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읽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힘겹게 읽은 것 같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이야기다. 11편의 단편을 다 읽으면서 이전에 읽은 단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제목을 보고는 어떤 내용인지 몰랐는데 그 결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머지 10편은 처음 읽었고 그 가운데 가장 특별한 건 역시나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였다. 이 단편집에서 레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정체성과 자신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여성에게 말이다.


소설 속 1960년대가 아닌 현재와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성의 일과 공간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지만 현실에서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을 하는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가 부족하냐고. 당신은 넓은 저택에 건강한 아이들과 든든한 남편과 살고 있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수전과 매슈에겐 무엇이 필요했던 것일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었다.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남편의 외도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수전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하는 기쁨을 얻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수전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수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가족들이 엄마의 방을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쉬라고 배려했을 때 그녀가 왜 그곳에서 오롯이 혼자임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수전의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내가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 된다고, 설령 외도를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식의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감정이 별게 아니라는 무관심과 뻔뻔함이다. 수전은 아무렇지 않게 외도를 인정한다. 가상의 남자를 만들고 직업을 정한다. 호텔에서 아내도 엄마도 아닌 익명의 존재로 충분했던 수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9호실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수전에겐 필요했다.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수전의 말에 나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겹쳐들린다. 40대인 수전이 느끼는 그 감정은 뭐라 불러야 할까. 고독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죽음.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러나 나는 수전의 선택은 존중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만이 그녀가 만족하는 유일한 것,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밖에. 다만 수전에게 공감하면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거리 두기, 상담, 같은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수전도 몰랐을 리 없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문화가 여전할 걸 보면 말이다. 차별, 편견, 위선과 싸우며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이어진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났다.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만의 방을 갖는 일은 말이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주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도 필요할 때마다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격려할 이도 있어야 한다. 수전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고 연대할 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40대의 수전은 50대, 50대의 멋지고 당당한 수전으로 살지 않았을까.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의 중년 여성 조앤도 다르지 않다. 조앤이 느낀 공허. 어쩌면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여행 중 의도하지 않게 사막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그녀는 달라질 것을 결심한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거라고.





사막에 온 건 그것 때문이다. 이 맑고 무지막지한 빛줄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봄에 나는 없었다』 중에서)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소설 밖 현실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제도적 보완과 정책이 간절하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은 그렇게 거울이 된다. 여성만 비추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


우리에게 저마다의 19호실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궁극적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를위해 사는 삶,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을 위해 비상금을 모으고 가족이 아닌 절 처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애써도 괜찮다. 나를 아는 일, 나를 돌보고 알아가는 시간은 필요하니까. 나와 만나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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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변모하다. 그러니까 표지나 디자인을 달리한 개정판과 특별판도 나오고 일부는 작가가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대체로 책을 구매하는 시기는 그 책이 출판되었을 즈음이 가장 많다. 어떤 책은 뒤늦게 재발견의 기쁨으로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만남도 있다. 미루고 미뤄서 이제야 손에 잡은 책, 읽으려고 펼치니 앞 부분에 가름끈이나 책갈피가 꽂힌 책. 이런 책은 읽다가 멈춘 책, 읽다가 멈추었다는 사시조차 잊은 책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읽다 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거다.





내가 미니 책장이라고 이름 붙인 책장에 그런 책을 수납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니까 읽기에 치중하려는 사진과 기록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는 10년 정도 책장에 있었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곧 10년 가까이 될 것 같다.








그나마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들』은 겨우 3년인다. 도대체 나는 어떤 책을 읽느라 이 책들을 모른척하고 지냈을까. 먼저 읽은 이들의 좋은 리뷰를 보며 나, 나도 이 책이 있는데 생각만 했다.






최근에 앤드퓨 포터의 단편집 『사라진 것들』을 보고 그의 다른 소설도 읽다 말았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단편집에 자꾸 눈이 간다.







적어도 한 권 이상은 읽으려고 한다. 책장에 안긴 책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나를 잘 알기에 그건 장담할 수 없다. 1월이 가기 전에 한 권이라고 읽으면 나름 뿌듯할 것 같다. 그래서 가장 먼저 책장을 탈출한 책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다. 살구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정이 단단하고 부드럽다. 일상에서 빚어올린 은유와 상징이 아름답다.


