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시작이다. 이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따뜻함과 달콤함이 고맙다. 이 즈음의 날들은 불안이 짙어지기도 하고 오히려 담담해지기도 한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난분분 꽃잎이라면 아름답겠지만 조각난 마음은 그 모양새가 아주 밉다. 아버지의 유산 아닌 유산으로 인감을 떼는 일이 잦아졌다. 좀 전에 걸려온 올케언니의 전화의 통화 내용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있었던 시절은 봄이었고, 그 봄은 유일하고 특별한 계절이 될 것이다.

 

 어제는 장승리의 『습관성 겨울』과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시인 장승리의 첫 시집이라서, 제목 때문에 나는 그 시집이 읽고 싶어졌다.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바라보게 만드는 눈, 막심 고리키의 『은둔자 』, 존 버거의 시집 『아픔의 기록』, 어린 시절 갖지 못한 동화 『안데르센 메르헨』, 놀라운 할인가로 유혹하는 (이 책에 대한 호평도 읽었고) 『위대한 박물학자』, 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 석별. 옛날 이야기』가운데 일부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제니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김경욱의 『소년은 늙지 않는다』, 빅지혜의 『햇빛』, 정끝별의 『은는이가』도 이 계절에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은 계속될 것이다. 그 끝은 11월 20일이 된다.

 

 

 

 

 

 

 

 

 

 

 

 

 

 

 

 

 

 

 

 

 

 

 겨울은 시작되었고, 나는 지난 4월의 어느 날 찍어둔 이런 사진을 보고 있다. 김혜순의 시와 함께 말이다.

 

 

 

딸기

 

 

 접시에 붉은 혀들이 가득 담겨 왔다

 

 찬송 부르는 성가대원 입속의 혀처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네 혀가 내 혀 위에 얹혀졌다

 

 두 개의 혀에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세상이 온갖 맛을 음미하다 이제 돌아와 우리는 좁쌀 같은 돌기들을 다소곳이 맞대었다

 

 너는 입속에 혀만 있고 이빨이 없는 사람 같았다

 

 몸 저린 뿌리가 내장 사이로 번개처럼 뻗어내리고, 전기처럼 차디찬 시냇물이 머리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깨물면 붉은 물이 돋을까 봐, 나는 얼굴이 한정없이 게워낸 붉은 것들을 가만히 물고만 있었다 

 

 눈 맞은 나뭇가지처럼 포근한 네 개의 팔이 얽히고, 접시 가득 이 키스를 거두어들였다!

 

 그 작은 돌기들이 모두 네 씨앗들이었다는 말은 내가 네 혀를 다 짓이긴 후에야 들었다

 

 - 『당신의 첫』 44~45쪽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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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1월이 되었다. 11월에는 11월을 노래한 시를 찾게 된다. 이규리의 「11월」로 시작하는 11월, 친구가 보낸 문자에는 나희덕의 「11월」이 있었다.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에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넣어 말리고 있다  (「11월」의 일부)

 

 

 바람이 달라졌고 달라진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까 무서워 동동거리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11월의 첫날에는 캔맥주와 치킨을 먹었다. 냉장고에 남았던 마지막 캔맥주였다. 캔맥주를 좀 더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취하기 좋은 밤, 취해도 괜찮은 밤이 더 맞겠다. 11월은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음력으로는 여전히 9월인 11월이다.

 

 도서 정가제 실행을 준비하는 온라인 서점의 마케팅은 마지막이다.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구매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은 계속된다.  구간 시집과 세계문학을 검색한다. 그러다 이런 표지가 반가워 다시 신간 검색.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떠올리는 표지 염승숙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장편이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조건 끌리는 시인의 산문집 『소란』, 박연준 시인의 첫 산문집이라 더 끌린다.

 

 신중하고 신중한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첫 번째 리스트는 『열세 걸음, 『왼손잡이』, 『프랑켄슈타인』,『다른 방식으로 보기』, 『여인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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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점점 사람이 없어지는 걸까 저 겨울나무가 상실한 것은 없다 당신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갔을 뿐, 

  -「11월」전문, 71쪽

 

 

 

 

 

 


 

 이규리의 시로 시작하는 11월.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 계절에 태어난 이들도 떠올린다.

 내게 안부를 전하지 않는 당신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를 바란다.

