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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평점 :
글에는 감정이 있다. 당연하다. 애써 숨기려 해도 어떤 틈새로 감정이 새어 나온다. 참 이상하다. 글이 주는 위로와 위안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위로를 전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떤 글은 슬그머니 내가 기대게 만든다. 유진목의 『슬픔을 아는 사람』도 그런 책이다. 누군가 이 책이 많은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사람 꽤 있다. 그러니까 슬픔 따위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 슬픔이 없는 사람, 그래서 상대의 슬픔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절로 따라온다.
'유진목'이란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그의 시집이나 책은 읽은 적이 없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제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여행 에세이를 나는 즐기지 않아서다. 코로나 시국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 사진을 담아낸 책을 베트남 하노이 여행기 대신 ‘유진목의 감정 여행, 마음 여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지나고 있을 때, 의지와 상관없는 일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도망치고 싶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싶은 순간 말이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짐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유진목에게는 하노이가 그랬다. 그는 아침 약, 저녁 약을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날들, 약을 먹기 전에는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알코올이 아닌 약으로 대체되었지만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 잠들기를 기도한다.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라 하노이에 가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났다. 하노이에서 돌아왔는데도 자꾸 하노이에 가고 싶어서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나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서 또 한 번 하노이에 다녀왔다. 한 번 본 커피 가게 사장이, 오토바이 기사가, 호텔 직원이 이제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글을 읽으며 같이 침잠하고 웃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산책을 하고 기차에서 잘못 내리고 비를 맞고 하다 보면 하노이에는 뭐가 있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노이에는 내가 있어요라고 답하는 그처럼 나도 하노이에 있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그는 힘든 소송을 진행했다. 무려 육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분노, 미움, 슬픔과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고 끝이 났다. 하지만 그에게 육 년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
삶이 기다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 경험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일을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쇠락하고 병들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90쪽)
모든 감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곳이 필요했다. 그에게 하노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 가면 웃을 수 있고 그곳에 가면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곳. 나를 잡아끄는 상념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것. 맘껏 신나서 맘껏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곳. 낯선 이에게 무표정이 아닌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어도 되는 곳.
과거의 단단한 끈에서 폴려난 나는 바로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폴짝폴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만 하노이에 오는가 했더니 내 두발을 묶은 지긋지긋한 과거를 끊어내려고 그랬구나. 잘했다. 잘했다. 나는 나에게 잘했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134쪽)
『슬픔을 아는 사람』이란 말을 생각할 때, 유진목의 다른 글을 만나면 하노이가 떠오를 것이다. 뜨거운 열기와 커피와 담배와 사람들의 웃음으로 채워진 하노이 말이다. 누군가 슬픔에 힘겹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책은 그만의 하노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