눈과 비, 그리고 안개의 지배로 열린 하루다. 이 하루를 닫는 순간를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들로 열린 하루의 끝은 내 의지대로 마감할 수 있도록 주어진 하루를 알차게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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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18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미니 책장 탐나요!!ㅎㅎ
제가 물건 욕심이 없는 편인데 (노력도 하고요)
저건 하나 갖고 싶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던 책에 레이먼드 카버의 저 책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신기하네요^^

자목련 2024-01-19 12:49   좋아요 1 | URL
예스에서 구매했어요. 알라딘에서 이런 기획을 해주면 좋겠어요. ㅎ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181775

미미 님이 어떤 책에서 카버를 언급했을까 궁금하네요^^

미미 2024-01-19 13:23   좋아요 0 | URL
<책상 생활자의 요가>란 책에 글 쓰기 이야기하며 언급됩니당^^

거리의화가 2024-01-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니 책꽃이 너무 이쁘네요. 색깔이 월넛인가요? 그윽한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세 권 중 솔닛의 책이 들어 있어 반갑네요. 신간인 포터의 책은 당장은 읽지 못할 것 같고 올라오는 후기로 일단은 만족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욕심은 왜 사라지지 않는 건지ㅎㅎ 저도 병렬로 지금 몇 권을 읽고 있는데도 자꾸 눈길이 다른 데로 갑니다ㅋㅋ

자목련 2024-01-19 12:51   좋아요 0 | URL
월넛입니다. 솔닛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화가 님 덕분이에요.
화가 님의 리뷰를 보고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래도 포터의 책은 곧 장만할 것 같고요. ㅋㅋ

stella.K 2024-01-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버의 책이 제법 두껍네요.
올핸 카버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싶네요. 저도 솔닛
의 책 가지고 있는데 올핸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누구는 사놓고 3, 4년내 읽지 않으면 처분하라고 하던데 정말 10년만에 발견하는 책 있거든요. 말 듣고 처분했으면 어쩔 뻔입니까? 읽고 버릴 셈 치고 천원에 샀던 책도 넘 좋아 못 버리는 책도 있던데 말입니다. ㅎ

자목련 2024-01-19 12:52   좋아요 1 | URL
올해 카버와 솔닛의 책을 읽으시길 바라요!
맞아요,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ㅎㅎ

blanca 2024-01-1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미니책장 넘 사랑스럽네요. 딱 읽고 싶은 책만 선별해서 꽂아두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앤드루 포터 책 사놓았고 지금은 <미들마치> 읽고 있어요. 갑자기 읽고 싶은 책들이 쏟아져서 행복합니다. ^^ 올해 신간 출간 계획 훑어보니 김연수 작가가 없어서 섭섭했어요.

자목련 2024-01-19 12:54   좋아요 0 | URL
딱 말씀하신 그런 용도로 구입했어요.
읽고 싶은 책들이쏟아져 행복한만큼 자꾸 뒤로 미뤄지는 책도 쌓이는 것 같아요. ㅎ
김연수 작가는 작년처럼 깜짝 출간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잠자냥 2024-01-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님에게도 이런 면이 있군요?
십년묵힌책 읽기 ㅋㅋㅋㅋㅋㅋㅋ
신간인 포터 책까지 포함해서 4권 다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꼭 읽으세요!!!! ㅋㅋㅋ

자목련 2024-01-19 12:55   좋아요 0 | URL
차마 말하지 못하는 묵은 책들 많아요. ㅎㅎ
솔닛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권 읽기를 하고 싶은데.

은오 2024-01-1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미니책장 딱 서너권만 들어갈 사이즈인게 진짜 좋네요!! 저렇게 폭이 좁은 건 첨보는 것 같아요. 탐납니다....🤤
명랑한 은둔자가 자목련님을 어서 만나길 ㅎㅎㅎ
아.... 저도 미룬 책 진짜 많은데 중간중간에 한권씩 끼워서 읽어야겠어요 ㅠㅠ

잠자냥 2024-01-18 21:05   좋아요 1 | URL
“물욕” 반성한 지 몇 시간 안 지났다.

은오 2024-01-19 04:52   좋아요 0 | URL
탐은 좀 날수도있는거 아닌가요
ㅠㅠ

자목련 2024-01-19 12:57   좋아요 1 | URL
요기서 샀어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181775

<명랑한 은둔자>옮긴이의 말만 몇 번째...

