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만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 삶 전반에 자신만이 아는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 비칠지라도 상관없다. 나만의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채우는 일에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지칠 게 뻔하다. 우리는 그가 아니고 그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하거나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의 장편소설 『고독한 얼굴』의 주인공 ‘랜드’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갈 뿐이다. 그에게 삶은 그런 것이다. 랜드에게 산을 오르는 일, 고산 등반은 그 자체가 삶이었다. 어떻게 등반을 시작했고 무엇 때문에 산에 매료되었는지 소설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오르는 일에 기쁨을 두는 것일까. 아니다. 랜드의 욕망은 산 정상을 오르는 정복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랑스의 알프스 ‘샤모니’의 드뤼까지 죽음의 여정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곳에서 친구 캐벗과 드뤼 서벽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너무 두려웠고 조바심이 났다. 부상을 당한 캐벗이 죽을까 봐, 그런 친구를 홀로 남겨두고 랜드가 혼자 암벽을 끝낼까 무서웠다. 동시에 도대체 산악 등반에 성공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물론 소설을 다 읽고서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랜드만의 기쁨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니까.


물론 설터가 구사한 등반의 과정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가 그려낸 문장을 통해 나는 눈앞에 설경의 알프스를 오르는 두 남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등반 소설이라는 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느끼는 전율을 만끽하는 스포츠 정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길을 찾아 등반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화될 수도 있다. 수없이 마주하는 돌방상황, 그때마다 달라지는 선택지와 그에 따른 책임들. 소설 속 ‘산’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산악인은 산을 알아야 한다. 속도와 판단은 필수적이다. 계속 오르든 하산하든 고전적인 결정은 언제나 같다. 계속 오르는 것이 더 쉬운 때가, 사실상 정상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힘이 있어야 한다. (93쪽)


등반 과정 중에는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 그 지점에서 산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선 하나만 있을 뿐인 그곳을 어떻게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109쪽)


랜드가 드뤼에서 고립된 조난자를 구조한 후에는 그 기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언론이 주목은 물론이고 산악계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랜드는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길을 원했다. 스스로 고독을 자처한 젊은 청년은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도무지 잘 모르겠다. 그러기엔 뭔가 부족하다. 랜드에게 산이 왜 유일한지 와닿지 않는다.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는 진부한 설명보다는 절실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랜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소설을 통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대학에 실패하고 군대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쓸쓸한 낙오자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정착하는 대신 떠돌이처럼 유랑의 삶을 즐기는 방랑자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은 무책임의 다른 말이다. 그가 만나고 관계를 맺은 후 떠나버린 여자들은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여겨진다. 왜 떠나야 하는지 그가 산으로 향하는 맹목적인 이유에 대해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랜드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 랜드가 만나는 등반가들도 비슷하다. 때문에 산은 거대한 남성성을 상징하고 하나의 안전한 도피처로 여겨진다. 물론 도피처에는 위안, 위로, 안식, 휴식의 뜻이 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처럼 소설 속 랜드도 그 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등반을 통해 나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174쪽)


『고독한 얼굴』 은 제임스 설터가 실존 인물인 한 산악인에 대해 조사하고 자료를 찾아 읽은 후 완성한 소설이다. 때문에 등반의 고통과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고전이나 교과서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등반 과정과 산을 오르는 동안 랜드의 심적 변화에 공감하며 함께 산을 타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숙엄한 분위기나 경건한 태도는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인간이 지닌 절대적 고독을 랜드를 통해 보여주려는 설터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아름다운 울림으로 기억하기엔 그 파동이 너무 짧고 약하다. 


