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가면
러셀 윌링엄 지음, 원혜영 옮김 / IVP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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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구절에 공감하면서, 또 반발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제일 많이 밑줄을 친 곳은 '회피자'와 '비껴가는 자'  유형의 페이지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알라딘 페이퍼에는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가볍디가볍게 처리하려고 하는 나의 의지(!)를 담은 제목이다.
그런 자신이 나이에 비해 많이  미숙하다고 생각하지만,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게 종주먹을 들이대었다.
그게 과연 수많은 고민과 모색 끝에 나온 결론이냐?
'수많은 고민과 모색'이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건 아마 살면서 내가 여러 번 구르고 깨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선택한 포지셔닝이었을 것이다.
포지셔닝을 가면이라고 야단을 쳐도 할 말은 없다만, 크게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다.
오죽하면 그랬을라구.

이 책은 세상을 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뒤집어쓰고 잘 때도 벗지 않는 당신의 가면을
피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종용하고 있다.
러셀 윌링엄은 그것을 여섯 개의 가면으로 분류하여 잘 진열해 놓았다.

회피자 가면 / 비껴가는 자 가면 / 자기 비난자 가면,
구세주 가면 / 공격자 가면 / 영적인 해석자 가면.

사실을 말하면 이 여섯 개의 가면은 나도 모르게 바꿔가면서 잠깐씩 모두 써보았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다. 지나놓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그건 한 자루에 달린 여섯 색 볼펜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여섯 색 볼펜 중에  좋아하는(혹은 필요한) 특정 색만 사용하다가 그 색이 나오지 않으면
그 볼펜은 수명을 다하는 게 된다.
그처럼 어떤 가면은 너무 편해서 벗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뒤집어쓰고 있는 그 두꺼운 가면(거짓)을 벗으라고.
상처와 두려움을 직시하라고.
자신의 신神 앞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는 그 보따리를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개별적인 상처와 고독, 공포라는 코드에만 끼워맞추는 건 재미없지만
자신의  보따리를 한 번은 꼭 햇볕 아래 풀어헤쳐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러는 데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당도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회피자'의 자세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좋아하는 배우 미셀 파이퍼는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꽤나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자신의 마지막 카드는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그 마지막 카드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는데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남의 패는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정도의 원칙만 서 있을 뿐.

이 책은 인간들이 쥐고 있는 그 마지막 카드조차 가면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결혼 전의 몇 해 나는 '유쾌한 사람'을 연기했다.
어디까지나 선선하고 유쾌한 태도의 견지.
그랬더니 어느 때보다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고, 나 스스로 그런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연기이고 가면을 쓴 거란다.
'포지셔닝'을 '가면'이라고 끝까지 우기니 조금 마음 상하지만.

책을 읽으며 모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니 가슴 뜨끔하면서도 좋았는데,
바라노니, 내 서랍만 정리하고 남의 서랍은 함부로 헝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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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4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4-24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이야기'를 읽고 가볍게 생각안하는
메피스도 댓글 남기고 갑니다..^^
(리뷰의 내용을 보고 중국영화 "변검"이 생각났습니다.)



 


2007-04-24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4-24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만난 로드님의 글, 역시 좋군요.
'神 앞에서도 꽁꽁 싸매고 있는 그 보따리'

건우와 연우 2007-04-2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어디까지가 가면인지 알 수 없으면요?

진달래 2007-04-2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주먹을 들이대셨다는 게 전 왜 이렇게 속이 다 시원한지요... ^^;;
마지막 구절도 정말 멋져요...

rainy 2007-04-2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 치고 보관함 생각이 안나는 리뷰는 얼마만인지 헤헤..
요즘엔 이런 책 안 읽고 싶어요.
나름 있는 용 없는 용 다 써가면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참이거든요.
'가면'이든 '포지셔닝'이든 그 것밖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할 때는
하는 수 없다고 뒤집어 써야 한다고 ..
제가 너무 까칠한가요? 로드무비님 글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데 ^^

에로이카 2007-04-2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면을 포지셔닝과 대비시키는 게 참 맞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가급적 일상을 단순하게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쓰고 다니는 가면이 여섯개 씩이나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전 그런 것 같아요... 가면 하나 벗었다고 그것이 맨 얼굴이란 보장도 없지 않을까요? ... 오랜만입니다.. ^^

로드무비 2007-04-2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반갑습니다.
가면과 포지셔닝은 사실 다르지만
그렇게 가볍게 처리하고 싶었어요.ㅎㅎ
하마터면 음산하고 칙칙한 리뷰가 나올 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구체적인 사례와 인물들이 떠오르는지.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가면이 하나라야 말이지요.
양파껍질처럼 켜켜이 쌓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rainy 님, 보관함 생각이 안 난다니 다행입니다.( '')
언젠가 '용을 쓰던' 페이퍼를 몇 편 계속 올렸던 생각이 나는군요.
맞아요, 아무리 용을 써봐도 다른 방법이 없을 땐
그 중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해야지요.
하나도 안 까칠하고 봄비처럼 촉촉한 님입니다요.^^

카페인 님, 카테고리를 저는 평소에도 '서랍'으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왠지 제가 쓰기엔 너무 화려한 단어 같아서요.
확신 하에 남의 서랍 마음대로 헝클어뜨리는 사람들
정말 싫어요.
님도 그러시군요.^^

건우와 연우 님, 긍게요.
그 가면에 자신마저 깜짝 속아넘어간다니까요.
맨얼굴에 자신없으면 옅은 화장이라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가 가면인지, 생각하면 골치 아파서 이만.=3=3=3

L-SHIN 님, 神 앞에서도......
저도 아직 냄새나는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안 풀었어요.

메피스토 님, 저도 그 영화 재밌게 봤는데.
'의도적으로 가볍게~'는 킬킬거리며 읽어주세요.
그나마 요즘은 하고 싶은 말도 없네요.^^

연두색 커튼 님, 요즘 같은 날은 그림 액자가 따로 필요없어요.^^




아키타이프 2007-04-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모두들 가면을 내던지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순수만이 남을까? 아니면 벌거벗은 본능만이 남을까?
왜 가면을 쓰기 시작했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거의 모두가....
놓여나지 못하는건지 놓치고 싶지 않는건지.
전 벗고 싶은 마음 보다는 그저 좀더 착한 가면을 쓰고 싶은 바람입니다.

로드무비 2007-04-2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오, 노!
절대 그런 상황 원하지 않습니다.ㅎㅎ
모두 가면을 내던진다면 그런 아수라장이 없을 거예요.
물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훨씬 괜찮은 세상이 될랑가는 몰라도.


로드무비 2007-04-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뜻 손이 님, 전 몇 달 전 알라딘에서 이 책 제목을 발견하고
망설임없이 바로 질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하고 잘 지내고 싶어서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멋지기만 한 님입니다만......)

2007-04-30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05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적금 님, 무슨 일일까나.
그 작은 우환이 별것 아니기를......
<물장구 치는 금붕어>를 우연찮게 입수했어요.
혹 안 보셨으면 빌려드릴게요.
가지고 계실 듯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