망고 2024-01-1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명랑한은둔자 나오자마자 사서 안 읽고 있어요!ㅋㅋㅋㅋ제 책장엔 10년쯤 새책으로 묵은 것들 뿐아니라 그 이상도 많아요ㅋㅋㅋㅋㅋ큐ㅠ

자목련 2024-01-19 12:5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묵은 책들을 꺼내 읽어야 하는데.
망고 님도 올해엔 <명랑한 은둔자>를~~

다락방 2024-01-18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미니책장을 자목련 님과 같은 용도로 사게 된다면 하나만 사면 안될 사람이므로 안사는 걸로..

명랑한 은둔자 저도 가지고만 있어요. ㅋㅋ

잠자냥 2024-01-18 21:06   좋아요 0 | URL
넌 가지고만 있는 게 대체 몇 천 권이냐.

자목련 2024-01-19 12:59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어마무시한 책들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압니다.
없는 게 없는 잠자냥 님의 책장과 비슷할 듯~~
 
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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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나는 장류진의 소설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처음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찬사와 호평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기발한 생각이라고만 여겼고 나와 다른 세대의 이야기구나 싶었고 그만큼 나는 시류를 따르지 못하는 옛날 사람인가 싶었던 거다.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코인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 세계를 알 리가 없었다. 재미와 별개로 공감은 다르니까. 두 번째 단편집 『연수』를 읽으면서 그 마음은 조금 바뀌었다.


수록된 6개의 단편 가운데 표제작인 「연수」와 「펀펀 페스티벌」은 이미 읽었던 소설이었고 나머지 4편은 처음 읽는 소설이었다. 장류진 특유의 감각과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일상을 보다 가까이 다가간 내밀하게 담아낸 감정이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과 『달까지 가자』에서는 특정 세대의 이슈와 관심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할까.


「연수」는 다시 읽으니 운전 연수를 받는 '주연'의 두려움과 걱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뭐든 잘 하는 주연에게도 누군가의 격려와 응원이 필요했다는 게 보였다고 할까. 맘카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회원들의 삶에 절대 공감하지 못했던 그가 살짝 얄밉게 보였던 지난번과 다르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을 주연이 보였다.


“계속 직진, 그렇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연수」, 49쪽)


잘 하고 있다는 응원과 격려는 주연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간절한다는 걸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밥이 아니라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나 인턴도 괜찮고 충분하며 잘 하고 있다는 칭찬에 인색한 시대인지 보여준다고 할까.


그런 응원은 「동계올림픽」의 ‘선진’에게도 절실했다. 작은 방송사 인턴인 선진은 추운 겨울날 동계 올림픽 취재를 위해 국가대표 선수의 집을 방문한다. 이 취재는 선진에게 중요하다. 정직원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인 것이다. 큰 방송사의 기자들 사이에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구박을 당하는 열악한 현장이지만 선진은 어떻게든 현장 취재를 하려고 노력한다.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인 선진과 다르게 부모님의 기대는 날로 커진다. 사회 초년생이라면 느낄법한 복잡한 감정을 장류진은 선진의 하루를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다.


「미라와 라라」에서는 조금 다른 응원이 등장한다. 소설은 서른두 살의 나이에 국문학과에 입학해 열두 살이나 어린 나이의 동기들과 함께 소설을 배우는 ‘미라’에 대한 이야기다. 미라는 성공한 억만장자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실력은 꿈을 향한 열정과는 비례하지 않았다. 소설창작회 멤버들은 미라의 소설을 무시하고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미라를 바라보는 ‘나’는 미라가 부럽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부족할 것 없는 미라에게 소설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어떤 응원을 해야 할까.


그런가하면 제목부터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전해지는 「공모」는 장류진이 추리소설을 써도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모」에서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기업에서 부장까지 올라간 화자 ‘현수영’은 회사 직원 모두가 좋아하는 술집을 운영하는 ‘천 사장’을 싫어한다. 그래서 부장이 된 후 회식 문화를 저녁이 아닌 점심 회식, 공연 관람으로 바꾼다. 상사는 암에 걸린 천 사장 소식을 전하며 현수영에게 은밀한 부탁을 한다. 묘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라고 할까.


