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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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감정이 있다. 당연하다. 애써 숨기려 해도 어떤 틈새로 감정이 새어 나온다. 참 이상하다. 글이 주는 위로와 위안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위로를 전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떤 글은 슬그머니 내가 기대게 만든다. 유진목의 『슬픔을 아는 사람』도 그런 책이다. 누군가 이 책이 많은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사람 꽤 있다. 그러니까 슬픔 따위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 슬픔이 없는 사람, 그래서 상대의 슬픔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절로 따라온다.


'유진목'이란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그의 시집이나 책은 읽은 적이 없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제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여행 에세이를 나는 즐기지 않아서다. 코로나 시국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 사진을 담아낸 책을 베트남 하노이 여행기 대신 ‘유진목의 감정 여행, 마음 여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지나고 있을 때, 의지와 상관없는 일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도망치고 싶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싶은 순간 말이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짐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유진목에게는 하노이가 그랬다. 그는 아침 약, 저녁 약을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날들, 약을 먹기 전에는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알코올이 아닌 약으로 대체되었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 잠들기를 기도한다.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라 하노이에 가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났다. 하노이에서 돌아왔는데도 자꾸 하노이에 가고 싶어서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나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서 또 한 번 하노이에 다녀왔다. 한 번 본 커피 가게 사장이, 오토바이 기사가, 호텔 직원이 이제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글을 읽으며 같이 침잠하고 웃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산책을 하고 기차에서 잘못 내리고 비를 맞고 하다 보면 하노이에는 뭐가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노이에는 내가 있어요라고 답하는 그처럼 나도 하노이에 있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그는 힘든 소송을 진행했다. 무려 육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분노, 미움, 슬픔과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고 끝이 났다. 하지만 그에게 육 년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


삶이 기다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 경험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락하고 병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90쪽)


모든 감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곳이 필요했다. 그에게 하노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 가면 웃을 수 있고 그곳에 가면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곳. 나를 잡아끄는 상념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것. 맘껏 신나서 맘껏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곳. 낯선 이에게 무표정이 아닌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어도 되는 곳.


과거의 단단한 끈에서 폴려난 나는 바로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폴짝폴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만 하노이에 오는가 했더니 내 두발을 묶은 지긋지긋한 과거를 끊어내려고 그랬구나. 잘했다. 잘했다. 나는 나에게 잘했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134쪽)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말을 생각할 때, 유진목의 다른 글을 만나면 하노이가 떠오를 것이다. 뜨거운 열기와 커피와 담배와 사람들의 웃음으로 채워진 하노이 말이다. 누군가 슬픔에 힘겹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책은 그만의 하노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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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시가 되고 시는 일기가 된다. 시를 쓰려고 한 게 아니지만 일기는 쓰다 보면 길을 잃고 차마 알아볼 수 없는 감정에 닿는다. 그런 것들이 모이고 하나하나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쓴 짧은 몇 줄 혹은 긴 장문의 글은 어느 날에 읽어보면 시로 변해있다. 울프의 일기와 황인찬의 시집을 두고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다.


일기와 시, 그 끝에 닿는 게 같은 감정일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 일기』는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있었다. 당장 읽겠다거나 사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 이제 읽을 때가 된 건 아니고 사 버렸다. 그러니까 사 버린 것이다. 샀으니 됐다. 나는 뿌듯하다. 그래도 펼친다. 펼쳐서 나온 날의 일기는 이렇지 않고 짧은 일기를 찾았다.


예절 바른 편지를 보냈다. 아직 답장이 안 왔고, 또 올 리도 없다. 덕분에 나는 7월에 소설을 쓰다 말고 밖으로 나가, 머리에 모피 털이 달린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전에 없이 멋진 봄이다. 부드럽고, 파랗고, 안개가 서려 있다. (3월 28일, 화요일)


편지를 썼던 날이 언제였던가. 그러니 답장 같은 게 올 리가 없다. 새벽 어스름에 온통 뿌연 기운이 가득했다. 안개가 나를 덮치는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서서히 안개는 사라지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루가 열렸다. (6월 16일, 금요일, 울프를 따라 써보기)





황인찬 시에 대한 기억은 첫 시집의 느낌이 좋아서 꾸준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 시집이 나오면 관심이 가고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엔 이런 시가 있다. 여름이라서, 장미라서, 눈에 들어왔는데 슬프구나.


