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오늘의 젊은 작가 6
서유미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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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이별은 아프다. 예정된 이별이라고 해도 그렇다. 연인에게는 찰나의 이별도 영원처럼 느껴진다. 헤어짐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굳이 사람이 아닌 사물과 공간에 대한 이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버려야 살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듯 이별에 있어야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 서유미의 장편소설 『끝의 시작』의 제목에서 그런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끝보다는 시작에 시작에 중점을 둔 것이다.

 

 소설은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영무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암 말기 환자지만 빨간 립스틱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무는 그런 어머니 곁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인식하기가 두렵다. 아내 여진과의 거리도 좁혀지지 않고 결국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 때문에 미뤄졌을 뿐 이혼은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영무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온 아내였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영무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말을 잃는 사막의 낙타 같았다. 아이가 유산되자 여진은 잡지사를 그만두고 미용실을 인수한다. 계획이 아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미용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지면서 둘 사이의 간극은 커졌고 여진에게는 동현이라는 젊은 애인이 생겼다. 여진은 잘못된 관계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문밖의 노크 소리에 응답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이 보내는 시간을 생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충만하게 즐기는 것,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사랑 없이 건조하고 퍽퍽하게 사는 것보다 뜨겁고 충만하게 사는 것, 그게 지금 여진이 바라는 삶의 방식이었다.’ (89쪽)

 

 영무에겐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자살한 아버지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있었다. 야반도주를 하듯 이사를 한 어머니는 언제나 환한 햇볕 같았다. 하지만 영무는 언제나 우울했고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도 쉽게 끝났다. 영무에게 드리워진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무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영무에게 삶은 죽음의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영무는 자신의 삶이나 하루가 묘지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일 자체의 유사성과 상관없이 태도나 심정이 그랬다. 이른 아침 황량한 공동묘지에 가서 밤새 쌓인 쓰레기와 낙엽을 치우고 상석 위도 쓸어 낸다. 하루 종일 기다란 빗자루를 든 채 묘지 안을 유령처럼 맴돈다. 묘지 안에서도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자리와 묘비, 상석의 크기와 재질로 구별된다. 그러나 부질없고 쓸쓸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07쪽)

 

 그런 영무를 통해 소정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집을 나간 동생과 바닥단 잔고가 모두 아버지로 비롯된 것만 같았다. 그나마 소정이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우유니 사막과 남자 친구 진수와 꿈꾸는 막연한 미래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소정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진수는 걱정과 근심을 모르고 살아왔다. 사랑했지만 이별을 택해야 하는 연인이었다.

 

 소설은 평범한 삶의 이야기다. 암의 걸린 어머니를 둔 영무와 그의 아내 여진, 그리고 영무가 국장으로 있는 우편취급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정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친근한 일상처럼 가까이 파고든 암 환자, 권태로운 부부 관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바쁜 취업 준비생의 모습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네 모습인 것이다. 위태로운 일탈을 꿈꾸는 대신 주어진 현실을 살아내고 그 안에서 웃음의 조각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들의 애쓰는 모양이 모양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운 건 왜 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이별은 삶의 과정일 뿐 끝이 아니었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며 꽃이 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피듯 완전한 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 생에 얼마나 많은 형태의 이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소정에게 남은 우유니 사막처럼 누군가에게 이 소설이 하나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다.

 

 ‘모니터 앞엔 여전히 우유니 사막의 사진이 붙어 있다. 좀 더 낡고 색이 바랬지만 가 보고 싶은 곳 1순위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제쯤 가게 될지 누구와 동행할지 알 수 없지만 꿈꾸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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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을 감싸던 스카프가 목이 아닌 침대나 소파에 있는 시간이 많다. 봄이 오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에 앞서 몸이 봄을 향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뜨거운 밥과 국을 찾는다. 매년 맞는 시기, 겨울과 봄 사이에서 겨울을 밀어내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벌써 냉장고의 김치엔 손이 안 가기 시작한다. 아, 이 간사한 입맛이라니.