로드바이크 동호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라이딩 크루」는 진짜 재미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환호하는 회원의 등장으로 술렁이는 동호회. 동호회의 가입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채 지질한 인간의 면모를 장류진은 경쾌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런 게 장류진의 장점이구나 싶다.


다채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소설집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나를 붙잡은 건 표제작 「연수」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응원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잘 하고 있다고, 그대로 나가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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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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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의 상황이 지난 어느 날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게 소설이나 현실이나 비슷하니까. 지나고 보면 사소한 문제가 당시에는 큰 문제였고 별거 아니라고 여겨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일들이 제일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된다. 뭘 원하지는 몰라서 헤매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힘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 시간을 『방황하는 소설』에서 마주한다.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의 단편을 통해 방황을 생각한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제목 그대로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정체성에 대한 방황, 가장 근원적인 방황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존재의 증명」 속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카페의 청년 말로는 단골이라며 그가 좋아하는 커피까지 알려준다. 이상한 건 ‘그’는 이름과 주소 이런 건 생각나지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는 정확히 생각난다. 커피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니까 확고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거다. 결국 파출소에 가서 지문을 조회하지만 실패하고 주변 CCTV를 통해 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는다. 놀랍게도 그의 취향대로 꾸며진 집이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그였다. (「존재의 증명」, 37쪽)


문득 나를 증명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꿈꾸는 게 무엇인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방황의 시간이며 아름다운 방황일 것이다. 물론 소설처럼 기억은 사라지고 취향만 남으면 큰일이겠지만 말이다.


좋아하고 잘 하는 걸 단번에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서 선배의 조언에 무조건 따르기도 하고 주변 환경에 이끌려 결정하고 후회한다. 그 과정을 혹독하게 보낸 이라면, 아니 자신도 모르게 그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박상영의 「요즘 애들」속 ‘남준’과 ‘은채’가 남 같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잡지사 인턴으로 일했던 남준과 은채에게 주어진 업무는 커피를 내리는 일, 고무나무에 물 주기, 정해진 시간에 트위터 업로드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작 4살 많은 선배는 정확한 업무를 알려주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결국 남준은 회사를 나온다.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 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방사능을 맞고 조증에 걸린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요. ( 「요즘 애들」, 79쪽)


이 자리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종류의 눈물이 차오르는 날도 있었다. 나는 내 눈물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가끔은 화가 났고 대게는 고독했다. ( 「요즘 애들」, 88쪽)


그 시절 남준이 선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 '요즘 애들'로 불리는 사회 초년생의 마음일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왔으면서 정작 배려하고 포옹하지 못한다. 이해는커녕 서로 오해만 쌓인다.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 요즘 애들이란 말이 참 무색하게 느껴진다.


살다 보면 방황은 여러 번 내 앞에서 길을 막는다. 한 번이면 충분한 방황은 없다. 후련하게 떨쳐 버리고 어떤 흔들림도 없다고 다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는 혼란, 후회, 미련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니 방황을 테마로 한 『방황하는 소설』 은 청소년을 위한 소설로 추천하지만 여전히 성장하는 어른에게도 좋다.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 갈등, 타인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순간, 상실의 슬픔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까. 그래서 최은영의 「파종」은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외삼촌의 죽음 후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딸 '소리'와 그런 소리를 지켜보는 화자가 천천히 괜찮아지는 과정은 그와 닮은 우리를 가만히 위로한다.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더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인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소리의 그 모른 척이, 침묵이 좋았다.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고,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파종」, 232쪽)


누군가 후회와 미련의 시간을 잘라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있기에 조금 덜 방황하고 조금 덜 후회하는 건 아닐까. 방황했기에 조금 더 단단해졌을지 모른다. 나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소중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방황은 여기서 끝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삶은 방황의 연속이며 우리는 그렇게 성장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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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사능 맞고 조증에 걸린 애. 이런 표현 좋습니다. 책 표지도 마음에 드네요 ^^

자목련 2024-01-12 14:17   좋아요 1 | URL
박상영 작가의 단편을 좋아하실 것 같네요^^
언급을 못했지만 박민정의 단편도 참 좋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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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왕관만 눈에 들어왔다. 왕관 뒤편으로 여성의 얼굴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형체가 사라지는 그런 이미지라고 하면 맞을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왕비나 공주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왕관과 멋진 드레스가 따라온다. 왜 이런 이미지가 각인되었을까? 어린 시절 왜 그런 공주를 꿈꿨을까? 아름다운 판타지라고 해도 돌이켜보면 창피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구해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주의 이야기. 전설이나 동화 속 주인공은 내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의존적 성향을 보인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정말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여기 새로운 공주가 있다. 한국 여성 작가 6명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는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시대에 맞게 자신만의 옷을 입은 공주를 보여준다.