장미가 화병에 꽂히기로 결심했으므로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온 집안에 썩은 내가 가득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왜 꽃을 버리지 않느냐고 묻겠지

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면 장미는 완전히 마르고

너는 이 집에 없을 것이다


꽃은 묘지에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는 법인데


화병에 장미 한 다발이 있을 것이다

목이 꺾긴 채로 말라버리기로 되어 있는 장미들


나는 너에게 장미 한 다발을 준다

그것이 장미의 결이라고 믿으면서 (「장미는 눈도 없이」, 전문)


일기를 쓰고 시를 읽는 하루를 그려보면 근사하다. 하지만 일기를 쓰고 시를 읽는 하루를 사는 일은 근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흐르는 일상, 생각과 똑같은 일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시 읽고 일기 쓰는 마음은 간직해 보도록 하자.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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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1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프일기 엄청 두껍네요 후덜덜
황인찬 시인 시 맘에 듭니다! 예전에 시 낭송 들었는데 목소리가 참 좋으시더라고요.

자목련 2023-06-19 09:27   좋아요 1 | URL
얇은 시집 옆에 있어서 더 두껍게 보이네요 ㅎ
황인찬 목소리, 급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16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프 일기는 저도 보관함에 두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울프 소설들부터 읽어야할텐데...^^ 시를 읽고 일기를 쓰는 마음. 마음을 간직한다는 말이 그냥 좋습니다^^

자목련 2023-06-19 09:28   좋아요 1 | URL
살짝 넘겨봤는데 일기를 읽고 울프의소설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같이 읽어도 좋을 것 같고요.
간직해야 할 마음이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3-06-1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프 일기‘ 읽고 울프의 작품 이해하는데 도움 받았어요.
글 잘 쓴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고요^^

자목련 2023-06-19 09:29   좋아요 1 | URL
역시 페널로페 님은 이미 만나셨군요.
버지니아 울프는 정말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3-06-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은 일찌감치 사다 놓긴 했습니다만^^;;;;

자목련 2023-06-19 09:29   좋아요 1 | URL
나무 님 책장에 없는 책은 궁금합니다. ㅎㅎ
 
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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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을 만났을 때 바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면 시간만 낭비한다. 선택지가 하나일 때 고민 없이 선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매번 고민한다. 더 나은 선택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려주는 이가 없어 더 힘들다. 안내표지를 찾을 수조차 없다.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고비,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좌절한다.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랬다. 처음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불안만 증폭되었다. 김혜진의 짧은 단편 소설 『완벽한 케이크의 맛』에서 만난 몇 편의 소설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지나왔지만 온전히 나오지 못한 감정들이 아프다.


비염으로 인한 기침이나 재채기가 코로나에 대한 공포를 키워 결국엔 해고 사유가 아닌데도 학원 강사를 내 보내야만 하는 「강사의 자질」은 2020년의 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개학이 늦어지고 비대면 수업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때 특히 학원가의 피해가 컸다고 알고 있다. 오래오래 학원에서 함께 일할 좋은 강사였지만 불안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불안을 키우는 건 감염병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었으니까.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건 마음의 문제였으니까. (28쪽, 「강사의 자질」)


이처럼 증명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피해를 보는 일은 주변에 많다. 내 일이 아니기에 진실보다는 소문에 의지하게 된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 때문에 강습반 부모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 빵집 「밀 베이커리」는 ‘나’에게 좋은 가게였다. 한 아이가 빵을 먹고 탈이 난 후 모든 상황이 변했다. ‘나’는 빵집을 계속 다녔고 부모들은 ‘나’와 아이를 은근히 따돌렸다.‘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야 했을까. 무리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 주류의 뜻에 따라야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시선이 느껴져 씁쓸하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걸 부인하지 못해서.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앞과 뒤가 있지만 우리는 때로 한쪽만 보려 한다. 목소리가 큰, 지위가 높은, 갑과 을 중에서는 갑의 쪽을 말이다. 다른 쪽도 보고 듣겠다고 생각하지만 곧 잊는다. 내 일이 아니라서. 그 모든 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김혜진은 차분하지만 조곤조곤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고 혼자서 살 수 없는 곳이라고.


