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돌이켜보면 삶은 언제나 아쉬운 장면뿐이다. 그중에서도 몇 장면은 평생 동안 불에 덴 상처로 남아 자신을 따라다닌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흐릿해지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만 나타나는 환영처럼. 그것을 포옹할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후회와 실수를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기를 낼 때 삶은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흘러갈 수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우리는 너무 늦게 깨우친다. 아니, 후회로 가득 찬 시절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상처와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래서 M.O. 월시의 『마이 선샤인 어웨이』의 화자가 들려주는 그의 십 대 시절의 이야기는 그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모르기 때문에 서툴렀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고 상대를 위한 노력이 오히려 아픔을 주고 말았다.


소설은 ‘너’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고백이자 용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할까. 1989년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의 한여름에 일어난 사건이 시작이다. 화자는 그 사건의 용의자 중 하나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평범하게 흐르던 여름 날, 달리기를 잘 하는 학교 인기 스타인 화자가 짝사랑한 열다섯 살 린디에게 벌어진 성폭행 사건이다. 네 명의 용의자에 화자도 포함된다. 스스로가 용의자라고 밝히니 범인을 찾아내는 스릴러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불량아로 찍힌 구순열 흔적이 있는 학생, 많은 고아들을 맡았던 위탁가정의 남편 정신과 의사, 위탁아동의 한 명인 문제 학생과 화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소문과 동네에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범인으로 유추하면서 일상을 이어간다. 화자의 눈에 비친 린디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육상부도 그만두고 학교에서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오직 화자만이 그녀를 관찰하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열네 살 소년이 생각하는 방법은 너무도 무지했다. 화자의 말실수로 인해 학교에는 린디의 소문이 자세하게 퍼진다. 무엇이 린디를 위한 일인지 화자는 잘 몰랐다. 그저 린디와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그래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했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비밀상자에 담긴 린디에 관한 것들이 어머니를 좌절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더 큰 불행을 물고 온다. 누나가 죽음으로 집안의 어둠은 걷힐 줄 모르고 어머니의 우울은 깊어간다. 당시에 화자는 그것들의 실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열네 살의 소년에겐 당연한 일이다. 린디와 통화를 하면서 린디의 모습을 상상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일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밤마다 린디의 전화를 기다린다. 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린디가 괜찮아진 건 아닐까 착각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그동안 범인을 찾기 위한 화자의 말과 행동들이 오히려 린디에게 가장 큰 상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린디가 그 일로 인해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린디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화자는 너무 늦게 알았다. 린디가 어머니와 함께 동네를 떠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재회한다. 남편과 함께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난 린디. 서로에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배턴루지의 기억만으로 가득하다. 과거의 나쁜 기억은 사라진 것처럼. 하지만 린디가 얼마나 힘겹게 그 시간을 통과했을지 알지 못한다. 사건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버티며 살았을 시간들.


소설은 린디의 사건을 가장 중심에 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층위를 보여준다. 1990년대의 배턴루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사회소설이자 아름답게 아픈 성장소설이다. 순수하고 솔직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 아픈 짝사랑의 기억뿐이 아니라 부모의 이혼과 가족의 죽음을 통해 조금씩 삶을 배우고 알아간다. 그때 밝히고 싶었던 진실이 누구를 위한 진실이며 진실이라는 게 과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고 해도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시간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다. 어떤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하고 미묘한 삶을 생각한다. 사랑의 기억으로 회복 중인 삶에 대해서.


