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라고 남편에게 뭘 꼭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젯밤 막상 빈손으로 당당하게 귀가한 책장수님을 보니 좀 놀려먹고 싶었다.
지난해에만 해도 내 단골숍에서 장난스레 찜한 디쉬소파라는 걸
상대의 메일주소를 작성하고 누르라는 대로 버튼을 눌렀더니
남편의 메일함에 떠억하니 날아갔고,
고지식한 남편은 숍의 안내에 따라 착실하게 결제를 마쳤고,
이틀 후 그 엄청나게 큰 빨간색 동그란 소파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막상 박스 속의 소파가 그 실체를 드러내자 나는 그 크기와 색상에 놀라
기쁘기보다 좀 황당했던 것 같다.
물론 잽싸게 사진 찍어 자랑페이퍼를 올리긴 했지만......
어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밤 열 시에 주민 모임이 있었다.
책장수 님이 모임에 참석하고, 저녁을 일찍 먹어서 좀 출출했던 주하와 나는
난생 처음 회를 시켜먹기로 했다.
19000원에 광어 1킬로그램(2, 3인분), 매운탕 혹은 기본 스끼야끼 중 택1.
소주 한 병과 함께 매운탕을 선택했다.
"주하야, 아빠에게 사탕 대신 회를 먹는 거라고 하자."
그런데 분명 선택사항 중 매운탕을 골랐는데 메추리알과 굴과 해초무침 등
기본 스끼야끼가 왔다.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더니 매운탕을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
세상에나, 드물게 보는 친절한 식당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전화는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매운탕을 꼭 얻어먹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는데.
"사탕을 못 사준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까봐 사탕 대신 회 한 접시 주문했어."
"마음에 하나도 안 걸리는데?"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말과는 달리 밤 열한 시의 회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더구나 어젯밤 자정에는 아랍 에미리트와 우리나라 대표 팀의 축구경기가 있을 예정이었다.
주문이 밀렸는지 매운탕거리 팩은 전화를 건 뒤 30분 뒤에야 도착했고,
준 대로만 끓이면 맹탕 같은 매운탕에, 온갖 양념과 야채를 추가해
대포항 단골집 부럽잖은 매운탕이 완성됐다.
매운탕을 기다리다 기본 스끼다시를 야곰야곰 먹어버렸는데
배달 온 총각은 주인으로부터 회수 요청을 받지 않았는지 아무 말 없이 그냥 가서
주하와 손뼉을 마주 치며 환호작약!
오늘 점심에는 남은 매운탕 국물에 신라면을 한 개 넣어 끓여 먹었다.
하마터면 잔가시에 걸릴 뻔했지만, 무지하게 맛있었다.
이보다 더 알뜰할 수 없다는 자기만족으로 흡족했던 오늘 점심과 어제 화이트데이의 기록.
대포항의 우럭매운탕
*** '스끼야끼' 고치지 않고 그냥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