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읽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힘겹게 읽은 것 같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이야기다. 11편의 단편을 다 읽으면서 이전에 읽은 단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제목을 보고는 어떤 내용인지 몰랐는데 그 결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머지 10편은 처음 읽었고 그 가운데 가장 특별한 건 역시나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였다. 이 단편집에서 레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정체성과 자신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여성에게 말이다.


소설 속 1960년대가 아닌 현재와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성의 일과 공간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지만 현실에서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을 하는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가 부족하냐고. 당신은 넓은 저택에 건강한 아이들과 든든한 남편과 살고 있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수전과 매슈에겐 무엇이 필요했던 것일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었다.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남편의 외도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수전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하는 기쁨을 얻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수전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수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가족들이 엄마의 방을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쉬라고 배려했을 때 그녀가 왜 그곳에서 오롯이 혼자임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수전의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내가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 된다고, 설령 외도를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식의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감정이 별게 아니라는 무관심과 뻔뻔함이다. 수전은 아무렇지 않게 외도를 인정한다. 가상의 남자를 만들고 직업을 정한다. 호텔에서 아내도 엄마도 아닌 익명의 존재로 충분했던 수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9호실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수전에겐 필요했다.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수전의 말에 나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겹쳐들린다. 40대인 수전이 느끼는 그 감정은 뭐라 불러야 할까. 고독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죽음.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러나 나는 수전의 선택은 존중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만이 그녀가 만족하는 유일한 것,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밖에. 다만 수전에게 공감하면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거리 두기, 상담, 같은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수전도 몰랐을 리 없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문화가 여전할 걸 보면 말이다. 차별, 편견, 위선과 싸우며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이어진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났다.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만의 방을 갖는 일은 말이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주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도 필요할 때마다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격려할 이도 있어야 한다. 수전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고 연대할 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40대의 수전은 50대, 50대의 멋지고 당당한 수전으로 살지 않았을까.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의 중년 여성 조앤도 다르지 않다. 조앤이 느낀 공허. 어쩌면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여행 중 의도하지 않게 사막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그녀는 달라질 것을 결심한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거라고.





사막에 온 건 그것 때문이다. 이 맑고 무지막지한 빛줄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봄에 나는 없었다』 중에서)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소설 밖 현실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제도적 보완과 정책이 간절하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은 그렇게 거울이 된다. 여성만 비추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


우리에게 저마다의 19호실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궁극적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를위해 사는 삶,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을 위해 비상금을 모으고 가족이 아닌 절 처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애써도 괜찮다. 나를 아는 일, 나를 돌보고 알아가는 시간은 필요하니까. 나와 만나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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