그럼에도 랜드의 고독과 산을 올랐을 때 그가 맛본 기쁨은 인정한다. 우리가 저마다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삶이라는 게 항상 산의 정상인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도 느꼈을 것이다. 삶과 고독은 어디에나 있다. 산의 초입에도 산의 중반에도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그 산을 바라보는 지점에도.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고독과 기쁨이 있으니까. 랜드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려 했고 설터는 함께 나누려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작은 아직 -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 재탄생’ 프로젝트
세오 마이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한다. 쉽게 떼어 놓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라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어려운 게 없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뜻대로 커주지 않고 자식은 부모가 너무 자신을 모른다고 여긴다. 처음부터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서로를 힘들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흐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오 마이코의 소설 『걸작은 아직』 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니. 아이를 잃어버렸거나 입양 보내고 긴 시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만난 감동의 스토리가 아닐까 기대할지도 모른다. 전혀 아니다.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소설만 쓰는 아버지 가가노와 아들 도모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가노와 미쓰키는 한 번의 만남으로 도모가 생겼지만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미쓰키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가노는 양육비를 보내는 조건으로 한 달에 한 장의 사진을 받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가가노는 사진으로만 도모를 만났다. 그런 도모가 자신을 찾아왔다.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첫 만남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도모는 가가노의 집에서 지내겠다고 한다.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한 한 달 정도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원고는 메일로 보내고 편집자를 만나는 일도 거의 없는 가가노에게 도모의 방문은 그의 일상을 흔드는 일이 되었다. 가가노와 달리 도모는 거리낌 없이 생활을 이어간다. 출퇴근을 하면서 만든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편의점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와 가가노와 함께 먹는다. 늘 먹던 커피도 도모의 방식은 달랐고 가가노는 어느새 그 맛을 좋아한다.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을 가가노가 사러 나가기에 이른다.


도모는 가가노를 집안이 아닌 밖으로 이끈다. 아주 사소한 커피 주문부터 이웃을 만나고 동네 소식을 듣고 가을 축제에도 참여한다. 도모가 없었더라면 가가노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가가노는 조금씩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는 아들 도모가 궁금해진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이, 미쓰키는 한 장의 사진만 보내고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진 속 이야기를 도모에게 들으면서 가가노는 자신의 부모를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 그 뒤로 연락을 하지 않은 가가노다. 지난 25년 동안 어떻게 아들을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가가노 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사정이 있으니 가가노와 도모는 양호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된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도모는 가가노에게 집으로 돌아간다고 전한다. 가가노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도모를 붙잡는다. 하지만 정작 도모의 성장과정이나 어머니인 미쓰키에 대한 건 하나도 묻지 못한다. 모두 알고 싶지만 말로 설명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오랫동안 소설 속 대화만 들어왔다. 등장인물들은 쉽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빛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풀이 죽어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슴속에 간직한 진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 마음속 어딘가에 소망. 산다는 건, 나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런 질문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가 겹쳐지면서 그 안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더라도 도모가 잘 자랐음을 쉽게 알 수 있듯이. (199~200쪽)


한 달의 시간으로 지난 25년의 시간을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통해 가가노와 도모 사이에는 뭔가 생긴 건 맞다. 도모의 방문으로 가가노는 28년 만에 자신의 부모를 찾아 나선다. 가가노는 아버지이자 아들이니까. 가족이라는 건 무엇일까. 단순히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응원하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이라면 괜찮은 가족일까.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부자라는 설정은 뭔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기대와는 다르게 소설은 따뜻하고 유쾌한 일상으로 흘러간다. 잔잔하고 평온한 소설은 부모가 된다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가족이 탄생하고 만들어지는지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25년 만에 시작된 아버지의 역할, 고독으로 가득했던 어른 가가노가 세상과 소통하는 성장소설이다. 이제 막 부모가 되는 이들에게, 부모로 살면서 여전히 자식이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선물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집 2022-09-19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럭키걸의 세오 마이코네요. 구매각입니다~

자목련 2022-09-20 11:51   좋아요 1 | URL
기억의집 님은 이미 작가의 팬이시군요. 그렇다면 즐겁게 만나실 수 있을 듯해요^^*

mini74 2022-09-19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란 영화제목이 문득 떠오르네요 ~ 25년 만에 시작되는 아버지 역할이라니. 흥미가 생깁니다 *^^*