 

 감기를 앓고 있을 때 줄였던 커피는 다시 제 양을 찾았다. 다시 머그나 커피 잔에 시선이 가고 참았던 책도 둘러본다. 읽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리지만 멈춤이 아니니 괜찮다고 말하면서 책을 주문한다. 1월과 2월 이런 책을 샀다. 읽은 책은 겨우 환상의 빛』한 권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계속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우선 『지평『8월의 일요일들을 곁에 두었다. 아직 읽지 않았으니 어떠냐고 묻지 마시길 바란다. 물론 다른 책도 다르지 않다.

 

 내게 코맥 매카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였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소설이 궁금하다. 『선셋 리미티드도 그런 결과물이다. 신영배의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가 새단장으로 돌아왔다. 첫 시집을 만나는 설렘의 시간이 곧 시작될 것이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다시 읽고 싶어 구매했다. 내게 없는 다른 책이 그렇듯 큰 언니 집 책장에 있을 것이다. 봄맞이를 알리는 책은 당연 메리 올리버의 휘파람 부는 바람이다. 죽음과 상실로 가득했던 단편집 『환상의 빛』을 읽으면서 겨울 바다와 봄 벚꽃을 떠올렸듯 『휘파람 부는 바람을 통해 봄향기를 맡는다.  Winter Hours: Prose, Prose Poems, and Poems 란 원제가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아직은 봄이 아니라고 겨울과의 동거가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치는 2월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그럼에도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 봄 햇볕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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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2-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모르는 책이 많아요. 휘파람 부는 사람_ 궁금해서 장바구니에 퐁당 넣어놨어요. 따뜻한 봄날_ 곧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요, 우리.

자목련 2015-02-12 10:01   좋아요 0 | URL
<완벽한 날들>을 먼저 만나셔도 좋아요. 김연수가 사랑하는 시인,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ㅎㅎ
눈부신 봄날을 기다리는 시간, 이미 봄인지도 몰라요^^

보물선 2015-02-1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이 지나면 이제 봄이 오는거죠! 봄~너무 좋은 단어^^

자목련 2015-02-12 10:00   좋아요 0 | URL
맛난 떡국 한 그릇 먹고 나면 짠, 하고 환한 봄이 나타날 것 같아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사라진 말들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기에 침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공포가 몰고 거대한 침묵,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이 말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는 쉽게 나쁜 기억이나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경험자가 아닌데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말하곤 한다. 무려 20여 년이 훌쩍 지났기에 이제는 나아지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몰랐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당신의 입술이 굳게 닫힌 이유를, 당신이 망각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모른다. 부끄럽고 창피한 고백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른이 되어서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소설과 영화로 수많은 당신을 만났지만 이번에 만난 한 소년은 달랐다. 소년이란 글자가 말하듯 너무 어렸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13쪽)

 

 ‘혼은 자기 몸 곁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45쪽)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소년은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러나 누나와 형 곁에 있고 싶었다. 친구를 찾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뜨거운 가슴을 뒤로 한 채 엄마가 있는 집으로 혼자 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강당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혼도 떠나지 못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모른다. 소년의 행동을 읽는 나는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서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오래 함께였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에 겹쳐질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척을 구별할 수 있었어. 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왔어.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59~60쪽)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죽어서도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다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제대로 된 생을 사는 이는 없다. 어느 누가 이토록 잔혹한 시간을 온몸으로 겪고 먼지를 털 듯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견디며 죽음을 바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시간은 밖의 시간일 뿐이다. 진실인 양 들려주는 보도와 몇 장으로 남겨진 사진을 통해 그 거리와 시간에 들어설 수 없다. 과감히 그 시간에 들어갈 용기를 가진 이도 없었을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인간 그 이하의 행위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런 말들은 쌓여 독이 되고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도려내고 도려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몸에 새겨진 잔인한 시각을, 끊임없이 펼쳐지는 악몽의 날들을 말이다.