연여름이 선택한 공주는 엄지 공주로 「스왈로우 탐정 사무소 사건 보고서」는 작은 동물의 세계로 인도한다. 배경은 먼 미래 시대로 각종 소행성이 등장한다. 그 시대에는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 화자인 ‘나’는 새의 유전자를 지닌 탐정으로 실종된 클론 ‘마야’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마야를 찾아 나선 곳에서 나는 무자비한 학대의 현장을 마주한다. 그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실상과 다름없었다.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고 협박한다. 마야(엄지 공주)를 비롯한 작은 동물과 미래의 변종 인류의 시선에서 본 세상은 불합리 그 자체였다. 작고 귀여운 엄지 공주를 떠올리다 동화 속 엄지 공주가 바랐던 행복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배명은 작가의 「측백나무성의 라푼젤」은 라푼젤을 한국의 가부장제와 동성애 혐오로 풀어낸다. 출장을 온 동해는 대학시절 은사인 교수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교수의 집으로 가던 중 ‘동해’는 한 여자를 만나 부탁을 받는다. 교수의 딸이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진실은 이랬다. 교수인 아버지가 딸의 동성애를 반대하며 딸을 가두는 모습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딸이 변했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 남들과 다른 사랑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회, 가능할까. 소설 속 동해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고 싶다.


동해는 이를 악물고 돌담을 붙들었다. 집 뒤쪽 측백나무에는 축대가 있어 가시철조망을 하지 않는 듯했다. 다행인가, 아닌가. 겨우 위로 올라선 동해는 밭은 숨을 내쉬며 집 가까이로 다가섰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위를 보는 순간, 2층 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너무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엔 표정조차 없었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86쪽)


문녹주의 「백설의 기고」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로 나는 계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비틀었다고 할까. 거기다 혼혈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정체성과 이민자의 삶에 대해 다룬다. ‘백선희’는 인기 작가다. 엄마는 미혼모, 혼혈이지만 이름에서 짐작하듯 하얀 피부를 지녔다. 그런 백선희도 미혼모가 되었고 혼혈을 낳았다. 자신과는 다른 까만 피부의 딸에게 ‘흑설’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과 딸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백설공주는 계모가 건넨 독이 든 사과를 먹었지만 「백설의 기고」에선 친모인 백선희는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다. 흑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기발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이었다.


호박마차, 유리구두의 신데렐라를 외계 존재로 재해석한 모래의 「변신」과 김치 회사를 배경으로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전설의 김칫독으로 변형시킨 류조이의 「고들빼기 공주와 전설의 김칫독」 은 유쾌하며 통쾌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주는 찾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화나 전설을 통해 여성차별과 수동적 태도를 당연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이 나도 멋진 왕자가 구원해 줄 삶을 기대했으니까.


이제 모두 안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구원해 줄 왕자는 없다는 걸. 삶이란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세상이 변하듯 이야기도 변하고 재창조되는 게 당연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변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시선도 변화한다. 안여름의 말처럼 의심과 반항의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행복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러니 이런 소설집은 반갑다.


오래된 공주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공주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의심과 반항도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안여름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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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왕자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1-11 09:33   좋아요 1 | URL
음, 저 왕자 된 건가요? ㅋㅋ

은오 2024-01-11 14:58   좋아요 0 | URL
아 저거 화살표 아니고 부등호여써요!! ㅋㅋㅋㅋ 왕자 따위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자목련님이 좋은 제 마음을 표현해봤습니다.

자목련 2024-01-12 14:18   좋아요 1 | URL
앗, 부등호였나요?
뒤늦은 감동으로 따뜻한 오후입니다!

잠자냥 2024-01-1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설에게 사과파이를 만들어 준 거 때문에 궁금한데... ㅠㅠ 이 책 전체는 읽기 싫고... ㅠㅠ
비밀 글로 좀 알려주세요. 궁금해요ㅠㅠ

2024-01-1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1-11 09:4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