나아가 기억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켜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 다시금 우리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한 여자를 바라보게 한다. 그녀는 십 대 청소년 시절에 보았던 사람과 참 다른 사람, 훨씬 복잡한 사람이다.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그녀의 삶을 총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삶뿐 아니라 내 삶까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한 희생. 우리가 겪어낸 고통. 우리가 어머니에게 안긴 고민. 어머니가 우리를 키운 방식. 그래 그래 그래.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그것이 기억의 목적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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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할 때마다 주저하는 몇 권의 책이 있다. 바로 동화책이다. 책등이 낡고 누렇게 변했지만 차마 버릴 수 없다. 책을 버리면 그 시절의 나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동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감정들, 그러니까 주인공과 내가 하나가 되어 울고 웃던 마음까지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게 맞겠다. 그냥 저기 저 책이 있으니 혼탁해진 내 마음도 책을 펼치는 순간 맑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이서희의 책 제목처럼 어쩌면 동화를 읽어야 할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바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공감하고 저자가 소개한 책과 구절을 따라 읽고 밑줄을 긋게 된다. 목차를 통해 만난 반가운 제목의 동화들, 아, 이 동화를 내가 읽었고 만화로 보고 매일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 책들이다. 동화가 전하는 일종의 교훈적인 메시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모르는 어떤 나만의 마음을 동화 속 주인공과 소통하고 싶었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동화책은 어린 시절이 아닌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읽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고 최근에 만난 동화도 있다. 저자가 분류한 대로 5가지 키워드(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불안한 시간을 위하여, 모험과 불확실함 속에서, 특별한 세상을 마주하며,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를 차례대로 읽어도 좋고 반가움의 크기대로 만나도 좋다. 저자가 소개하고 알려주는 동화 속 명언 320가지는 모두 다 감동적이다. 이미 우리는 메마른 감성의 어른이니 그 어떤 동화라도 사실상 필요하다는 걸 잘 안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모두 필요한 마음이니까.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속 남매가 찾은 파랑새는 결국 집에서 키우던 멧비둘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항상 먼 곳에서 타인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다. 코로나로 인해 행복은커녕 작은 웃음조차 잃어버렸다고 믿는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묻는 시간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걸. 어쩌면 이 시기가 지나면 또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박한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 (30쪽)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동화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이 주는 희망과 긍정의 힘은 항상 우리는 웃게 만든다. 어려운 현실을 잊기 위한 상상의 나래가 다소 엉뚱하고 어른들의 눈에는 괴상해 보이지만 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무엇 하나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앤의 인생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아침은 언제나 흥미로워요.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상상할 거리도 아주 많으니까요. (75쪽)


이제 저는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그 모퉁이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을 거예요. 길모퉁이는 매력이 있어요,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거든요. (78쪽)


사실 어른이 되고 모퉁이는 기대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피할 수 없으니 우리는 삶이라는 모퉁이를 돌 수밖에 없다. 어떤 모퉁이가 나오더라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그러니 스물일곱 번의 수술을 한 R.J. 팔라시오의 「아름다운 아이」의 주인공 어기에게 삶은 얼마나 힘들까.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나를 평범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173쪽)


친절이란, 참으로 간단한 일. 누군가 필요로 할 때 던져줄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 우정 어린 행동. 지나치다 한 번 웃어주기. (176쪽)


가장 최근에 만난 이현의 「푸른 사자 와니니」나 누구에게라도 추천하는 루리의 「긴긴밤」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같이의 삶을 생각한다. 여성, 외국인, 장애인, 노인 등 사회 약자를 모두 품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극심한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팽창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게 바로 연대의 가치라는 걸 알려주는 아름다운 동화다.


와니니 무리는 그리 용맹하지 않았지만, 늘 함께해 왔다. 강해서 함께하는 게 아니었다. 약하고 부족하니까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거였다. 그게 친구였다. 힘들고 지칠 때 서로 돌봐 주는 것, 와니니들은 그것이 무리 지어 사는 이유라고 믿고 있었다. (157쪽)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잘 할 수 없다. 계획은 언제나 실패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좌절한다.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놓친 마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320개의 문장으로 만나는 동화를 통해 깨우친다. 지치고 찌든 일상을 일으켜 세우고 펴줄 것들은 때로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 곁을 지키는 이 동화책들처럼.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속 주디의 말처럼.


저는 행복의 참된 비법을 찾았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한없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만 꿈꾸는 거도 아니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에요. (210쪽)


순수했던 마음까지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한없이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주는 시간이 될 것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벅찬 감동과 환한 미소를 안겨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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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03 14: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책 내보낼 때 갈등 고조시키는 장르가 그림책이더라고요. 반가우세요

[푸른 사자 와니니」 「긴긴밤」을 추천해주시니, 찾아보겠습니다^^

자목련 2021-11-04 13:58   좋아요 2 | URL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책은 정말 떠나보내기 어려워요. ㅎㅎ
와니니와 긴긴밤은 참 좋은 동화라고 말씀드려요. 기회가 닿으면 만나보세요^^