희망으로 2022-09-19 13:37   좋아요 1 | URL
아....저도 그 영화가 떠올랐어요.
부모와 자식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인것 같죠.
어쩌면 여기 알라딘에서도 특별한 친구로 발전된 케이스가 많을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2-09-20 11:5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버지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그 영화도 비슷합니다.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소설이었어요^^
 
톨락의 아내
토레 렌베르그 지음, 손화수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턱을 가린 덥수룩한 수염, 오뚝한 코, 가늘게 뜬 눈, 표지 속 남자는 분명 ‘톨락’일 것이다.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이 남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노르웨이 문학의 거장 토레 렌베르그의 소설 『톨락의 아내』는 제목만 보면 아내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소설을 들여다보면 톨락의 아내 ‘잉에보르그’가 아닌 그녀의 남편 톨락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화자 톨락이 자신의 지난 삶과 실종된 아내 잉에보르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톨락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던 아내는 어디로 사리진 것일까. 소설은 오직 톨락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사라진 아내, 아들과 딸, 주변 상인과 이웃은 단역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톨락에 의한 톨락을 위한 톨락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앉자 고해성사를 하는 한 남자를 상상하게 된다. 아내가 사라진 후 그의 곁에는 입양한 아이 ‘오도’가 있을 뿐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 오도를 입양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생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해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고 데려온 정도다. 아내는 오도를 정성으로 대했고 치료를 위해 애를 썼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톨락은 그렇게 믿었으니까. 


톨락은 스스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도시 외곽의 목재소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내만 있으면 다 괜찮았다. 톨락이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성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이는 잉에보르그, 단 한 사람뿐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시로 이사를 가자는 아내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아들과 딸에게도 톨락은 친절하거나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톨락은 자식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자식들과 자신 사이에 불편함은 잉에보르그가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과거일 뿐이다. 아내는 실종되었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각자의 삶을 꾸려 톨락의 곁을 떠났다. 오도만이 톨락과 지낼 뿐이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과거에 행했던 모든 일과 과거에 보았던 모든 것과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차례 눈앞에 스친다. 하나도 빠짐없이, 좋든 싫든, 바로 그때, 우리는 스스로와 화해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다. (55쪽)


톨락은 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처럼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식들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톨락이 꺼내려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제목이 말해주는 아내 잉에보르그에 관한 것이리라. 톨락과 잉에보르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독자 역시 가장 궁금해하는 일이다. 물론 이미 톨락의 고백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통수와 고집불통의 남자, 그를 닮은 아이 오도에 관한 진실까지도 말이다.


톨락은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지도 모른다. 친절하고 다정한 잉에보르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자신할 것이다. 그랬기에 오도를 대하는 잉에보르그의 이중적 태도에 그의 행동도 후회가 아닌 사랑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정해놓은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남자. 완고하고 억센 가부장적인 아버지, 잉에보르그를 향한 모든 게 사랑이라고 믿는 남자의 치유될 수 없는 고통. 스스로가 부여한 고통을 그는 끝낼 수 있을까. 


『톨락의 아내』가 특별한 점은 실종된 아내를 내세워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와 스릴러 방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자전적 소설이자 독백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톨락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건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톨락이란 남자의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는 토레 렌베르그의 문체가 이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정을 서툴게 내뱉으면서도 단호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시킨 문장은 아름답다. 압축된 세 문장으로 소설의 전부를 보여준다. 이것으로 『톨락의 아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내 이름은 톨락. 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과도 걸맞지 않는다. (26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09-07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교보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얌전하게 내려 놓았습니다.

대신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을 샀네요.

결국 톨락도 읽게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자목련 2022-09-07 16:05   좋아요 2 | URL
이 책, 묘하게 매력적입니다.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사셨을까요?
 