그런가 하면 타인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속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마주하는 가족들의 낯선 모습이 보여주는 마음이나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미란을 만난 「십 년」에서 발견한 ‘수지’의 마음이 그러하다. 잊고 있었던 본연의 마음이랄까. 그러니까 맘에 안 들고 싸우기 일쑤인 가족을 향한 애틋함 같은 것 말이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103~104쪽, 「십 년」)


마음이라는 건 참 어렵다. 꺼내서 보여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과 글, 행동을 통해서 짐작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여도, 친한 친구여도 말을 숨기고 감추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도 필요하다. 「극락조」속 두 ‘수연’과 ‘희나’도 다르지 않았다. 식물을 키우고 있는 수연은 출장을 갈 때 희나에게 부탁을 하는데 희나는 이번에는 어렵다고 말하지만 수연의 걱정이 떠올라 가게 된다. 물을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날 다시 가서 화분 갈이를 가다 손을 다치고 말았다. 의사는 심각한 상처라고 말했지만 희나는 수연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수연은 화분을 갈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희나가 화분을 갈면서 극락조의 뿌리를 다치게 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128쪽, 「극락조」)


김혜진의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완벽한 케이크의 맛』의 짧은 단편은 이전에 느끼지 못한 김혜진의 감각을 느낀 것 같아 좋았다.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고 힘들지만 꼿꼿이 서려고 애쓰며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어우러진 그림도 좋았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가 그러하지만 특히 보드라운 온기가 전해지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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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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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는 가을이나 겨울을 원했다. 여름은 모두에게 힘들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작 그 해 여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리석게도 큰언니가 말한 가을이나 겨울에 담긴 진짜 의미를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큰언니는 조금 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이 모두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으로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계획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는 일,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는 건 축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할머니, 아버지와 다르게 큰언니의 죽음이 그러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병행하면서 직장을 다녔던 큰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유언장을 남기고 장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각종 서류를 변경하고 보험이나 은행 업무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연락처와 담당자의 이름이 있는 목록도 있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랐던 큰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은모든의 소설 『안락』을 읽으면서 큰언니를 포함 돌아가신 가족이 생각났다. 가까운 미래 자율주행이 일반화되고 일정 조건에 부합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안락사의 법안이 통과되는 일이 현실이라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가족이 아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죽음을 계획할 수 있다면 차근차근 계획할 수 있을까. 친구랑 종종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소설은 화자인 ‘지혜’의 할머니가 그 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려 5년 후에 실행하겠다는 계획을 가족에게 알린다. 그에 따른 반응과 시간이 흐른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호사인 지혜의 언니 지경만이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상했듯 할머니의 계획에 엄마는 크게 반대한다. 지혜에게는 할머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가 아니던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이 있지만 죽음은 다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미래에는 소설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인간의 수명만큼 삶의 만족도와 가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끝내 붙잡고 유지하고 싶은 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터. 소설에서 할머니는 당뇨와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떠나기 전에 남겨진 가족과 앙금을 풀고 서로를 더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소설뿐 아니라 우리네 생에도 마찬가지다. 병실에서 큰언니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울기만 했을 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큰언니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견했지만 나는 나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삶의 마지막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48~149쪽)


지혜의 할머니는 자신이 계획대로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떠난다. 지혜와 같이 만든 자두주를 모두와 나눠 마신 후에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사실상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과 슬픔, 이별의 아픔으로 둘러싸인 죽음이 아닌 그런 죽음을 원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安樂)이란 제목처럼 우리 생의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원하는 죽음과 장례식을 그려보는 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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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6-13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한예리 배우 낭독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의 모습 덕분에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3-06-14 08:42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대화로 맺음하는 죽음, 우리가 바라는 죽음 가운데 하나의 형태가 아닐까 싶어요. 유수 님, 산뜻한 하루 보내세요^^

hnine 2023-06-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읽으며 이게 소설 속의 인용문이길 바랐습니다.

자목련 2023-06-14 08:41   좋아요 0 | URL
죽음은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요.
나인 님, 환한 하루 보내세요^^

물감 2023-06-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자목련 님. 덤덤하게 쓰셨지만 과거의 아픔을 불러와 맹렬히 싸우셨을 테죠. 저도 가족들과 매우 친한 사이라서 죽음이 온다면 확 무너져버릴 거에요. 죽음이란 걸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참.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요 문장에 한 10초 쯤 머물다 갑니다.

자목련 2023-06-15 09:02   좋아요 1 | URL
가족들과 매우 친한 물감, 그 순간이 아주 멀리 있을 거예요. 죽음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그 시절에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죠. 죽음을 알아도 우리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요^^
 

테마소설은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내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가족을 테마로 한 『끌어안는 소설』은 가족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와 고정된 틀을 깨고 색다른 가족의 모습을 안내한다. 『끌어안는 소설』는 짧게는 1년, 길게는 20여 년 전에 발표된 소설을 통해 가족의 형태와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정지아, 손보미, 황정은, 김유담, 윤성희, 김강, 김애란이 들려주는 가족을 만나는 동안 나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을 읽은 일은 즐거웠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을 다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출판된 단편 가운데 가족에 대한 소설을 엮은 책으로 목록을 보며 특히 반가웠던 건 손보미, 황정은, 윤성희의 단편이었다. 손보미의 등단작 「담요」, 황정은의 첫 소설집에서 만난 「모자」, 슬픔을 유머로 승화하는 윤성희의 「유턴 지점에 보물 지도를 묻다」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게 좋다.


