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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의 생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육체적 소멸 뒤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엄마가 죽었다고 해서 엄마와 나의 관계까지 사라질 수 없다. 내게 엄마는 영원한 엄마인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이의 죽음을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엄마가 오늘 사라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므로. 죽음을 예측하는 투병생활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엄마를, 아내를, 친구를 쉽게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인가 늦은 밤이나 새벽에 걸려오는 친족의 전화엔 죽음의 소식이 있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은 침울하고 비통하다. 부모, 자식, 형제의 죽음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러했다.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장례가 끝나고 엄마의 무덤이 생겼을 때에도 죽음은 손님처럼 여겨졌다. 직장으로 돌아와서야 죽음이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 엄마를 죽여야 했다.’ (72쪽)
엄마의 사십구재로 시작하는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 속 주인공 석희는 그 사실을 아주 빨리 알아차렸다.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생의 일부라는 걸 말이다. 심장마비로 죽은 엄마를 발견한 아버지의 신고로 응급실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보고 석희는 오열하지 않았다. 죽음을 애도할 틈조차 없었다. 넋이 나간 아버지와 동생을 대신해 사망신고서부터 장례에 필요한 준비물은 끝이 없었다. 외국에 사는 언니는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지난 생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일과 동시에 한 사람의 소명 과정을 천천히 들려준다. 석희는 엄마의 죽음 이후 100일까지 신장질환과 당뇨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한다. 석희는 죽음 이후에야 직업군인의 아내이자 세 딸의 엄마로 살아온 한 여자의 생과 마주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를 최고로 여기고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엄마의 자리는 너무도 컸다. 때문에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 스스로 병원 진료와 식사를 챙길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100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거기다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실재를 확인한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을 겪을 순 없다. 살아 있는 상태로 동시에 죽을 수는 없으니, 살아 있는 순간엔 살아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엄마의 죽음이 우리에게 왔듯이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 것도 우리고, 아버지 유골을 가지고 국립묘지에 가야 하는 사람도 우리다.’ (209~210쪽)
작가 최지월은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삶에 스며드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엄마를 애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하는 자매의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남겨진 생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경비를 제시하는 자녀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도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다. 누구나 죽음을 통해 강력한 삶 의지를 확인한다. 결국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며 확장일 뿐이다. 진정한 애도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