9월이 되었다. 겨우 선풍기 하나만 정리했고 붙박이장에 넣어두려던 제습기는 어제 다시 사용했다. 태풍 11호 ‘힌남노’의 힘이 세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바람이 무서웠다. 창문을 닫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에 깨고 말았다. 스마트폰으로 태풍의 경로와 내가 사는 지방의 날씨를 확인했다. 다시 잠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고요한 마음을 지키려고 해도 마음이 요란하게 요동친다. 


8월의 마음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그 마음과 나는 좀처럼 분리가 되지 않는다. 9월이니 9월의 마음이 필요한데 도통 새로운 마음이 자라지 않는다. 달마다 새로운 마음이 자라고 키울 수 있으며 좋겠다는 생각이다. 매달 지정된 마음이 내게 도착해도 좋을 지경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은 가까이 지내며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제 오후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어려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다만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생각할 뿐이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지만 막연하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차이가 크다. 내게 맑고 잔잔한 9월의 마음이 필요하듯 친구에게도 평온하고 보드라운 9월의 마음이 필요하다. 


9월은 어떤 마음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 저마다 애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위해 내게 9월의 소설도 필요하다. 소설이 불러올 다른 마음이 나의 9월의 마음을 다스려줄 수도 있다고 믿으니까. 때로는 한 권의 소설 속 하나의 문장이 그런 힘을 불러온다. 





9월의 소설은 공교롭게도 작가의 이름부터 기쁨과 기대를 안겨준다. 장편소설 『자두』로 만나 이주혜의 단편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단편집 『어젯밤』을 읽고 반해버린 제임스 설터의 장편 『고독한 얼굴』, 문장 하나하나 너무 아름다워 읽는 게 아까울 정도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 『가벼운 마음』, 보뱅의 소설은 처음이라 설렘이 크다.












‘힌남노’가 지나간 하늘은 더없이 맑고 선명하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냉큼 잡고 싶은 구름이다. 9월에 냉큼 잡고 싶은 마음도 이런 걸까. 8월에는 숨어 있어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었던 맑고 선명한 마음 말이다. 9월에 지니고 싶은 마음, 전부는 아니더라도 맑고 선명한 마음을 가끔씩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2-09-0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세 권 중에 어떤 책이 자목력님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기대됩니다. 저는 소설 읽기 소강 상태라 그만큼 스마트폰을 보게 되네요. 다음 페이퍼 기다렸다 자목력님 추천하시는 책을 읽어볼까요...

자목련 2022-09-07 15:53   좋아요 0 | URL
설터의 장편도 기대가 되고 이주혜의 단편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요. 블랑카 님의 댓글로 즐겁게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 열심히 읽어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마음, 급 땡기네요.

보뱅의 다른 책들도 검색해봤습니다.
신간이 도서관이 비치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목련 2022-09-07 15:51   좋아요 1 | URL
보뱅의 에세이는 완전 추천하는데 이 소설은 아직 읽기 전이라 모르겠어요.
소설도 좋을까 궁금해서 구매했는데 읽기는 아직이라서요. ㅎ

레삭매냐 2022-09-07 16:05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고 나서 어제
도서관에 가서 구판 <인간, 즐거움>
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가벼운 마음> 오늘 교보에 가서
샀습니다. 추석 때 읽을라구요.

바람돌이 2022-09-0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에게도 친구분에게도 얼른 9월의 마음이 찾아와 평안하시길요.
우리 마음도 쉽게 쉽게 리셋이 되면 좀 편안할텐데 늘 쉽지 않네요.

자목련 2022-09-07 15:5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댓글에 평온이 전해집니다. 감사해요.
원할 때마다 리셋되는 마음이면 좋을 것 같아요.

