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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평점 :
큰언니는 가을이나 겨울을 원했다. 여름은 모두에게 힘들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작 그 해 여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리석게도 큰언니가 말한 가을이나 겨울에 담긴 진짜 의미를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니까 큰언니는 조금 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이 모두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으로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구나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은 계획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는 일,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는 건 축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할머니, 아버지와 다르게 큰언니의 죽음이 그러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병행하면서 직장을 다녔던 큰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유언장을 남기고 장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각종 서류를 변경하고 보험이나 은행 업무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연락처와 담당자의 이름이 있는 목록도 있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랐던 큰언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은모든의 소설 『안락』을 읽으면서 큰언니를 포함 돌아가신 가족이 생각났다. 가까운 미래 자율주행이 일반화되고 일정 조건에 부합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안락사의 법안이 통과되는 일이 현실이라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가족이 아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죽음을 계획할 수 있다면 차근차근 계획할 수 있을까. 친구랑 종종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도 같은 생각일까.
소설은 화자인 ‘지혜’의 할머니가 그 법이 통과되기를 기다려 5년 후에 실행하겠다는 계획을 가족에게 알린다. 그에 따른 반응과 시간이 흐른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호사인 지혜의 언니 지경만이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상했듯 할머니의 계획에 엄마는 크게 반대한다. 지혜에게는 할머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가 아니던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이 있지만 죽음은 다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미래에는 소설과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인간의 수명만큼 삶의 만족도와 가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끝내 붙잡고 유지하고 싶은 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터. 소설에서 할머니는 당뇨와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떠나기 전에 남겨진 가족과 앙금을 풀고 서로를 더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소설뿐 아니라 우리네 생에도 마찬가지다. 병실에서 큰언니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울기만 했을 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큰언니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견했지만 나는 나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삶의 마지막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48~149쪽)
지혜의 할머니는 자신이 계획대로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떠난다. 지혜와 같이 만든 자두주를 모두와 나눠 마신 후에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사실상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과 슬픔, 이별의 아픔으로 둘러싸인 죽음이 아닌 그런 죽음을 원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안락(安樂)이란 제목처럼 우리 생의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원하는 죽음과 장례식을 그려보는 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