 

 불안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해도 괜찮다.

 작년을 살았듯 올해도 살아가면 된다.

 날카로운 바람이, 당신의 체온을 질투한다면

 바람과의 키스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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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탁기가 고장 났다. 냉수 급수가 되지 않는다. 김희진의 소설 <옷의 시간들>처럼 애인이 떠난 것도 아닌데 세탁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사용했기에 고장이 난 것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 오주처럼 빨래방에 갈 수 없다. 내가 알기엔 이 소읍엔 빨래방이 없다. 내게 속한 옷들, 수건들, 양말과 속옷들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줄 수가 없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 적에도 단 한 번도 빨래방을 이용하지 않았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탁기들과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한다. 다시 이 소설을 읽어볼까. 한데 책이 어디에 있을까.

 

 빨랫감을 바구니에 옮겨 넣고 나름 애를 써 봤지만 세탁기는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하다. 검색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천했지만 요지부동이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상담을 예약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상담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엔 상담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아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상담 예약을 해야만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조급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루하다. 상담 전화가 끝났다고 해서 고장 난 세탁기가 바로 수리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방문 기사를 기다려야 하고, 부품을 바꾸게 되면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나의 조급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급하다.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내가 받지 않는다면 다시 전화가 걸려 올 텐데 말이다. 세탁기 고장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W. G. 제발트의 소설 <현기증. 감정들>의 표지 이미지처럼 말이다.

 

 하루 종일 세탁기가 나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단어는 세탁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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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0-2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같아요

자목련 2014-10-27 10:49   좋아요 0 | URL
그리 보아주시면 영광이지요. 하늘바람 님, 고맙습니다^^

조선인 2014-10-2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수 급수가 안 된다면 일단 온수급수와 연결부위를 바꾸면 어떨까요?

자목련 2014-10-28 09:57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방문 기사분이 부품을 교체하는 것보다 그 방법을 쓰면 어떠나고 하셨어요.
아주 오래된 세탁기라 온수급수도 안 될 경우에 부품을 교체하는게 더 낫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출장비는 지급되었지요, ㅎ
조선인 님,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mira 2014-10-2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세탁기 돌려놓고 이리 시간 때우고 있네요 ㅎㅎ

자목련 2014-10-28 09:54   좋아요 0 | URL
지금쯤 어제의 빨래가 잘 마르고 있겠네요^^
 

 

 어떤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나이를 지녔다.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다. 지나고 보면 모두 다 대수롭지 않은 감정들이란 말이다. 어제가 비의 시간이었다면 오늘은 햇볕의 날들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우산이 지배했던 어제의 물기는 증발해버렸다. 베란다에 널어 놓은 장우산은 말끔해졌다. 그런 우산을 바라보는 일은 유쾌하다.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기다렸던, 정말 기다렸던 김연수의 산문집이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이 산문집을 봄부터 기다렸다. 국화꽃 피는 가을에 만날 줄도 모르고 목련이 피는 순간부터 기다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제부터 김연수의 다른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는 말이다. 『소설가의 일』, 간단 명료하고 매우 정확한 제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 충동적인 구매를 했다. 산문집에 언급된 러셀 셔먼의 『피아노 이야기』를 주문한 것이다. 절판이라 중고로 주문했다. 알라딘 중고로 주문한 경우는 두 번뿐인데,  모두 김연수에 의한 책이었다. 나머지 한 권은  『선영아, 사랑이라니』 였다. 아, 나는 왜 이토록 김연수에 빠져드는가.

 

 김연수와 함께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도 반갑다. 제목에서 전해지는 결연한 의지가 어떤 용기를 부여하는 듯하다. 그런 제목으로는 마류야마 겐지의 『나는 길들지 않는다』 있다. 지난 산문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기대가 높았던 탓인지 흡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산문집은 조금 더 강렬한 느낌이면 좋겠다. 그리고 존 그린의 장편 『이름을 말해줘』는 아주 예쁜 소설일 것 같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미지의 크기는 애정의 크기다.)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잘 쉰 셈이다. (『지지 않는다는 말』 53~54쪽)

 

 

 읽지 않은 책이 많다는 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빨리 읽어줘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빨리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 읽고 책장에 넣어둔 책은 그 느낌을 표현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독자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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