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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영원을 약속하지만 모든 건 소멸한다. 저마다의 생을 살다가 사라진다. 야속하게 떠나는 이도 있다. 남겨진 이들에게 평생의 숙제를 안겨주고 말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다면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결핍으로 가득하기에 자꾸만 어딘가에 매달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환상의 빛」 속 젊은 여자 유미코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죽은 남편에게 말을 건네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난 지 세 달 된 아이를 두고 자살을 선택한 남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유미코는 다른 남자와 재혼해 평탄하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7년 전 죽은 남편의 그림자를 버릴 수 없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차를 향해 걸어간 남편의 심연에 닿고 싶은 마음이 젊은 아내를 흔든다. 전 남편을 향한 그녀의 독백은 아스라이 희미해진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야 만다.
‘추위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버려진 어선에 달라붙은 채 오랫동안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의 흔들림과 함께 제 몸도 흔들흔들 흔들렸습니다. 아마가사키의 그 터널 나가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눈물과 흐느낌, 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언제까지고 울었습니다.’ (「환상의 빛」, 60쪽)
온통 상실의 슬픔으로 채워진 소설이지만 아름다운 한 편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소설 속 유미코의 독백과 눈빛이 닿는 바다를 상상하게 만드니 말이다. 가만히 바라보면 자석에 끌린 듯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겨울 바다에서 전 남편의 마음 한 조각과 맞닿는 느낌.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남편의 감정이 전해서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아내.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환상의 빛」, 82쪽)
안타깝게도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 수많은 기억들이 넘실댄다. 때로 그 기억은 생을 견디게 만든다. 죽은 아들의 1주기에 자신을 찾아온 이혼한 남편을 통해서 그것과 마주하는 「밤 벚꽃」의 주인공 아야코. 남편의 외도를 참지 못해 이혼을 선택한 아야코에게 그와 함께 살았던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혼부부를 통해 뒤늦게 발견한다. 밤 벚꽃의 황홀함은 지나가 버린 아야코의 젊은 시절과 닮았던 것이다. 다시 불러올 수 없는 철없던 시절이라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져버리는 활짝 핀 벚꽃을, 아야코는 툇마루에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찍이 이렇게 숨을 죽이고 바라본 적은 없었다. 부풀어 오른 엷은 분홍색의 커다란 면화가 파란 빛의 테두리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톡톡, 톡톡 줄어가는 요염한 생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아야코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신기한 밤을, 벚꽃과 함께 깨어 있자고 마음먹었다. (「밤 벚꽃」, 109쪽)
모든 생이 그렇게 흘러간다. 야속하게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래서 사는 동안 어떤 이의 죽음을 껴안기도 한다. 불륜 상대 요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죽음을 듣는 「박쥐」 , 출장을 위해 탄 기차 옆 칸의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통해 어린 시절 죽은 친구를 떠올리는 「침대차」는 가깝거나 먼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름다워서 슬픈 소설이다. 잔잔하고 담백하게 죽음과 삶에 대해 말한다. 그게 우리네 생이라는 게 더욱 아프다. 점점 죽음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나이를 살고 있다. 어떤 죽음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게 삶이구나 생각한다. 어느 날 문득 환상의 빛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할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스치듯 지나쳤을지도 모를 그것과 반드시 조우할 것이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