아내를 찾으러 산샤에 막 도착한 산밍.
배에서 내리기 전 마술쇼를 보라며 납치하다시피 그를 창고로 데리고 간 일당이
지폐를 가지고 오죽잖은 묘기를 보여준 뒤 요금을 내라고 그를 족치지만
그의 가방을 털어도 나오는 게 없다.
그는 두 눈만 꿈벅댈 뿐, 무서워 하지도 미안해 하지도 않는다.
배에서 내리려는 사람을 쇼를 보라고 강제로 데려가 앉힌 것도 그들이고,
묘기를 봤으니 돈을 내야 할 게 아니냐고 윽박지르는 것도 그들이다.
그에게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육체노동으로 뼈빠지게 모은 돈으로 수수한 여자와 결혼식을 치렀더니
딸을 낳고는 그만 내빼버렸다.
16년 동안 광부일을 하며 홀아비로 지내다가 딸아이 얼굴이나 한 번 보자 하여
집들과 건물이 수몰되고 철거공사가 한창중인 고향을 찾은 것.
양쯔강의 한 유역인 산샤는 중국 지폐에도 찍힐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 부서진 건물들로 우중충하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센홍은 2년째 연락이 끊긴 남편을 만나러 산샤에 왔다.
남편은 이 수몰댐 지역에서 한창 잘 나가는 공사 관리자.
<소무>의 소매치기 주인공 왕홍웨이가 제법 번듯한 사무원의 모습으로
딴 여자와 바람난 친구녀석의 아내(센홍)를 하룻밤 재워주며
부부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센홍은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로 물만 들이킨다.
소지하고 있는 조그만 생수병은 가는 곳마다 물 먼저 채우고 보는 주인 덕분에
바닥을 보일 때가 없다.
미지근한 물로 근근이 몇 모금 간신히 목을 축이는 그녀.
이 영화는 담배, 술, 차, 사탕 등의 자막과 함께 화면이 자연스럽게 바뀐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소제목처럼 영화 속의 가난한 인물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이 영화에서 제일 화려한(?) 장면은 반건달인 어린 잡부 '마크'와
중늙은이 산밍이 핸드폰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장면.
상대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누르면 저장된 음악이 흘러나온다.
'착하게 살자'가 산밍이 선택한 곡.
젊음이 얼마나 흐뭇한 것인지 주윤발의 왕팬인 마크가 까불까불하는 장면이
신선하고 보기 좋았다. 그들의 우정도......
허물어진 우중충한 건물의 남은 벽엔 누군가 붙여놓은 '노키아'의 회사 벽보나
'努力'이라고 쓰인 종이쪽지가 펄렁이고 있다.
그 속에서 웃고 떠들며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담배 술 차 사탕은 중국인들이 권커니잣거니 정을 쌓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거기다 나는 '국수'를 슬그머니 끼워넣고 싶다.
산밍이 아내의 행방을 물으려 그녀의 친척을 물어물어 찾았는데
그때 그는 우리 공사판으로 치면 십장쯤 되는지 인부들이 먹을 점심으로
한솥 가득 국수를 끓이고 있었다. 화덕 앞에서.
퉁퉁 불어터진 면발에 양념장을 끼얹어 먹는 게 고작이었는데
글쎄 산밍에게 한 젓가락 먹어보라고 권하지도 않는 거다.
가난과 고된 노역에 지쳤는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던
그 인부들은 하나같이 낯짝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퉁퉁 불어터진 누르끼리한 국수도 인상적이었고......
장률의 <망종>이 그랬던 것처럼 보고 나면 이상하게 차분하고 냉정해지는 영화이다.
산밍과 센홍의 그 덤덤한 얼굴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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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브래지어와 링겔병이 대롱대롱한 너머로 보이는 수몰지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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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바닥을 보이기 직전 기적처럼 새 물을 조금 채우게 되는 센홍의 생수병. 가는 곳마다 보이는 중국의 물통과 겨울의 보온병은 무슨 중요한 상징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