 

 사실은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건 매우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이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들은 소설 속 인물들뿐이다.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 기억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이들도 그들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고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이처럼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직진한다. 우회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통의 본질을 캐내려 한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것은 외부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부의 존재와 맞닿았을 때 궁극적인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리하여 아주 미세하게 나마 고통의 일부에 공감할 수 있어야 희망이라 이름 붙일수 있는 삶의 조각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 대낮의 태양이 되기 위해 태양 안에서 그것을 견디려는 「노랑무늬 영원」 속 이런 구절처럼 말이다. 소설을 통해 내게로 온 소년, 그 소년이 내게 건넨 말들도 결국엔 그것이었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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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 방 - 죽음 후에 열화당 영혼도서관
존 버거, 이브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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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 바로,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잣말을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겨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십 년이라는 시간을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한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이미지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진 익숙함에 꺼내지 않는 옛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혀질 수 없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통해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나 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 방이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으로 사랑을 전부 담을 수 없다. 그저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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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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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뮈소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7년 후』와 『내일』을 읽었지만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묘하게 궁금하고 끌리는 작가였다. 그런데『센트럴 파크』는 달랐다. 강력한 펀치를 한 방 날린 듯한 느낌이랄까. 놀라운 흡입력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신선한 여운을 남겼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오늘을 맞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러니까 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소설은 이처럼 기이한 일로 시작한다. 주인공 알리스는 분명 파리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뉴욕의 공원 벤치였다. 거기다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고 낯선 남자와 함께 수갑을 찬 상태였다. 파리 경찰청 강력계 형사인 알리스는 즉각 총을 찾고 남자를 깨운다.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남자 가브리엘은 아일랜드에서 공연을 마쳤다며 영문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누가 자신을 파리에서 뉴욕의 센트럴파크까지 데리고 왔을까. 가장 필요한 건 휴대폰. 십 대의 휴대폰과 주차된 차를 도난하여 도주한다. 알리스는 파리의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가브리엘이라는 이 남자, 믿어도 괜찮을까?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벌인 일일까. 생각의 끝에는 과거 자신이 수사했던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있었다. 알리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2년 전 알리스는 범인이 휘두른 칼에 아이를 유산했고 병원으로 오던 남편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이와 남편을 잃은 게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는 그 후로 알리스에게 삶은 사라졌다.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알리스는 파리의 동료에게 비밀리에 범인의 흔적을 찾으라 부탁한다.

 

‘인생의 수레바퀴는 점점 빨리 돌아간다. 2013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완벽하게 이전의 모습을 되찾는다. 나는 넘치는 자신감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강력계를 이끌고, 그러는 사이 팀원들의 파트너십도 한껏 고취된다. 그 무렵 나는 다시 한 번 아직 삶이 나에게 바라는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252쪽)

 

 소설은 2년 파리의 잔혹한 사건과 현재를 오가며 알리스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알리스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복직 후 겨우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가브리엘과 함께 사건을 풀어날 갈 수밖에 없다. 알리스의 손바닥의 숫자와 가브리엘의 팔뚝에 상처로 새겨진 숫자만이 유일한 실마리다. 잠적한 살인사건의 범인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도주한 것일까. 숫자가 가리키는 호텔과 우연하게 발견하는 알리스 몸에 박힌 금속의 이물질.

 

 동료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범인을 추적하는 도중 알리스는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정체가 밝혀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비밀에 놀라고 만다. 손을 뗄 수 없게 만든 기욤 뮈소의 트릭에 빠져든 것이다. 센트럴파크에서 시작된 치열한 하루를 함께 달린 독자도 마찬가지다. 뻔한 범주에서 살짝 빗겨나간 결말이 완벽하게 즐겁다. 절망의 순간에 누군가 손을 내민다는 설정이 진부하지 않고 완벽하게 다가온다. 기욤 뮈소는 소설을 통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단 한 사람이 있어 삶은 빛날 수 있고 적으로만 여겨졌던 세상이 동지로 다가오는 걸 느끼게 된다는 걸 말한다. 그만큼 기욤 뮈소의 애정이 담긴 소설이 아닐까 싶다. 길고 긴 겨울밤을 함께 보낼 이야기를 찾는다면 『센트럴 파크』가 제격일 것이다. 

 

‘우리의 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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