그레이스 2021-12-09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리하셔도 아깝진 않으실듯 이 페이퍼 고이 간직하시면...^^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2 | URL
넵!!
좋은 동화는 계속 이어지니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요^^

mini74 2021-12-0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강 머리 앤 ㅎㅎ저도 넘 좋아요.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2 | URL
앤은 볼 때마다 새롭고 좋아요^^

서니데이 2021-12-09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2-10 10:36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 님,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시선 378
신미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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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시집을 구매했다. 작고 얇은 시집을 손에 쥐면 아릿하면서도 따뜻했다. 어떤 날에는 시를 읽는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읽지도 못할, 시집을 쌓아두는 일이 하나의 의식처럼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시집들은 돌보지 못한 마음처럼 한구석으로 몰아두었다. 그러다 미안한 마음에 꺼내는 이런 시집. 신미나의 첫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속 첫 시를 읽으며 마음이 무너진다. 어쩌자고 이런 날들에 이런 시를 읽는가.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려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이마」, 전문)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나를 달래준다. 울컥 가슴에 메이는 이상하고 묘한 기분을 숨길 수 없다. 이러니 시를 자꾸만 찾을 수밖에. 7년 전에 나온 시에 이제서야 읽는 미안함이 사라지고 고마움만 커진다.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어디선가 나를 훔쳐보고 나를 위해 따스한 햇볕을 한 조각 뿌리는 것 같은 착각.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훔치다

쌀벌레 같은 것이 만져졌다

검지로 찍어보니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골무 속에 넣었다

엄마는 자꾸만 밖으로 기어나왔다


엄마, 왜 이렇게 작아진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


다음 생에서는

엄마로 태어나지 말아요


손가락으로 엄마를 찍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눈가를 문질렀다 (「낮잠」, 전문)


매미가 울다가

어느 순간 뚝 그쳤다

뜨거운 길 위에서

내 영혼을 만났다


이게 네 운명이냐


내 영혼은

작은 주머니를 주고 떠났다

주머니 끈을 풀자마자

뭔가가 휙 날아갔다


그때 알았다

소중한 걸 놓쳐버렸다고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꿈속에서 나는 울었다


무언가 날아가버렸고

빈 주머니만 남았다 (「환생」, 전문)


요란한 마음 때문인지 마음 끌리는 대로 시를 읽고 내 맘대로 시를 생각한다. 시를 읽는 동안 시에 풍덩 빠져들고,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니겠는가. 잘 모르지만 신미나의 시들은 흐트러진 조각을 잘 모아서 정리해 반듯한 감정을 그려내는 듯하다. 조심조심 그 조각을 살피고 만지는 시간은 얼마나 길고 어려웠을까. 어떤 감정을 간직하고 그것에서 태어난 시. 사적인 마음을 품게 만드는 이런 시가 참 슬프면서도 싫다. 그러니 또 이럴 때는 시는 시일뿐이라고 차갑고 단호하게 마음을 돌린다. 그래도 시를 읽는 일이 나쁘지 않다. 거칠었던 마음이 시를 읽는 동안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홈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연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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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을 달래는 일은 모든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다. 단지 화가 난 거라면 오히려 괜찮다. 그 마음을 화로 치환해 보면 그 화를 명확하게 알 수 없을 때 더욱 힘들다. 어떤 결과에는 원인이 있을 텐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일련의 글들에서 나는 우울하고 힘들고 어쩔 줄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느꼈을 테니까. 그래서 불친절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어쩌겠는가. 아직 나는 이렇게 밖에 쓸 수 없고, 이 공간은 최우선적으로 나를 위한 공간이니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랄 수도 없다. 그냥 사는 일이 참 어렵고 버겁다는 것.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니까. 그런 마음을 아주 쪼그만 보태주면 좋겠다.