이 단편들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황정은의 「모자」는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에 모자로 변한다. 아버지가 원하거나 의도한 건 아니다. 그런 모자, 그러니까 아버지를 발견하는 자식들은 아버지가 처음 모자로 변했던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를 이해하려 한다. 모자로 변하는 아버지랑 사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라서, 가족이라서, 모자를 챙기고 모자를 살피지만 반대로 그 모자를 하찮게 여기며 방치하고 버릴 수도 있다. 내 아버지가 그렇다면, 내 가족이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소설 속 모자는 다른 것으로 대입하면 휠씬 쉽다. 싫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이나 태도, 고집 같은 것들. 이번에 「모자」를 다시 읽으면서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오다 넘어진 아버지,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부르던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생각하니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손보미의 「담요」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경찰인 ‘장’의 아들은 좋아하는 록 밴드 콘서트에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 ‘나’는 ‘한’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유명해졌다. ‘한’은 그런 ‘나’를 비난하고 관계를 끊었다. ‘한’의 장례식상에서 ‘장’을 보았고 나중에 그와 만나 아들의 사고에 대해 듣는다. ‘장’은 콘서트 때 아들에게 건넸던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살다 순찰을 하다 새벽 추위에 떠는 어린 부부에게 담요를 건넸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는 걸 알면서도 ‘장’은 콘서트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자리를 예매했더라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여길 것이다. 순찰을 하며 만난 어린 부부에게 하는 “당신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일 거야.”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이며 가족이란 무엇일까. 정지아의 「말의 온도」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어머니를 퇴직 후 그 곁에서 딸이 바라보는 어머니를 그린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 남편과 자식의 입맛에 맞춰 끼니를 챙기고 혹여라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는 어머니. 여든이 넘은 어머니의 취향에 대해 예순이 넘어서야 하나씩 알아가는 딸. 엄마가 좋아하는 꽃, 엄마가 좋아하는 색,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단 번에 말할 수 있는 자식은 몇이나 될까?


가족의 형태, 정체성으로 돌아오면 단란한 가정의 표본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다. 윤성희의 「유턴 지점에 보물 지도를 묻다」는 혈연이 아닌 가족에 대해 말한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입양은 아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혼자가 된 네 명이 우연하게 만나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보물지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는 모습에서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미래를 배경으로 심각한 인구 감소와 출생률 저하를 위해 국가 정책으로 ‘우리 아빠‘와 ‘우리 엄마’를 통해 ‘우리 아이’를 생산하는 김강의 「우리 아빠」, 한 번도 엄마를 본 적 없어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조카에게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엄마라고 소개하는 삼촌의 엉뚱함과 그것을 믿고 주황색 블랙박스에 인사를 하고 이별을 하는 내용의 김애란의 「플라이데이터리코더」.


가족을 그린 소설을 생각하면 삼남매는 모두 실패한 인생들로 갈 곳 없어 노모의 집으로 모여 든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과 100세 시대의 돌봄과 유산으로 얼룩진 우리네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유현재의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이 생각난다. 가족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삶을 힘들게 하는가.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든다. 그러다 나도 언젠가 막연한 시간이 아니라 곧 그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그러니 소설은 소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된다. 그런가 하면 25년 만에 생전 처음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오 마이코의 소설 『걸작은 아직』은 가족은 가족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가족을 갖고 싶은 이, 제발 가족과 떨어져 살고 싶은 이, 사정은 다르지만 간절한 그 이름, 가족이다. 지지고 볶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이야기, 소설의 구절처럼 그게 삶이고 역사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고령화 가족』중에서)


책에서 만난 가족은 그들만의 사정이 그런 이유로 서로를 끌어안는다. 삶이 다양해진 만큼 가족도 그러하다. 현실에서는 더욱 다양한 모습의 가족이 존재할 것이다. 때로 부딪히며 때로 돌아섰다가 그리워하는 가족의 모습. 징글징글하다고 말하면서 떼어내지 못하는 우리네 가족을 떠올린다. 나와 가족 사이의 거리는 어떤지 그 관계는 괜찮은지. 가족을 힘껏 끌어안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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