희선 2022-09-07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분은 자목련 님한테 힘든 일을 말한 것만으로도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희선

자목련 2022-09-07 15:48   좋아요 0 | URL
희선 님 말씀처럼 그랬으면 다행이고요. 맑은 오후 이어가세요^^
 

약하든 강하든, 영리하든, 단순하든, 우리는 모두 형제요.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오. 모든 동물은 평등하오. (42쪽)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먼저 만났다. 조카를 위해 골랐던 고전과 세계문학의 목록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소설은 모두가 알다시피 우화다. 매너 농장 주인 존스를 내쫓고 동물들이 실질적인 농장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 시대를 풍자한 소설로 당시 러시아(소련)의 스탈린 시대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스탈린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차치하고도 필독서로 꼽히는 이유는 어느 시대든 통렬한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스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 꿈에 대해 말하던 메이저 영감은 혁명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물들의 봉기는 성공했다. 젊고 영리한 수퇘지 나폴레옹과 스노볼을 필두로 농장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다.‘매너 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바뀌는 순간 동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기대했을 것이다. 규제가 아닌 자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때부터 정치가 시작된다. 모든 건 정치적이라는 말처럼 나폴레옹의 정치가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대척점에 있던 스노볼은 나폴레옹과는 다르게 동물농장을 이끌기를 원했다. 동장의 다른 동물들과 조직해서 ‘동물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규칙 같은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그런 활동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통치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눈치챈 동물은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농장에는 많은 것들이 부족해졌다.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스노볼은 풍차를 만들기로 한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스노볼의 풍차에 찬성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풍차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나폴레옹의 고음을 신호로 개가 들이닥쳤고 스노볼은 동장에서 쫓겨났다. 나폴레옹이 남모르게 다른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개를 사육했다. 더 이상 토론은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게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로 흘러갔다. 가장 성실한 일꾼인 말 복서는 더 열심히 일했고 암탉은 더 많은 알을 낳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무시했던 풍차를 다시 만들었고 농장은 부유해졌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때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 사이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만 말하지 못할 뿐이다. 글자를 배우지 못해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다. 


동물 농장은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맨 꼭대기에는 돼지 나폴레옹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정보를 독점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소문을 퍼트렸다. 동물농장은 강자인 돼지들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들 곁에는 개가 있었다. 소설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과 독재자의 횡포를 그대로 보여준다. 각각의 동물은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 모습이다. 병들 때까지 일만 하던 말 복서는 노동자의 표본이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복서의 모습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모두 똑같았다. 돼지들의 얼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그리고 다시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시선을 움직였다. 누가 누군지 이미 분간할 수가 없었다. (150쪽)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는 돼지, 침대에서 자는 돼지, 술을 마시는 돼지는 그들이 혁명을 부르짖던 과거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평등과 차별 없는 사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사회이든 반드시 정치와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으로 만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서문이 아니더라도 현재 러시와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국제사회의 흐름과 자원을 무기 삼아 국가적 지위를 내세우는 나라들의 행동을 소설 속 나폴레옹의 횡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공존과 연대의 미래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것 같아 두렵다. 소설 속 당나귀 벤자민의 말처럼 굶주림, 고생, 낙담이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 될까 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이 지금보다 한결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굶주림, 고생, 낙담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는 것이었다. (141쪽)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좋은 책이니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폴레옹은 누구일까,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라진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동물들이 제게 힘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녀석에게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과 부자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방식이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이 작품에 대해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이 소설이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한다면 실패작이다.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실제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여러 일화들을 가져왔지만 이 소설에는 개략적으로만 사용했으며 시간적인 순서도 실제와 다르게 바꿔놓았다. 이야기의 균형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아마도 내가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탓인 듯하다.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이 소설이 돼지와 인간의 완전한 화해로 끝난다는 인상을 받을 독자가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커다랗게 울리는 불협화음 속에서 소설을 끝내려고 했다. (29~30쪽, 우크라이나어판 서문 중에서)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10-0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서재에 가끔 그냥 고냥님 보러 오곤 합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자목련 2022-10-08 13:52   좋아요 1 | URL
냥이는 사진 속에만 존재해요. 오빠네 집에서 사라져버렸어요. ㅠ.ㅠ

서니데이 2022-10-07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22-10-08 13:52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저도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즐거운 시간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10-07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2-10-08 13:5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맑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