우선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냥 소소한 것들, 일상의 작은 파편들이 주는 기분에 대해 말을 건넨다. 그러다 확장이 되면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들어본다. 우리는 때로 아주 단순해서 뭔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둡던 마음이 환해지니까. 그래서 소비는 좋다. 물론 이런 과정이라면 화는 때로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상처받은 감정을 달래는 일은 더 오랜 시간과 많은 정성을 요구한다. 그 마음을 공감해 주는 일부터 필요하다. 사실, 전혀 공감하지 않는 일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1%의 공감이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상대의 마음은 헤아리려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지치지 않는 일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어느 순간은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며 나머지 시간은 깊고 어둡게 침잠하니까. 스스로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껴서 애쓰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달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상대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 달램이 그대로 전해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달램의 신호를 멈출 수 없다.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신호가 약해졌는지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를 달래는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달래야 다른 마음도 볼 수 있으니까. 나를 달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이 때로 버겁다. 그러다 부러질까 걱정이다. 부드러운 단단함이 나를 힘껏 안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거나 이런 책을 검색하고 기대하는 일로 나를 달랜다. 이유리의 첫 소설집과 김초엽의 단편집 이문재 시인의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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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10-2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는 일은...항상 너무 어려워요. 쉬워졌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뭔가가 들이닥쳐요. 자목련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브로콜리 펀치>! 그 제가 기억하고 있던 이유리 작가의 단편집이네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10-29 10:28   좋아요 0 | URL
네,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온다는 걸 아는데도 참 어렵습니다.
이유리 작가는 저도 블랑카 님 덕분에 기억하는 걸요. 기대하고 있어요^^

막시무스 2021-10-28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랭의 신호 점검하기! 오늘의 교훈으로 간직하겠습니다!즐건 하루되십시요!ㅎ

자목련 2021-10-29 10:26   좋아요 1 | URL
^^*
달콤한 주말을 기다리는 금욜, 막시무스 님 향기롭게 보내세요!
 
#킬러스타그램
이갑수 지음 / 시월이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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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쾌한 뉴스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요즘처럼 그 재미가 간절하게 그리운 적도 없었다. 그 재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내가 찾고 싶은 게 정말 재미일까. 말장난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언가를 계속 찾는다. 『#킬러스타그램』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소설을 읽는 일도 그 무언가의 하나다. 킬러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스릴러일까? 아니, 스릴러라고 할 수는 없다. 작정하고 풍자와 유머를 건네는 약간의 블랙코미디라면 맞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14쪽)는 위대한 가업을 이어가는 가족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누나에 이어 고등학생인 ‘나’까지 모두 킬러인 집안. 물론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요리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고고학에 빠진 할머니, 의사인 누나, 검사인 형, 주부인 엄마로 지내지만 저마다의 특기를 살려 사람을 죽인다. 현재 아버지는 실종 상태다.


할아버지는 독, 할머니는 폭파, 아버지는 자살 전문가, 누나는 저격수, 형은 사고사 전문, 엄마는 사건을 의뢰받고 역할을 구성하며 후진을 양성한다. 그런 이유로 아무 기술도 없는 ‘나’는 합기도를 배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나간 삼촌이 운영하는 합기도 학원에 다닌다.


킬러가 될 때 그들에겐 콜사인이 있다. 그러니까 부캐 정도라고 할까. 할아버지는 옹심이, 할머니는 꼬마, 엄마는 마더, 누나는 제니, 형은 미네르바. 수련 중인 ‘나’는 아직 없다. 이들 가족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그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가 반드시 범죄자를 제거하고 테러를 중단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더는 해마다 이복동생이 생겨 유산의 몫이 점점 줄어드니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의뢰,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30년 전 곗돈을 몽땅 들고 도망간 계주를 죽여달라는 의뢰 같은 것이니까.


마더의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 갑작스러운 엄마의 유방암 수술로 인해 ‘나’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외계인 같다는 이웃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에 이웃이 이사를 가는 방법으로 해결,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삼촌을 죽여달라는 조카에겐 독립할 수 있는 돈을 보낸다. 킬러라 해서 모두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면 문제가 될 수 없다.


이쯤 되면 이 소설이 무섭거나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으니까. 국제 의료봉사 단체 소속인 누나와 검사인 형의 경우를 보면 킬러 이전에도 죽음을 다룬다.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누나는 재난과 전쟁으로 인해 의사가 필요하다. 때문에 제니의 표적은 외국의 요인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죽음의 숫자를 먼저 따진다. 미래를 위한 희생은 필요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으면 미래 자체가 없다. 전쟁에서 최초로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선도 악도 없다. 시작하는 순간 양쪽이 모두 죽고 죽일 뿐이다. (103쪽)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을 생각한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고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다. 그것은 진정 더 나은 사회,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것일까? 어쩌면 작가는 그런 걸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가 생각나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독특한 소설이다.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하나 더 말하자면 작가의 말을 대신한 ‘소설 적성 검사’도 흥미롭다. 내가 아는 소설가와 읽은 소설이 등장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소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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